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서정에 있어서 개혁주의의 특징
출처가 다양하므로 글쓴이 미상
서 론.
조직신학에서 구원론은 구원의 복을 죄인에게 전달하는 것과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과의 긴밀한 교제의 생활이 회복되는 것을 다룬다. 구원론은 인류의 생명과 힘과 행복의 근원으로서의 하나님 및 인간이 현재와 미래에 있어서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의존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구원론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주도하신 이 구원사역이 그의 백성들에게 어떻게 적용되는 가를 다루는 분야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구원사역을 전개함에 있어서, 우리가 먼저 고려해 보아야 할 것은 구원의 복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적용되는 그 순서에 관한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통상 ‘구원의 서정’(Ordo Salutis)라고 부르며, 종교 개혁의 산물로서 개혁신학의 유산인 것이다.
물론 성경이 구속 사역의 적용에 따르는 정확한 순서를 상세히 기술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구원의 순서에 관한 상이한 의견이 존재할 수도 있다. 실제로 교회들은 구원의 순서에 대해 일치된 의견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구원의 순서를 다루어야 하는 것은 구원론에서 전제되어야 하는 하나님의 행위가 우선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의 출발점을 인간의 협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 하나님의 구속적 행위에 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또한 구원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그 분의 구속적 행위에 있어서 그것은 가장 두드러지는 사건이라는데 두는 것이다. 그런데 펠라기안들의 등장 이래로 구원 사역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주권을 약화시키며, 그 결과 하나님께서 중심에 위치하는 구원의 서정을 무시하고 그 논의조차 거부하려는 시도가 있어 왔다.
그 시도들은 대부분 비개혁파 신학에서 알미니안적인 경향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그런 이유로 개혁파 신학의 노선에 있는 우리에게는 구원의 서정에 관한 논의는 긍정적으로 인정되어야 한다. 따라서 구원의 서정을 다루는 작업에 있어서 특별히 중요한 부분은 개혁주의의 틀을 형성하고 있는 칼빈주의적 개념을 밝히는 것이다. 그러나 칼빈주의적 구원의 순서를 살펴보려면 역사 속에서 항상 대립되면서 등장되었던 비개혁파 신학의 개념들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므로 본 논고를 통해 비개혁파 신학의 알미니안주의적 개념들과 함께 비교해 보면서 칼빈주의적 구원의 순서를 보다 바르게 제시하고 그 중요성을 알아보고자 한다.
본 론.
I. 정의(正意)와 그 의의(意義)
1. 정의(正意)
구원의 서정이라는 말은 독일어로 Heilsaneignung(구원의 획득), 화란어로 Heilswerg(구원의 수단), 또는 Orde des Heils(구원의 순서), 영어로는 Way of Salvation(구원의 길)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
그 정의를 김길성은 “구원의 서정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객관적인 속죄함이 택함 받은 개인에게 어떻게 성령의 역사로 주관적으로 적용되는 가? 하는 과정을 살피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또한 루이스 벌코프는 “구원의 서정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행해진 구원의 사역이 죄인들의 심령과 삶에 주관적으로 실현되는 과정을 서술하는 용어”로 본다. 따라서 그 목적은 “구속 사역의 적용에 있어서 성령의 다양한 활동들을 논리적인 순서로 또한 이들 상호 연관 하에 서술하는 것”으로 본다. 즉 다시 말하자면 “성령께서 구원의 역사를 사람의 마음과 생활에 행하시는 바 그 순서에 대한 것” 이라고 할 수 있다.
2. 의의(意義)
벌코프는 구원의 서정에서의 강조점을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획득하는 데 있어서 무엇을 행하는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를 적용하는 데 있어서 무엇을 행하시는가에 둔다. 이것이 바로 개혁파 신학의 중요한 관점이며 구원의 서정에 있어서의 의의다.
따라서 이 구원의 서정을 어떻게 설정하는가에 따라서 구원론에 대한 전체적인 신학의 틀이 바뀌어지기도 한다. 즉 그 출발점을 어디에서 잡는가에 따라서 대표적으로 크게 두 방향으로 나뉘어 질 수 있는데, 우선은 하나님께로부터 출발점을 잡으면 구원의 전체적인 주도자가 하나님께로 향하게 되지만 그것을 인간 쪽에다 두게 되면 인간 중심적인 구원론으로 주도자가 인간 쪽으로 향하게 되는 엄청난 차이를 나타나게 된다. 이 차이점은 더 나아가서는 사람들이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아니면 구원이 단지 자신의 신념에 머무를 수도 있는가 ? 하는 매우 중요한 문제점을 제기하게 된다. 그러므로 개혁파 신학이 가지고 있는 특성을 강조하므로 구원의 서정을 성경적으로 바르게 가르치고 제시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II. 비(非)개혁파 신학에서의 논의
1. 비(非)개혁파 신학의 다양한 입장
1) 로마 카톨릭의 견해
로마 카톨릭의 신학에서는 교회론이 구원의 서정에 대한 논의보다 선행된다. 어린 아이들은 영세에 의해 중생되지만, 성년이 되어서 비로소 복음에 접한 사람들은 마음을 조명하고 의지를 강화시키는 ‘충족 은혜’(gratia sufficiens)를 받게 된다. 인간은 충족 은혜에 저항할 수 있고 혹은 이에 동의할 수 있다. 만약 그가 이 은혜에 동의하면 이 은혜는 ‘협력 은혜’(gratia co-operans)로 변환되며, 이로서 인간은 칭의를 예비하는 데 협력하게 된다. 따라서 로마 카톨릭의 분류는 충족 은혜, 주입 은혜(gratia infusa), 협력 은혜로 이해되어 진다.
2) 루터파의 견해
루터파는 선택, 신비적 연합,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의 교리들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이 세 가지 항목 중 어느 것으로부터도 자신들의 논의를 출발시키지 않는다. 그들은 죄인의 심령과 삶에서의 구속 사역의 주관적인 실현이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 편에서 행해지는 것보다는 인간 편에서 행해지는 것들을 더욱 강조하는 구원의 서정을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Hollatz와 Philippi의 분류에 의하면 그 순서는 소명 → 조명 → 회심 → 중생 → 신앙 → 칭의 → 신비적 연합 → 갱신 → 보전으로 나누어진다.
3) 알미니안파의 견해
알미니안주의 자들의 구원의 서정은 외면적으로는 구원의 사역을 하나님께 귀속시키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하나님의 구속 사역이 인간의 태도와 행위에 부수적이다. 그들은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 놓았지만 그 기회의 이용 여부는 인간에게 달려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인간이 선택하기만 한다면 완전한 영적 복과 구원을 획득할 수 있게 하는 충족한 은혜를 베푸신다고 본다. 이러한 관점적 차이를 가지며, 그들은 그 순서를 소명 → 회개 → 신앙 → 의로 전가 → 중생 → 성화 → 견인으로 보고 있다.
4) 웨슬리안의 견해
웨슬리적 혹은 복음주의적 알미니안들은 17세기의 아르미니우스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그들의 입장은 원래의 알미니안보다는 칼빈주의와 유사하지만, 알미니안파 보다는 더 비논리적이다. 웨슬리의 구원관의 특징은 점진적인 성화와 발전에 있다. 그러나 구원의 과정에서 점진적인 성장에 대한 개념은 순간적인 요소와 결합된다. 즉 웨슬리의 강조점은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순간적인 변화에 있는 것이다. 그는 구원의 서정을 그의 설교, “성경적 구원의 방법”에서 선행 은혜의 역사 → 칭의 전의 회개 → 칭의와 죄의 용서 → 신생 혹 중생 → 칭의 후의 회개와 점진적 성화 → 완전 성화로 보았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룸에 대하여”라는 설교에서는 선행 은총 → 회개(깨닫는 은총) → 칭의 → 성결의 순서로 설명하였다.
2. 비(非)개혁파 신학의 특징
구원의 서정에 있어서 비개혁파 신학은 알미니안의 견해에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특별히 이들 알미니안주의 자들은 칼빈주의적 순서와 근본적인 차이를 나타내고 있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회심의 기원이 누구에게 있는 가에 대한 사실로 간명하게 드러났으며, 구원의 서정에 있어서 하나님을 전제하는 대신 인간을 위치시키는 데서 나타나게 되었다. 결국 이러한 사실은 구원을 인간론 중심적으로 치우치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한을 약화시키며 파괴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부분에 대해 김길성은 다음과 같이 비평하고 있다. “알미니안주의 자들은 특히, 可항력적 은혜를 강조하고, 그리스도의 객관적인 구속이 인간의 신앙에 의해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친다. 인간이 자력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능력과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함으로써 구원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의한 하나님의 선물인 사실을 부정한다.”
그리고 구원론에 있어서는 칼빈주의 자들의 교리인 예정론과 매우 심하게 부딪치게 되었는데 왜냐하면 이 예정론이 구원론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칼빈이 그의 강요에서 예정론의 위치를 구원론에 둔 것도 예정론이 성도의 구원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알미니안주의 자들은 이 부분을 전적으로 거부하고 자기들 나름대로의 방법을 제시하기도 했다. 대체된 내용에서 알미니우스는 칼빈주의의 구원의 기초가 되는 예정론에 반대하여 나름대로 다음과 같은 원리들을 제시하였다.
① 죄인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작정(계획)은 그 작정에 의하여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그 자신의 죽음으로 죄를 파괴하시며, 친히 복종하심으로 상실된 구원을 회복시키시고, 그 자신의 공로로 구원을 전달하여 주시는 중재자와 구속자와 구세주와 제사장과 왕으로 삼으시기로 결정하신 것이었다.
② 하나님의 정확하고도 절대적인 작정은 그 작정 안에서 하나님께서 회개하고 믿는 자들에게 은총을 베푸시며,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끝까지 인내한 그러한 회개한 자들과 믿는 자들의 구원을 성취시키시되, 그러나 회개치 아니하며 믿지 아니하는 모든 사람들은 죄와 진노 아래 방치하며, 그리스도에게서 버림받은 자들을 파멸에 떨어뜨리기로 결정하신 것이었다.
③ 하나님의 작정은(그 작정에 의하여) 하나님께서 충족하면서도 유효한 방법으로 회개와 믿음을 위해 필요한 수단들을 집행하시기로 결정하신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집행이 신적지혜에 따라, 그리고 신적공의에 따라 실시되도록 결정하신 것이었다.
④ 하나님의 작정은 하나님께서 어떤 특별한 사람들을 선택하시고 또 저주하시기로 결정하신 것이었다. 이 작정은 하나님의 예지에 그 기초를 두고 있는데, 이 예지에 의하여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그의 보호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믿게되며, 또 그의 계속적인 은총으로 말미암아 인내하게 될 사람들을 아셨다. 이러한 믿음과 인내는 회심과 믿음을 위해 적절하고도 적합한 수단들을 사전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께서 집행하심으로써 비롯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예지에 의하여 하나님은 또한 믿지 아니하고 인내하지 아니할 사람들을 아셨다.
알미니우스는 이와 같이 정의된 견해가 하나님과 사람, 죄와 구원에 대한 기독교의 모든 참된 가르침과 조화를 이룬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이 견해는 하나님의 은혜를 존중하며, 그리스도께서 구원 사역의 중심이 되시도록 하며, 교회의 사역을 손상시키거나 또는 성실한 그리스도인의 노력을 무의미하지 않게 한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함께 생각할 부분은 이러한 부분에서 알미니우스에게 많은 영향을 받은 웨슬레의 형태도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웨슬레은 구원에 있어서 중요한 핵심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 격한 의미에서 구원은 죄의 회개와, 믿음을 통한 칭의와 신생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인류가 타락된 이후에 하나님은 계속 그의 성령을 통하여 인간심령 속에서 역사하시어 구원에로 인도하시는 것이다.” 그는 또한 “이 세상에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전혀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고 ‘구원의 자율적 성취’라는 그의 설교문에서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그리고 다음 단계는 회개인데 이것은 죄인이 어떤 시기에 자신의 추한 모습과 죄과를 깊이 인식함과 동시에 자신은 하나님의 진노와 영원한 저주밖에 받을 것이 없는 존재임을 깨닫는 것이다. 동시에 그러한 죄책감에 의하여 그는 그러한 상태에서 벗어나 그야말로 개과천선하려는 의욕과 결의도 가지며, 또한 악한 일을 버리고 선을 행하기도 한다. 이러한 모든 마음과 행동은 회개의 열매인 것이다. 그 다음 단계는 칭의와 죄의 용서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에 의하여,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칭의는 죄인인 우리가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은총에로 복귀함을 말하는 것인데, 이것은 우리 자신의 선행과 의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서 인간의 믿음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복음을 믿기 전에 참된 회개와 함께 나 자신의 의를 완전히 끊어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믿음에 의한 칭의와 함께 우리는 신생을 경험한다. 칭의는 하나님과의 관계개선으로 객관적 사실이요, 신생은 인간이 ‘죄의 세력’에서 놓임 받아 새로운 마음을 받는 내적 변화로서 주관적 사실이다. 이 두 가지는 시간적으로는 동시적이나 논리적으로는 칭의가 먼저요, 신생이 거기에 따른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완전성화로 나아감을 주장하였다. 우리는 비단 이러한 입장들을 비단 감리교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교회들, 그리고 특별히 오늘날 특정 교파에 소속되지 않은 다수의 교회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III . 칼빈주의적 구원의 서정
1. 개혁주의자들의 다양한 입장
1) John Murray의 견해
J. Murray는 그의 저서 「Redemption:Accomplished and Applied」에서 “구원적용의 다양한 과정이 어떤 순서에 따라 진행되고 있으며 그 순서는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계획과 그의 지혜 그리고 은혜에 의해서 제정되어졌다고 믿을 만한 충분하고도 결정적인 이유들이 성경에 나타나 있다”고 보았다. 그는 롬8:28로부터 소명과 칭의와 영화를 추출하였으며, 성경적 근거를 통해 순서상 믿음과 회개를 칭의 앞에 중생을 믿음 앞에 놓았다. 그리고 논리적 사고를 통해서 칭의 뒤에 양자와 성화, 성도의 견인을 첨가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성경적인 구원의 서정은 소명 → 중생 → 믿음과 회개 → 칭의 → 양자 → 성화 → 견인 → 영화라고 이해하였다.
2) Louis Berkhof의 견해
Berkhof는 개혁 교회의 구원론은 성부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신 사람들과 그리스도와의 구원의 언약(pactum salutis)에서 성립된 신비적 연합을 출발점으로 하여 다음과 같이 순서를 정하였다. 신비적 연합 → 외적 소명 → 중생과 유효적 소명 → 회심 → 신앙 → 칭의 → 양자 → 성화 → 성도의 견인 → 영화
3) 기타의 견해
개혁주의자들의 구원의 서정에 대한 다양한 입장들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① John Calvin의 분류
소명과 신앙 → 중생과 회심 → 성화 → 칭의 → 예정 → 부활의 순서
② A. Kuper의 분류
칭의 → 중생 → 소명 → 회심 → 신앙 → 성화의 순서
③ H. Bavinck의 분류
소명 → 신앙과 회심 → 칭의 → 성화 → 영화의 순서
④ Charles Hodge의 분류
소명 → 중생 → 신앙 → 칭의 → 성화
⑥ 박형룡의 분류
소명 → 중생 → 회심 → 신앙 칭의 → 수양 → 성화 → 성도의 견인 → 영화
2. 각 부분별 개요
구원의 서정을 박형룡의 논거를 중심으로 각 부분별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1) 소명
롬8:30에서 구원 서정의 첫 머리에 소명(부르심)을 두었다. 소명은 외적 소명과 내적 소명으로 구별되며, 내적 소명은 유효적 소명으로 불리워지며 내적 소명은 성령에 의하여 이루어지며,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택한 자를 영생으로 초대하시는 영원한 부르심이다.(딤전6:12) 내적소명이 없이 외적 소명이 효력을 발생하지 못한다.
2) 중생
중생은 순간적으로 이루어지는 성령의 비밀한 사역으로, 개인의 전 인격에 영향을 미친다. 중생한 자란 성령세례를 받은 자를 가리키며, 중생과 성령의 세례는 따로 떼에서 생각할 수 없다. 중생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첫째 요건이다.(요3:3,5)
3) 회심
회심은 믿음과 회개를 통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하나님의 행위이다. 회심은 두 요소가 있는데, 회개와 신앙이다. 회심은 성령 하나님의 활동으로, 회개는 율법을 방편으로 역사하고, 복음을 수단으로 신앙을 일으킨다.(롬10:17)
4) 신앙
신앙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아들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죄인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곧 믿는 것이다. 이는 인격적인 신뢰를 가리킨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의미는 영적인 활동과 육적인 활동을 포함한다, 믿음은 자아발생적이 아니요 성령의 활동에 의한 결과이다.
5) 칭의
롬3:30, 5:1, 갈2:16등에서 믿음에 칭의가 뒤따른다는 사실을 말씀한다. 칭의는 하나님이 의롭다고 일컫는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법정적인 선언이다. 칭의로 말미암아 죄인은 그가 마땅히 져야 할 죄책이 제거된다. 칭의로 말미암아 양자되는 권세가 주어진다. 칭의는 성화와 구별되며, 칭의가 선포적인 데 반하여 성화는 점진적이며, 죄의 오염을 제거하고 일생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6) 수양 (양자:역주)
법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지는 것이다. 수양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후사로 영생복락을 누릴 특권을 부여받는 것이다. 수양된 자는 성령의 권면과 지도를 합하여 성화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7) 성화
성화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중생한 자의 점진적 성취이다.(살전5:23) A.A. Hodge는 성화는 “그리스도 안에 완전한 인성에 키가 자라는데 까지 이르는 것이다”라고 했다. 또한 루이스 벌콥프는 “성화는 성령이 이로써 칭의된 죄인을 죄의 오염에서 구출하시며 그로 하여금 선한 일을 행할 만하게 하시는 은혜로운 성령의 공작이다”라고 말하였다. 성화의 방편은 말씀과 성례와 기도이다. 성령은 성도를 성화케 하시고, 성화의 목표는 온전하고 완전한 그리스도의 형상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충족한 거룩을 이루기까지이다. 그리스도인은 죽을 때 완전히 성화된 몸으로 천국에 이른다.
8) 성도의 견인
신자가 하나님의 은혜상태에서 타락할 수 없고 떨어지지 아니하며 궁극적인 구원을 이루시는 성령의 계속적인 사역이다.
9) 영화
구원 서정의 최후 단계로 영원한 영광, 무궁한 세계에 임하는 것이 곧 영화이다. 영화는 성화처럼 점진적인 과정을 거치지 아니하고 성령의 순간적인 역사로 영화한다. 성도의 몸의 부활에서 완전한 구속을 이루고 완전한 행복을 경험하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각 개인들이 육신의 장막을 벗을 때 임하며, 부활시에는 동시에 모든 성도가 경험하게 된다.
3. 칼빈주의 구원의 서정의 특징
개혁파 신학의 구원의 서정은 인간의 영적인 상태는 그의 지위, 즉 율법과의 관계에 의존하며, 죄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를 근거로 하여 인간을 타락시키고 파괴적인 죄의 영향력에서 구원받을 수 있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구원에 있어서의 인간의 무능력을 전제하며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가 전제되고 있다. 이 때문에 구원의 서정에서의 각 항목마다에 하나님의 역사(은혜)를 배제하지 않으며, 구속 사역의 적용에 있어서 ‘칭의’는 논리적으로 우선하며, 중생이 회심보다 선행한다.
「웨스터민스터 소요리문답」에서도 구원을 성령께서 적용하시는 역사라는 것을 강조하며(29-30문) 성령이 인간으로 하여금 믿도록 하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칭의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은혜 행위만을 주장하며(33문), 회개도 하나님의 선물인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 강요」의 순서에 있어서는 구원론의 후반부에 위치하는 ‘예정론’이 실제로는 하나님 편에서는 가장 우선적인 구속 사역이 되는 것이다. 이 사실은 「제 2스위스 신앙고백서」의 10장 “하나님의 예정과 믿는 성도들의 선택에 관하여”에서 명확히 나타난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그의 자유의지에 의하여, 그리고 순 은혜로 사람의 그 무엇을 조건으로 삼지 아니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시기로 의지하시는 믿는 성도들을 예정 혹은 선택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것은 우리의 공로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 때문에 택하시는 것이지 우리를 직접 택하시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하시는 목적은 이제 신앙으로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는 사람들이 택함을 받은 사람인 것을 확증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개혁주의 신앙고백에서도 칼빈주의적 특성인 중생과 회심에 대한 입장이 분명하게 제시되고 있다. 즉 철저하게 구원과 관계돼서 그 출발점과 마지막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에 맡겨진 것이지 인간의 결정에 따라서 좌우되는 것이 아님을 밝히고 있다.
IV. 구원의 서정에 있어서 양자의 차이점.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에 있어서 차이점은 여러 가지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가장 핵심이 되는 부분은 중생과 회심의 순서에 있어서 분명한 차이점이다. 이것은 사소한 차이가 아니라 매우 중요한 차이점인 것이다. 이 순서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서 역사적으로도 개혁주의와 비(非)개혁주의 신학의 많은 지류들로 나누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이 구원에 있어서 그 절대적인 주권을 갖고 이끄시는 가? 아니면 인간이 주도해 가는가? 하는 중요한 점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중요하게 다루어져 왔던 것이다. 이러한 중요한 차이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은 이런 차이점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 우리의 교회실정이다.
그 중요한 차이가 되었던 부분들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먼저는 칼빈주의 쪽에서는 부르심을 중심으로 중생을 회심 앞에 두어서 구원의 출발과 마지막은 하나님의 의도하심과 결정하심에서 설명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알미니안주의 자들은 구원을 결정하게 되는 핵심을 회심으로 잡고 이것을 중생되기 전에 앞에 설정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의 결정은 결국 인간의 판단과 결정에 따라서 좌우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상들은 칼빈주의 교리 중에 예정과 연결해서 생각하면 그 차이점을 더욱 자세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칼빈주의 자들은 예정을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선택의 섭리는 신앙이나 선행을 조건으로 하지 않는다. 신적인 의지는 그 활동에 있어서 외부로부터 동기지어 지지 않으며 오직 내부로부터 은총이나 신적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서만 움직인다. 유기에 대한 섭리는 버림받을 만한 아무런 특별한 결점이 없어도 그렇게 정해진다. 그는 그의 죄에 있어서 또는 그 죄에 의하여 구별되어지지 않는다. 그가 버림받게 되는 것은 단순히 본성과 습관의 죄성 때문인데 이러한 죄성은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이므로 모든 인간들은 동일하게 죄책과 형벌에 빠질 수밖에 없다.
여기에 비해 알미니안주의 자들은 이 견해가 가지는 윤리적인 불완전성을 강조했으며, 이들은 하나님의 섭리는 그것이 선택적이든, 유기적이든 간에 철저하게 조건적임을 주장했다. 하나님은 그의 예지에 의해 최종적으로 믿음을 가질 자들은 선택하시고 불신앙을 가질 자들은 유기하신다. 신의 예지는 그의 의지적인 결단들에서 추론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직관적이지만 필연적이지는 않다. 하나님이 알고 있는 것은 비록 그것이 절대적으로 확실하기는 하지만 필연적으로 인식되어져야 하지는 않다. 이처럼 구원의 주체에 있어서 선하신 하나님의 뜻과 그분의 의지에서 시작된 것과 인간의 판단과 결정에 의해서 되어지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게 되었다.
더욱 회심에 대한 부분에서도 칼빈주의나 알미니안주의 모두 이것은 성령의 사역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은총을 저항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필요충분적이며 하나님의 성령이 영혼에 직접 작용하여 생기는 것이다. 이에 반해서 알미니안주의는 신적 행위는 진리를 통해 중재되며 따라서 신체적이고 강제적인 것과 구별되는 도덕적이고 설득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 회개와 중생의 과정들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은총도 종국적으로는 거부될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는 이들은 신앙은 의롭게 하는 매개체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영혼을 그리스도에게 연결시켜 주는 도구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완전한 것처럼 자비롭게 받아들여지는 불완전한 의로서 간주되었다.
결국 이런 알미니안주의 자들의 생각은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되어 있지만, 그 은혜란 그것에 대한 사람의 수납 여부의 결정에 따라 주어진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은총은 우리의 구원을 가능하게 할 뿐이지, 결정적이게 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구원에 관한 궁극적 선택이란 사람 자신에 의한 것”이라하여, 하나님의 개인의 택정은 그분의 주권적 선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선택권 안에서 그분의 예지에 있게 된 것이다.
이런 차이점은 선을 행할 수 있는 타락한 인간들의 능력을 부당하게 격상시켜서, 그러므로 알미니안주의자는 하나님의 은혜의 절대적 필요성을 훼손시키려는 자들이며 그들이 카톨릭이건 개신교이건 간에 이에 대항하여 칼빈주의 자들은 계속적으로 싸웠던 것이다.
칼빈도 중생을 회심 전에 두는 중요한 이유를 그의 로마서 8장 주석에서 부르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신자들은 그들 자신의 노력에 의해서 경건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인도함을 받는다. 이는 그가 그들을 선택하여 그의 특별한 백성들이 되게 하셨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인간들이 그들이 보답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모든 것들을 배제하고 있음에 분명하다. 이는 우리가 선택받게 된 원인들을 하나님의 은밀하시고 선하신 뜻 외에 다른 곳에서 찾아서는 안된다고 바울이 말한 것과 같다. 또한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선택에 근거하고 있다. 즉 선택으로 말미암아 예정을 입어 생명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칼빈은 자신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그의 강요에서 더욱 확고하게 밝히고 있다. 즉 믿음이 회개에 앞서는 것이지 회개로 인해서 믿음이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회개의 근거는 복음에 있으며, 믿음은 복음을 받아들인다.”
“회개의 근원이 믿음에 있다고 할 때에, 우리는 회개를 하게 만들기까지에 어떤 시간적 간격이 있다고 상상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뜻은 자기가 하나님의 것임을 알지 못하면 사람은 진심으로 회개할 수 없다는 것을 밝히려는 데 있다.”
결 론.
이상에서와 같이 칼빈주의적 독특성은 다른 비(非)개혁주의에서 나타난 부분과 매우 다름을 살펴보았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칼빈주의를 제외한 다른 사상에서는 그 공통성이 인간론을 중심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직 유일하게 칼빈주의만의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위를 세우려고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에서 칼빈주의적 구원 개념만이 가진 그 독특한 면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또한 칼빈주의적 구원의 서정에 있어서 개혁자들의 공통된 소리는 구원의 서정이 단독적으로 분리돼서 언급되어서는 안되며 전체적으로 함께 언급되고 그 중요성이 인정되어야 그 가치를 상실하지 않게 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칼빈 자신도 이 부분에 있어서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우리가 십자가에 동참하는 것이 소명, 칭의, 그리고 마침내는 영화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까닭에 그것들을 결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칼빈주의적 독특성의 중요성을 바르게 세워야만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허락해 주신 구원의 참다운 가치를 발견하게 될 것이며, 그렇게 될 때에만이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자세가 바르고 겸손하게 자리잡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자세하게 가르쳐서 모든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만을 온전히 찬양받으시게 하도록 가르쳐야 할 책임이 오늘 우리에게 있다는 사실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참고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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