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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론 신대원 강의 1~5 (김영규 교수)

Sola. 2024. 9. 18. 06:00

 

구원론 강의 1 (김영규) (안양대학교 신학대학원 M.Div. 3학년 조직신학 과정)

 

김영규 교수 강의 / 강윤석 강도사 요약

 

 

김영규 목사님께서 2005년도 안양대학교 신학대학원 M.Div. 3학년 조직신학 - 구원론 강의 하신 내요믈 노트필기한 것을 요약해서 올립니다. 구원론 A+학점을 받게 되는데 이 노트필기가 엄청난 공헌을 했습니다.^^

 

2005년 3월 8일(1주차)

 

구원론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여러분들은 구원론을 어떻게 설명할 것입니까?

자!! 아담의 사건에서 제일 기억남는 것은 무엇인가?

여러분들은 장로교회와 감리교회의 치명적 차이점을 무엇이라 보십니까?

이걸 명심해야 합니다. 알미니안이 예정론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지 믿음이 조건적이라는 것이 장로교회와 감리교회의 결정적 차이입니다.

17세기 신학자 알미니우스는 감리교회의 창시자 웨슬리보다 훨씬 성경적입니다. 웨슬리는 아예 예정론을 부정합니다. 웨슬리 신학은 한 마디로 "구원받으려면 지금 결단하십시오"입니다.

웨슬리 신학으로 무장한 감리교회를 21세기에 와서 이단으로 보지 못한다는 게 이상할 따름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의지가 구원의 원인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1:12의 "영접하는 자"는 개인적인 말이 아니라 시대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이 구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 절인 13절을 제대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의지에는 먼 원인과 가까운 원인이 있습니다. 13절을 봅시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이 정도만 봐도 "영접하는 자"가 어떤 존재인지를 명확하게 드러내주는 것이죠.

빌립보서 2:12-13도 구원에 있어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먼 원인과 가까운 원인을 잘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자, 아담의 죄로 인해 어떤 결과가 발생했나요?

성경은 "눈이 밝아졌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피할 수 없는 형벌의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즉, 눈의 밝아짐은 가장 큰 형벌의 내용이라는 점입니다.

죽음까지 점진적인 첫 단계가 바로 "눈이 밝아졌다"입니다.

 

"가인이 분개하였다" 이건 의미 의지 자체가 죄로 부패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결국 가인은 아벨을 죽였습니다. 즉,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충만했을 때, 살인을 저지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전에 아담과 하와에게는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바로 거짓이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그 거짓의 내용이란 "너가 하나님처럼 될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내용은 상당히 사실에 버금가는 내용입니다. 인간은 타락과 동시에 하나님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이는 가장 큰 비극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된 것입니다.

피조물과 하나님 사이에는 경계선이 있는데 이 경계선은 무한히 만날 수가 없는 경계선입니다.

즉, 우주 만물의 창조방식은 하나님과 피조물이 무한히 구별되는 창조방식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무엇을 가지고 세상을 창조하셨습니까? 바로 명령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빛이 있으라", "땅은 씨맺는 채소를 내고 공중에는 새들이 있으라"..다 명령의 방식입니다.

명령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피조물이 창조주를 모르는 방식임을 의미합니다.

"명령으로 창조되었다" 이 말을 다른 말로 푼다면, "너가 볼 수 있는 손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어떤 사물을 만들기 위해서 반드시 손을 사용합니다. 기계로 물건을 만든다 할지라도 그 기계를 작동하는 것은 사람의 손입니다.

 

그런데 손이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우주만물이 창조되었다? 즉, 이것은 피조물을 아무리 둘러봐도 그 안에 창조주가 절대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말이 내포하는 뜻이 과연 무엇일까요?

결국 피조물은 결코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설령 피조물이 하나님처럼 되더라도 이 하나님이 없이는 절대로 하나님처럼 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셔야 하는 것이 가장 큰 경계입니다.

온 우주만물은 말씀(특히 명령으로 말씀하심)이라는 어마어마한 경계선을 사이에 두고 삼위일체 하나님과 절대적으로 구분됩니다. 하나님은 이 말씀이란 경계선을 뚫고 얼마든지 피조물에게로 가실 수 있지만 피조물은 말씀이라는 경계선을 뚫고 결코 하나님께로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피조물이 하나님과 같이 되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먹고 하나님과 같이 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나란 존재는 하나님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

이건 바로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는 의미요, 이 의미는 사탄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습니다.

"하나님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

피조물이 저지른 가장 큰 악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없이 하나님처럼 될 수 있는 인간"

이것이 아담과 하와의 가장 큰 문제점이었습니다.

결국, 이런 죄의 문제는 오직 하나님만이 인간이 될 수 있을 때, 해결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필연성이 나타나며, 여기서 구원의 문제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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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규 교수의 구원론 강의 2 (안양대학교 신학대학원 M.Div. 3학년 조직신학)

 

 

김영규 교수 강의 / 강윤석 강도사 요약

 

2005년 3월 15일

 

성경본문 : 로마서 3장 23-24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

 

이 말씀의 내용은 먼 포괄성을 가진 내용입니다.

구체성을 가진 역사현장에서의 내용입니다.

이 말씀은 성경적인 구원의 방식이 죄의 문제와 관련하여 증명된 것입니다.

 

가까운 원인의 내용이 "누가 죄인이냐?"란 형식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초대 교부 이레네우스 이래로 "죄가 무엇인가?"라는 문제가 계속 제기되었습니다.

거기에 대한 해답은"죄란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입니다. 그렇다면, 이 내용이 과연 지금까지 잘 보존되어 왔을까요?

 

구원의 문제를 다루기에 앞서서 우린 다음을 생각해 볼까 합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문제점이 뭔지 아십니까?

그건 바로 삶의 정황이 앞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저들의 성경비판원리입니다.

실존주의 철학에서 본다면, 언어가 생기기 전의 상황이 중요한 것입니다.

자..한번 이것도 생각해 볼까요?

우리는 과연 관찰자로 존재할 수 있을까?라는 거죠.

즉, 객관적인 관찰을 할 수 있을까요?

인간은 현재 나타난 것을 관찰하려고 하지만 그것은 이미 과거의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보는 순간, 이미 빛이 반사되어 돌아오는 것이기 때문에 과거인 것입니다.

내가 어떤 존재를 "딱"하고 쳐다보았을 때, 이미 그것은 현재가 아닌 과거의 것입니다.

우리가 별을 본다는 것은 125억년 전의 것을 보는 것입니다. 즉, 현재의 것은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결코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구요?

정답은 매우 간단합니다. 정보가 우리에게 도달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린 어느 한 곳을 봐야 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지향점이고, 이것 자체가 선택입니다.

어느 한 곳을 봐야만 하는 존재..그만큼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인 것입니다.

사진의 "줌"기능은 지향적입니다. 즉,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인간은 결코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지향성 자체의 오류입니다.

그 지향성이 판명성을 향하여 가는 지향성..

우리는 무엇을 설명할 때, 결코 판명성의 오류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결국 인간의 모든 활동은 이 두 개념, 지향성의 오류와 판명성의 오류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우리 눈에 판명하게 보이는 쪽으로 지향성을 갖게 됩니다. 그 때, 그 모든 것은 온통 오류와 무질서로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지향성에 의해서만 인식하는 인간"

이는 인간의 의지까지 새까맣게 타락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창세기 3장에 나오는 "눈이 밝아졌다"는 것은 바로 이런 차원에서 설명이 필요한 것입니다.

지향점이 있다는 것은 인간이 어디로 향하고자 하는 방향이 있다늘 뜻이고, 그것 자체가 인간의 한계를 드러냅니다. 우리는 지금 이 쪽을 보는 순간, 다른 쪽을 전혀 볼 수 없는 존재입니다.

결국 지향점이 분할의 원흉인 것입니다.

 

이 세상의 과학의 역사는 모든 것을 "it"화 시키는 작업인데, 그렇게 됨으로써 인류의 진보가 이루어진다고 봅니다. 그런데 이것 자체가 오류인 것입니다. 인간 인식의 한계성이 판명성 속임의 근원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치명적인 한계를 안고 있는 불완전한 인간이 성경말씀을 쪼개려고 한다는 것이 타락의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저번 주에 우리는 인간이 말씀으로 창조된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피조물의 근원적 차이점입니다. 말씀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인간이 아무리 하나님처럼 되려고 할지라도 결코 될 수 없다는 명백한 증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보여 주셔서 그 사실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제시된 것이

모든 복의 근원입니다. 이 복의 내용은 바로 이것이죠.

"인간은 하나님없이 결코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은 하나님없이 하나님처럼 될 수 없다."

이 명령, 즉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은 사실상 아담과 하와가 외부의 영향을 받아서 인류의 역사를 풀어갈 때 가장 큰 조건입니다.

 

인간이 말씀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은총으로 보존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착각하는 것이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한 것은 인간이 하나님 나라에 가게 되면 하나님을 더욱 필요로 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거짓의 가장 본질적인 내용은 무엇인가요?

사탄도 하나님이 아닌데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진 것입니다. 결국, 이런 거짓이 언제든지 우리의 본성에 들어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선은 무엇일까요?

선은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악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모든 원리이시고, 그분으로부터만 모든 것이 흘러 나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역사란 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역사입니다. 피조물로부터 나오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신다는 것 자체가 바로 그 분이 속성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 속성 안에는 긍휼과 공의가 반드시 포함됩니다.

공의가 실현되는 것은 "무로의 돌아감"입니다.

이 "무로의 돌아감"이 하나님의 가장 무시무시한 형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긍휼이 있기 때문에

존재는 없어지지 않고 공의가 실현되는 방식으로 역사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형벌입니다.

인간 세상에 존재하는 죽음과 재난, 각종 질병 등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그러나 "영혼은 결코 없어지지 않습니다. 내가(하나님) 쥐고 있겠다"

지옥이란 하나님의 공의가 가장 크게 실현되면서 여전히 하나님의 은총이 남아있는 곳입니다.

 

구원이란 무엇인가?

몸과 영혼의 실체가 다른 것 같이 피조물의 세계와 하나님의 세계는 결코 다르며 결국 하나님과 인간은 그 실체가 전혀 다릅니다.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피조물을 점점 하나님의 형상(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으로의 방향도 포함)으로 하나님께서 이끌어 가시는 것이 바로 "구원의 서정"입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가장 크게 실현되는 장소에서 하나님의 긍휼이 가장 크게 실현되는 장소로 이동시켜 주시고자 삼위일체 하나님이 의논하신 차원에서부터 개혁신학의 구원론은 시작됩니다.

 

따라서 구원은 구원론에서 풀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신론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구원뿐만 아니라 만물이 존재하게 된 최고의 원인은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하나님의 지식이 그 분의 정하심보다 먼저 있으며 하나님의 지식과 예지는 구분되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속성과 하나님의 의지는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결론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음으로 우리는 스스로 우리 가치를 흙보다 낮게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죄의 원인이든, 불안의 원인이든, 죽음의 원인은 가장 직접적으로 바로 "나 자신"입니다.

우리 전체가 죄인입니다.

죄라는 것은 "자아로 돌아가는 것"

이고 자아의 독립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합니다.

 

그럼에도 그러한 죄인인 우리에게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주시는 자"로 존재하고 계시며, 최종적으로는 하나님이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에게 가장 큰 선물로 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론의 내용입니다.

즉, 구원론은 신론에서부터 출발하여 기독론에서 그 절정을 보게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두번 째 강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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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규 교수의 구원론 강의 3 (안양대학교 신학대학원 M.Div. 3학년 조직신학)

 

 

김영규 교수 강의 / 강윤석 강도사 요약

 

2005년 3월 22일

 

성경본문 : 에베소서 2장 1 - 8절

 

오늘 우리가 읽었던 에베소서 2장 말씀을 보니, 구원의 개념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 핵심은 은혜로 구원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은혜의 성격을 말하고 있습니다.

1장에 선행되는 내용이 많이 있고, 현실적으로(신분에 있어서) 변화되는 내용이 있습니다.

 

칼빈의 신학의 핵심은 무엇인가요? "바로 그리스도와 더불어 살고 더불어 죽는다 "

라는 내용이 강하게 표현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내용이 에베소서 2장에 부각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이 칼빈 신학의 발전을 이루어 가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라는 개념은 종교개혁 이후에 비로소 성립됩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이 내용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로마 카톨릭은 설교에 강조를 두지 아니하고, 성례에 강조를 둡니다. 그렇게 함으로 저들은 구원을 성례에다가 맞추고 있습니다. 예배의 중심이 성례인 것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

이 말씀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신교의 뿌리가 되었는데, 이런 내용조차도 안타깝게도 오늘날 많이 변형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가지고 있는 성격은 간단합니다.

"믿음은 우리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다. 믿음은 바로 하나님의 전적인 선물이다."

 

현대 시대는 인간이 크게, 특히 인간의 능력이 크게 발견되어지는 시대입니다.

과학의 진보는 인간의 능력을 크게 진보시키고 있습니다.

인간의 생산능력, 인간의 탐구능력이 인간을 상당히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인간의 생산능력의 핵심은 "내가 어떻게 행하느냐?"입니다.

실존주의를 통한 문화와 문명은 인간의 능력을 매우 크게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구원에 대해서 로마서 5장에서부터 풀지만 내용은 3장에서부터 전개되어집니다.

그런데 로마서 5장의 내용이 오늘 우리가 읽었던 에베소서 2장에 간략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될 수 없습니다.

요즘의 과학은 환원주의로 대표될 수 있을 것입니다.

17세기 후반과 18세기까지만 해도 자연의 신비를 푸는 데 있어서 환원주의(물질의 가장 작은 최소 단위로까지 소급하여 자연의 이치를 설명하려고 하는 주의, 가령 원자가 있다, 자기력이 있다 등등)로 풀지 않았어요. 그러나 지금은 그러한 논리로 거시 세계가 풀려진다는 논리가 매우 강한 시대입니다.

여러분들은 미시 세계와 거시 세계라는 용어가 생소한가요?

신학을 공부하고 교회를 섬기기 위해 이 자리에 온 여러분들에게 과학의 용어가 생소하면 절대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과학이 감히 근접할 수 없는 성격의 차원이므로 오히려 여러분들은 과학을 잘 잘 알아야 합니다. 성경만 봐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목회자는 모든 학문에 있어서 프로가 되어야 합니다.

 

자.. 과학은 진실입니다.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진실이 그 진정한 진실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엔 거짓이 존재하게 됩니다. 과학의 진리는 부족한 진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진실을 추구합니다. 이것이 바로 환원주의입니다.

그런데 이 진실을 추구키 위해서 우리는 보이는 것을 끝까지 추적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더욱 혼돈만 가중시킬 뿐 우리에겐 결코 유익이 없습니다.

 

자, 성경은 선언합니다. 세상을 잘 아는 방식은 바로 믿음의 방식이라 선언합니다.

히브리서 11장 3절입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믿음은 사실 자체에 대한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신앙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먹지 말라"고 했을 때, 인간에게 주어진 가치는 하나님의 창조 즉, 명령으로 창조하신 가치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다" "무"라는 개념을 과학에서는 결코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성경에서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다"는 것은 만든 자가 결코 보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Verbo Dei"에서 "Verbo"는 "명령하여서"라는 뜻입니다.

즉, 성경은 하나님의 창조의 방식을 "명하여서"존재케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도구를 사용하셨다는 말이 전혀 없습니다.

명령으로 세상을 만드셨다는 것은 명령으로 세상을 주관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무에서 유로의 창조의 직접적인 설명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말로 표현할 수 있다 할지라도 그러한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하나님의 그 창조의 엄위하심과 선하심을 어찌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제가 저번 시간에 여러분에게 말한 대로 인간의 의지와 생각까지 전적으로 타락하여 우리는 지향성 자체의 오류와 판명성의 오류에 빠져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창세기의 창조기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즉, 우리는 창세기 1장을 해석할, 풀 수 있는 자리에 결코 서 있을 수가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창세기 1장 1절도 제대로 해석할 수 없는 인간이란 존재가 전 성경을 해석하려고 한다?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것이요, 그러한 미미한 존재에게 하나님께서 성경을 주셨다는 것 자체가 어마어마한 은혜요, 어마어마한 기적이요, 감사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존재인 인간이 감히 하나님의 말씀을 쪼개고, 말씀을 시대적 배경과 역사적인 배경으로 보아야 하고, 어느 말씀은 사실이고, 어느 말씀은 거짓인지 밝혀내려고 발악을 하는 것입니다. 참 교만하기 짝이 없고, 어리석음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미 인간의 그러한 교만이 최초의 인류 조상이었던 아담과 하와에게서 출발하고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 가치를 가져야 할 것은 우리 자신을 높이려는 교만함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입니다. 이러한 의미가 바로 신명기 8장에서 계시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것은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만나를 주신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해 줍니다. 유한한 만나가 부족함으로 인간이 배고파하는 것을 통해 결국 인간이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것은 자신의 연약함을 버리고 하나님 말씀에만 전적으로 소망을 두는 것이 인간의 가치임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근원의 역사는 성경부터 찾아봐야 알 수 있습니다. 고조선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철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가 중요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청동기 시대를 연구하는 사학자나 고고학자들이 말하기를 비파형 동검이 동양에서부터 나왔다고 말하며 그것을 교과서에도 기재하는데, 웃기는 소리지요. 이미 비파형 동검은 그 전 시대에 서양에서 나온 것임이 밝혀진지 오래입니다. 인간의 타락한 사고가 그러한 유하한 지식을 산출해 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동양인이라고 해서 성경이 우리와 배제되는 것이 결코 아님을 보여줍니다.

 

우린 계시를 통해서 인간의 역사를 풀어야 하고, 더 나아가서 우리 대한 민국의 역사를 풀어야 합니다. 계시가 바로 현대 문명에 대한 유일한 해답입니다.

 

결국 "구원"이라는 것은 이렇게 묻고 대답하시는 하나님에게서 그 해답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적 구원의 방식은 감히 과학이 근접할 수 없는 훨씬 더 놀라운 비밀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과학의 한계를 분명히 밝혀 내기 위해서 더욱 성경과 함께 과학을 연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계는 하나님이 보시기 위해서 만드신 세계입니다. 이 말은 우주를 해석하는 데 매우 중요한 키워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주 해석의 신비가 여기에 있지요.

저와 여러분이 믿고 있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시지요?

바로 섭리와 창조를 한꺼번에 어우르시고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본다는 것은 우리의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요, 미시 세계 뿐만 아니라 거시 세계까지를 다 보시는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교재 5쪽 맨 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인간의 눈이 창조되기 전에 하나님이 보시고 좋으신 내용이 있었기 때문에, 보기에 좋다는 것은 자연의 순수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 말은 결국 혼돈이 깊어질수록 질서를 만드신 자가 결코 발견되지 아니한다는 뜻입니다.

온 우주 만물은 하나님이 보기에 좋으시도록 구성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으신 것을 가지고 인간은 왈가왈부하고 심지어 그것을 섬기기까지 합니다.

십계명의 모든 기록이 창조의 기사와 관계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빛을 창조했다"는 창세기의 기록을 통해 하나님께선 모세를 통해 빛과 같은 피조물을 우상으로 섬기지 말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태양을 창조하셨다"는 말씀을 통해 태양을 섬기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빛을 만드신 하나님은 결국 그 피조물인 빛으로 나(하나님)을 표현하지 말라고 경계를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가장 큰 가치가 있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지 그것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한게 결코 아닙니다.

다시 강조합니다. 원래 자연은 하나님께서 보시기 위해서 창조하신 것입니다. 단지 인간에게늘 이 모든 것이 은혜로 주어진 것일 뿐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뱀의 유혹과 시험은 그런 높은 원래의 가치를 그 내용에 있어서 다른 퇴락한 것으로 바꾸도록 하는 유혹과 시험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6쪽 중간 부분입니다."원래 자연은 선악으로 구별하는 원리가 없는 순수한 것이다. 그러나 뱀의 유혹과 시험은 그 자연을 선악으로 구별하게 하는 나무를 먹기 전에, 외부를 향한 우리의 지향성이 그 기본적인 가치와 하나님의 의도하신 가치 사이를 혼돈시키는 외부의 유혹이 있었음을 상징하는 실제적 역사이다. 그 실제적인 역사가 하나님이 보시는 시각에서 기록되었다면, 그 뱀의 유혹과 시험을 창세기 3장 15절과 연결하여 이해해야 할 것이고, 성경전체의 계시 내용과 연결하여 해석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을 유지하지 못하게 만드는 사탄의 유혹을 우린 신약에서도 발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탄의 시험을 꼭 연상해야 합니다.

 

구원이란 결국, 그러한 사탄의 유혹에 의해서 넘어진 인간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게끔 인도해 주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구원의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비유로 표현된 것도 많이 있습니다. 그 구원의 내용의 핵심은 구원은 내가 아닌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지나가는 모든 사건들은 시간이 지나며ㆍ 지날수록 하나님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구원론 세 번째 강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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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규 교수의 구원론 강의 4 (안양대학교 신학대학원 M.Div. 3학년 조직신학)

 

 

김영규 교수 강의 / 강윤석 강도사 요약

 

2005년 3월 29일

 

찬송가 : 484장(내 맘의 주여 소망되소서)

성경본문 : 로마서 5장 18절-21절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거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거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오늘 우리가 읽었던 성경말씀은 로마서 3장의 내용과도 관련된 것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에게 묶여진 온 인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수단이 되어서 온 인류가 묶여져 있는 내용은 로마서 8장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을 한다면 삼위일체 하나님의 예정과 작정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삼위 하나님의 예정과 작정은 이 세상 역사의 현장에서 이루어질 때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짐을 잘 나타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든 인류가 죄 안에 묶여져 있었는데, 그러한 문제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해결이 되었을까요?

신론의 통일성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용까지 이어집니다.

 

구원의 모든 내용은 구약이나 신약이 모두 같습니다.

주후 1세기 말부터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이 다르다는 영지주의와 관련된 이단이 있었습니다. 기존 정통교회는 이러한 이단을 어떻게 막아 왔을까요? 주후 150년 경부터 교회는 이단을 방어할 의무가 생기게 되었죠.

 

유명한 교회사가 요세푸스는 교리의 통일성에 대한 생각이 있었습니다. 교리의 통일성이란 쉽게 말해서 "구약이나 신약이나 동일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이 교리의 통일성에 대한 작업은 초대교부였던 이레니우스와 터툴리안이 집중적으로 하게 됩니다.

 

자..이들이 발견한 교리의 통일성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그 핵심은 바로 이것입니다.

"시대와 관계없이 성경의 주체는 언제나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고 따라서 그 내용은 같다"라는 것입니다.

이런 교리를 푸는데 인간론과 구원론까지도 나아가게 됩니다.

 

주후 2세기에 초대 교부 이레니우스는 죄가 무엇인가? 라는 질문과 관련하여 하나님과의 분리가 죄다라는 깊은 내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내용은 후대에 발전적으로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미 성경말씀에 있는 내용들을 교부들이 찾아낸 것뿐입니다.

 

자..이 그림을 한번 보세요(교수님이 화이트보드에 그림을 그렸습니다. 분수 모양입니다. 밑(분모)에는 인간(하나님의 형상), 위(분자)에는 하나님이라 쓰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형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과 겹쳐집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은 성령의 열매로 나아갑니다.

인간론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배울 때, 성령의 열매와 관련된 내용까지 가기 때문에 이는 곧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자..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근거를 한번 볼까요?

골로새서 3장 9절부터 보면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골로새서 3장 2절은 12절 말씀은 로마서 8장과 연결되어 지는데 새 옷을 입는다는 구절이 바로 이 12절입니다.

 

그렇다면, 에베소서에서는 이 내용을 어떻게 표현했을까요? 엡 4장 22절부터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심령이 새롭게 되어 ........ 새 사람을 입으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이란 하나님의 형상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태초에 창조된 인간의 모습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우리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입니다.

 

에베소서 5장 8절을 보겠습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

그리고 9절을 보니, 빛의 열매가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헬라어 성경에서는 "모든"이라는 말이 맨 뒤에 표현되어 있습니다. 즉,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과 기타 모든 것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곧 하나님의 품성과 같은 속성임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결론이고 이것이 바로 실제 내용입니다.

 

결국 이 세상의 역사가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과 동일하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과 그 분의 말씀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창조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과 피조물의 결코 좁힐 수 없는 근원적인 단절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 인간은 피조물일 뿐입니다.

 

이 세상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그리고 우리가 숨을 쉴 수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명령(은혜)에 의해서 주어져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진리의 내용은 인류의 역사와 온 세계가 동원되어서 이루어야 할 내용입니다.

 

10의 -46승의 미시세계를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잡고 계시지 아니하신다면 우리가 보는 거시세계는 전혀, 결단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거시세계를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모두 하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인간의 여지는 전혀, 결단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린 아무 것도 한게 없습니다.

제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전 단지 피조물일 뿐입니다."라고 고백했으면 좋겠습니다.

 

성경 66권의 절대 핵심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건 바로 "하나님은 영원토록 주시는 자로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은혜의 내용아닙니까?

"예수 믿으면 복받는다"이런게 은혜가 아니라 창세부터 지금~마지막까지 삼위일체 하나님은 오직 우리에게 주시는 자로서 존재하신다는 게 가장 큰 은혜의 내용인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보았을 때, 복음주의 신학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이 하시는 역사에 인간이 참여한다?"라는 말을 우리가 사용할 수 있겠나요?

이 표현은 도저히 말이 되지 않는 표현입니다.

 

우리가 감각을 느끼든, 소리를 듣든지 모두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 조차도 모두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결국, 그런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것이 인간의 유일한 소망이라는 것이 바로 구원론의 핵심입니다. 이걸 무시하고 인간이 주는 자로 착각하는 순간, 이미 그것은 타락입니다.

 

이 세계가 사라지고 우리 모두 사라진다 할지라도 삼위일체 하나님이 존재하시고 그 분이 주시는 이상, 이 세상의 역사는 무의미할 뿐입니다.

즉, 피조물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면 할수록 피조물만 손해인 것입니다.

 

"너는 피조물의 조건에 만족해라. 그것만이 진정 사는 길이다."

하나님께서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통해서 이 사실을 아담과 하와에게 상징적으로 표현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 내용을 지키는데 결국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인간은 피조물의 지위를 잃어버리고 하나님처럼 생각해 버리고 그런 행위로 넘어가게 된 것입니다.

 

자!! 제가 저번 시간에 "하나님의 공의"가 무엇인지 설명했습니다. 그게 뭐라고 했지요.

하나님의 공의란 존재는 소멸하지 않게 하시며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즉, 하나님의 공의와 은혜의 균형잡힌 속성이 중심이 되어서 이 세상의 역사는 진행되어 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공의 즉 존재는 없어지게 하지 않으시고 공의가 실현되는 방식으로서의 형벌의 개념을 우리가 이해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공의"의 핵심은 바로 이것입니다.

"너가 나(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는 그 자체가 바로 무이다. 그렇기 때문에 넌 "무"로 돌아가야 한다."

바로 이것입니다.

제가 저번에 말씀드렸습니다. 지옥이란 곳은 하나님의 공의가 가장 크게 드러나면서 존재는 없어지지 않는 곳이라구요.

영혼과 육체의 분리라는 것은 전혀 레벨이 다른 세계를 의미합니다. 지옥은 공의가 실현되면서 은혜가 지속되는 장소인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코에 있다고 이사야서는 선언하고 있습니다. 즉, 우린 공중에 떠 있는 존재입니다. 붙잡을 게 하나도 없는 존재가 바로 저와 여러분입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우리를 지탱해 주는 것들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야고보서에 나온대로 인간은 잠시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일 뿐입니다. 하나님과 그 분의 세계가 없다면 우리는 단 한 순간도 존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크고 좋은 은혜는 그 분이 우리에게 주시는 자로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받아야 할 가장 큰 형벌은 지옥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무"로 돌아감

즉, 없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영혼을 끝까지 그 분이 쥐고 계신다는 것이 은혜인 것입니다.

 

"니 멋대로 살아보라"

설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고 해도 이것이 과연 가능할까요? 절대 불가능합니다. 여전히 하나님은 주시는 자로서 존재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차원에서 유기자가 존재한다는 것은 굉장히 깊은 내용인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인간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성격을 갖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는 행위가 하나님께도 있겠습니까?

 

 

자기가 주는 자로 있으면서 받는 것이 없을 때는 인간의 결점이 되고 있는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마음이 하나님께는 없습니다. 항상 주시는 자로 존재하시는 이상 그런 마음이 없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결단코 죄의 원인을 하나님께 돌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시면 그 인간에게는 죄의 원인이 없습니다. 즉, 하나님이 인간이 되실 때에만 죄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든 죄를, 인간의 모든 문제를 뒤집어 쓰신다 할지라도 그 분에게는 결코 죄가 없으십니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인간의 중보자가 되시는 개념이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공의의 모든 진노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부 쏟아져 부어졌을 때에 모든 것을 다 감당하실 수가 있으신 것입니다. 여기까지 보게 될 때에, 우린 비로소 구원론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배운 내용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은혜가 되게 하시고 생명의 기회를 얻게 하는 원인자가 될 수 있도록 우리가 사명을 잘 감당케 해 주시는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시는 여러분들 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 내용이 우리 시대에도 계속 지속되게 하시는 분은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 한 분 뿐이십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우리 곁에 그 말씀의 주인이신 주님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며 유일하신 해결자이심을 고백하시기를 원합니다. 가장 어려울 때에 우리 주님이 나를 위해서 준비된 유일한 길임에 감사하며 교회를 섬기시는 믿음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 이상 구원론 네 번째 강의 요약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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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규 교수의 구원론 강의 5 (안양대학교 신학대학원 M.Div. 3학년 조직신학)

 

 

김영규 교수 강의 / 강윤석 강도사 요약

 

2005년 4월 5일

 

찬송가 : 68장(오 하나님 우리의 창조주시니)

성경본문 : 이사야 53 : 10 - 12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자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여러분.. 우리는 신구약의 통일성과 관련하여 위의 본문을 들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서에서 기록된 시대적 양상, 기록과정에서 인간이 독자로 있어서 독자에게 요구된 흩어지고 나열된 형식이 복음서에서 기록되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로마, 헬라 시대의 기록이라 했을 때는 역사를 어떻게 풀어 나가는가? 라는 관점에서 기록한 것입니다.

기록문서라고 했을 때는, 법정문서에도 있고 일반문서도 있는데 대화체로 구성된 문서는 거의 없다는 것이 그 특징입니다. 어떤 일이 일어난 것에 대해서 세세하게 기록하는 것은 공공문서에서는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서는 시대의 현장에 서 있는 것처럼 매우 생생하게 기록하는 방식으로 쓰여졌음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시대가 요구하지 않는 매우 특별한 방식이라 하겠습니다.

자..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을 통해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이 땅에 오셨나요? 이 이유에 대해서는 그 당시(예수께서 이 땅에 계실 당시) 목격자들의 기록보다 이사야 53장의 예언이 훨씬 더 정확하게 묘사되어져 있습니다. 성취, 적용, 은택의 나눔, 그가 왜 죽으셨는지, 탕감과 구속의 개념이 복음서보다 오히려 예언서에 잘 표현되어져 있슴을 보게 됩니다.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해서 우리가 읽은 이사야서의 표현방식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다 보는 것처럼, 사진을 찍는 것처럼 잘 표현되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 전체를 보는데 있어서 역사전체를 꿰뚫어 보는 관점을 가지고 읽는 것이 효과적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가 읽었던 이사야 53장의 내용은 매우 큰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먹지 말라"는 계명은 율법의 원형을 보여 줍니다.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실체는 는 곧 실체의 통일성을 의미하며, 이것은 교회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계시를 주신 삼위일체 하나님, 창조주이신 하나님, 즉 한 하나님의 통일성 및 그리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통일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실체적 속성에 있어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공통적이고 같습니다.

여기서 공통적이라 할 때는, 먼저 동일실체를 의미합니다.(호모우시아)

그리고, 동등성인데 이 동등성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속성의 동등성(즉, 성부 성자 성령은 영광과 능력과 권세가 동등하시다라는 개념)을 의미하며 이 속성의 동등성은 실체적 속성입니다. 따라서, 삼위 즉 성부, 성자, 성령의 모든 사역에 있어서도 우열이 없는 동등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게 중요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공통성은 바로 전 위격으로 교류(교통)한다는 것입니다.

 

실체의 통일성은 "한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성부"라는 위격 자체는 "성자"없이는 무의미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위 간에는 분명한 질서가 근원적으로 있는 것입니다. 오직 성부만이 성자를 낳습니다.

삼위일체 간에는 공통성을 가지면서 반드시 구별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란 표현을 쓸 수는 있지만 "세 하나님"이란 표현은 절대 쓰지 말아야 합니다.

 

자.. 삼위일체 하나님을 아는데 있어서.......

- 원리에 있어서 구별이 있습니다.(principium)

- 근원에 있어서 구별이 있습니다.(origo)

- 질서에 있어서 구별이 있습니다.(ordo)

-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서 구별이 있습니다.(causa)

- 사역에 있어서 구별이 있습니다.(opera)

 

"성부가 성자를 낳으신다" 이것만 말해서도 안 되고, 성자가 스스로 영원 전부터 낳아지신다고 말해야 합니다.

"성부와 성자를 통해서 성령이 나오신다"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성령이 영원 전부터 스스로 나오심까지 말해야 합니다.

 

계시의 차원에서는 마치 삼위일체 하나님이 분리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가령,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성부는 하늘에 계시고, 성령은 비둘기같이 임하시고, 성자는 인간의 몸을 입은 예수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체의 차원에서는 결단코 분리되지 않으십니다.

이 차원(계시의 차원)에서 성부, 성자, 성령을 구별하기 어렵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창세기 18장에 나오는 소돔과 고모라에 나타난 세 천사를 들 수 있습니다.

교부 어거스틴은 성부, 성자, 성령의 위격의 구별 없이 어느 한 위격이 현현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반드시 성자만이 이 땅에 현현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일하심을 말할 때에도 각 위격에게 사역의 주체를 돌립니다. 예를 들어, 창조의 주체는 성부 하나님, 구속의 주체는 성자 하나님, 구속의 적용의 주체는 성령 하나님이라고 말한다는 것이죠. 그러나 우리는 사역의 주체를 말할 때에도 다음과 같은 이해가 중요합니다.

"성부는 성자 안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세상을 창조하신다."

구속에 있어서는 "성자가 성부로부터 성령에 의해서 구속하셨다."

구원의 적용에 있어서는 "성령이 성부와 성자로부터 구원의 적용을 베푸신다."

라는 개념을 늘 숙지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삼위일체 하나님의 모든 사역은 반드시 주체로 표현되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창조나, 구속이나 구원의 적용에 있어서도 삼위일체가 모두 주체가 된다는 것이죠. 우리 인간의 한계로 말미암아 구분을 하는 것 뿐입니다.

 

우린 전체 성경을 삼위일체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하나님이 악을 창조했다"도 이단이 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악을 창조하시지 않으셨다"라고 말하는 것도 역시 이단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역사의 사건에 있어서 근원적 원인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원인이십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죄가 제외가 되나요? 결코 아니라는 것이죠.

"악이 무엇인가?" 여기에 대한 대답은 바로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역사는 인간이 하나님이 되려고 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어져 가고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을 반드시 주체로서의 사역이라 말해야 하고, 성경 말씀의 원재 저자가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했을 때, 구원론도 이렇게 이해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적 구원론입니다.

 

자... 10분 정도 쉬었다가 계속 진도를 나가도록 하겠습니다.(10분 쉼)

 

다음 말씀으로 들어갑니다. 신명기 4장 1절에서 6절까지 말씀입니다.

여기서는 인간이 반드시 하나님을 섬겨야 할 것과 동시에 인간의 무능력함과 부패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자기자신의 가치를 창조한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셨다"라는 의미는 지극히 큰 상급의 형태를 나타냅니다.

이는, 이 세상의 역사가 종결되었을 때는 새 하늘과 새 땅의 형태로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가치의 내용을 신명기 4장에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가나안 땅이란 형태로 아주 쬐끔 맛보게 하신 것입니다.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에게서만 우리의 진정한 가치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가나안 땅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가나안 땅을 통해 알려 주고자 하신 의도는 과연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의 뜻을 먹고 사는 삶"이 성도의 진정한 삶의 방식임을 알려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었던 본문 말씀에 이러한 표현이 있습니다.

"열국 앞에 지혜요, 지식이라.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라."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바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초대된 매우 특별한 가치의 내용입니다.

 

자..신명기 8장의 내용은 무엇인가요?

기독교와 타종교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민족이 받은 가치의 내용, 즉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사는 성도의 삶"이란 것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과연 무엇입니까?

마태복음에 나오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산상보훈의 내용도 우리에게 동일한 가치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성취하신 것이기에 그 가치가 어마어마하게 큽니다. 이 율법에는 구원의 서정도 포함됩니다.

 

창세기 18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있어서 진정한 복이 무엇인가를 설명해 주고 계십니다. 그 복은 바로 "여호와의 계명을 지키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 복은 결국 모든 인류를 위한 것입니다.

 

창세기 50장 15-17절에서 요셉은 "가진 자"로 나타납니다. 무엇을 가졌나요?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가진 자"입니다. 그의 형제들에게 줄 수 있는 내용으로 가진 것은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요셉이 그의 형들을 보고서 단순히 형제애가 있었기 때문에 울었다라고만 생각하면 안됩니다. 요셉은 용서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자로 서 있었던 것입니다. 형제를 용서하는 것도 내 힘으로 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요셉이 형제들에게 주는 진정한 위로는 구원의 길로서의 준비인데, 이는 결국 요셉기사에 나타난 그 모든 수단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이 어떠하신가를 보여주며 더 나아가 아담의 문제도 결국 이렇게 종결됨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6절-39절을 보겠습니다.

자 29절입니다."작정된 자들이 때가 되서 부름을 받아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29-30절입니다. 이 내용은 구원의 서정입니다.

32, 38, 39절은 모든 것이 바로 선을 이루는 방식을 보여줍니다. 이 모든 내용들은 결국 우리가 방금 읽었던 창세기 50장의 내용과 같습니다.

 

내게 맡겨진 수단, 즉 시간, 장소, 직장, 가정, 인간관계, 심지어는 죽음의 순간까지도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광을 하나님 자신이 스스로 성취하시는 수단으로 존재하게 하신 것입니다.

 

"신구약의 통일성"이란 개념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한 그 사랑이 얼마나 크고 뜨거우신지를 신구약 성경전체가 동일함을 보여주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구원의 서정 역시 신구약 전체 성경에서 동일함을 깨닫게 됩니다.

 

(이상 다섯 번째 강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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