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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칼빈을 말한다 - 남편과 아버지로서

Sola. 2024. 3. 7. 06:00

 

인간 칼빈을 말한다 - 남편과 아버지로서

 

조준영 기자 / 기독신문 (2009.5.29)

 

 

좀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눈을 감으면 어느덧 그녀의 정숙하고 단아한 자태가 떠올랐고, 새벽의 고요를 깨고 부드러운 목소리조차 들려오는 듯 했다. 친구 마틴 부써가 처음 그녀를 추천했을 때 그녀는 평소 생각하던 배우자감과 꼭 들어맞았다. 정숙하고 순종적이며, 까다롭지 않고 검소하고 인내심이 많은 여자였다. 자녀가 둘 딸린 미망인이긴 했지만, 그녀의 장점들은 그것을 뛰어넘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가슴 속엔 어느덧 그녀에 대한 연모마저 자라고 있었다. 때는 1540년, 서른한 살이 된 칼빈에게 결혼이라는 하나님의 계획이 구체화되는 순간이었다.

목회와 교육, 저술활동에 매진하던 칼빈은 평소 결혼과 이성에 대해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결혼 전에 자신은 아내를 취해본 적도 없으며, 또 결혼하게 될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말하곤 했다. 이 같은 그의 태도에 동역자이자 친구인 마틴 부써와 윌리엄 파렐은 종종 결혼을 해서 안정된 가정생활을 맛보라며 염려 섞인 권면을 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칼빈은 외로움과 아내의 적절한 보살핌을 받아 교회를 더 잘 섬기고 싶은 마음에 1539년을 전후해 결혼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시작한다. 그리고 1539년 5월 19일 파렐에게 보낸 편지에서 처음 결혼에 대해 언급하고, 좋은 아내감을 소개해줄 것을 부탁한다.

 

“저는 여성의 아름다운 외모에 홀딱 반해서 그녀의 결점들까지도 덮어주는 그런 넋 빠진 연애가는 아닙니다. 나를 사로잡는 유일한 아름다움을 지닌 여인은 정숙하고 지나치게 까다롭지 않으며, 검소하고 인내하는 여인,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 건강을 염려해주는 여인입니다.”

 

1540년 2월 칼빈은 재산이 많은 귀족 출신의 처녀를 소개받았으나, 그녀가 프랑스말을 모르고 자신의 가문과 교육에 지나치게 집착한다는 이유로 단념하고 만다. 그 후 또 다른 여인을 소개받고 3월 10일 결혼하려고 했으나 이도 무산되고 말았다. 그러던 중 칼빈 자신을 통해 회심한 재세례파 장 스토르더의 미망인 이들레트를 아내감으로 추천받은 것이다. 몸이 허약했던 그녀는 당시 자크라고 알려진 아들과 쥬딧이라는 딸을 데리고 가난하게 살고 있었으며, 자녀들의 교육에만 힘을 쏟고 있었다. 칼빈의 전기를 쓴 데오도레 베자에 따르면 그녀는 ‘훌륭한 성품을 지닌 경건한 부인’이었으며, 머리가 좋고 마음이 따뜻하다는 평을 받았다.

 

결혼식은 8월 10일 윌리엄 파렐의 주례로 조촐하게 거행됐다. 이로써 칼빈은 한 여인의 남편이자 두 자녀의 아버지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어린 시절 어머니를 여의고, 줄곧 망명과 신학과 목회 현장에서 쫓겨 다니듯 살았던 칼빈에게 결혼생활은 그간 맛보지 못한 안정감을 가져다주었다. 또한 이들레트는 칼빈에게 단순한 아내 정도가 아니라, 남편의 목회 사역을 돕고 섬기는 동역자였다. 칼빈은 그녀를 ‘내 인생의 훌륭한 동반자’ ‘내 사역의 신실한 조력자’ ‘보기 드문 여성’ ‘근엄하고 존경할만한 여성’이라고 평했다.

 

그러나 여느 가정이 그렇듯 칼빈의 결혼생활이 마냥 행복했던 것은 아니었다. 제네바 의회의 간곡한 요청으로 1541년 다시 제네바로 돌아온 칼빈 부부는 1542년 7월 첫째 아기를 낳지만, 2주 만에 여의고 만다. 칼빈 부부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고통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아 칼빈은 이후 이들레트와의 사이에 적어도 두 명 이상의 자녀를 낳았으나 모두 유아기에 죽고 말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들레트는 산후 조리에서 몸이 회복된 후 곧바로 심한 병에 걸려 병상에 누워 지내기 시작했다. 1547년에는 이들레트가 데려온 아들이 뚜렷한 이유 없이 가출을 해, 칼빈은 그를 찾기 위해 분주하게 사방을 찾아다녀야 했다.

 

칼빈의 기도와 염려에도 불구하고 이들레트의 병이 회복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결국 결혼 9년째인 1549년 4월 이들레트는 칼빈이 보는 앞에서 조용히 눈을 감는다. 칼빈은 그때의 슬픔과 고통을 “주님이 아니었다면 분명 그 고통에 무너지고 말았을 것”이라고 고백했다.

 

사십 세에 혼자가 된 칼빈은 그 후 죽을 때까지 15년을 독신으로 지냈다. “보기 드문 자질을 갖추고 있던 내 아내가 일년반 전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나는 이제 기꺼이 독신으로 살고자 한다”는 다짐을 마지막까지 실천한 셈이다.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아버지로서의 칼빈 역시 모자란 편이 아니었다. 칼빈은 이들레트가 죽기 전 그녀에게 그녀가 데려온 아이들에 대한 책임을 다하겠다고 다짐했으며, 실제 두 아이를 양육하는 데 정성을 기울였다.

 

이들레트와의 사이에서 난 아이를 잃은 후 칼빈은 자신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천천의 자녀들이 있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위로를 구하였다.

 

웅장한 첨탑보다 때로는 숨겨진 한 모퉁이가 더 아름답게 보일 때가 있다.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걸어간 애틋하지만 아름다웠던 시간. 불안한 시대를 살다간 칼빈의 인생에서 간과할 수 없는 보석 같은 한때다.

 

▲ 존 칼빈의 아내, 아들레트 반 뷰렌.

 

칼빈에게 있어 성례는 예수 그리스도가 정한 세례와 성찬뿐이었고, 결혼은 성례가 될 수 없었다. 칼빈은 에베소서 5장 32절의 “이 비밀이 크도다”에 대한 주석에서 중세 가톨릭교회가 결혼을 성례로 인정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실제 32절에서 바울이 사용한 그리스어 단어 ‘mysterion’(비밀)은 후대를 거치면서 잘못 해석되고, 번역되면서 가톨릭교회에 의해 성례로 받아들여졌다.

반면 칼빈을 비롯해 종교개혁자들은 결혼을 ‘하나님의 질서’라고 보았다. 칼빈은 앞서 루터가 결혼의 일차적 목적을 육욕의 해결과 출산에 있었다는 것을 긍정하면서도 동시에 좀 더 성숙한 결혼관을 제시했다. 칼빈에게 있어 결혼의 일차적 목적은 자식을 낳기 위한 것보다는 인간의 사랑과 두 사람의 연합에 있었다.

 

성(性)에 대한 견해에서도 칼빈은 루터에서 진일보했다. 루터는 어거스틴이나 아퀴나스의 견해와 마찬가지로, 성적 결합을 원죄의 결과로 보았으며, 근원적으로 선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칼빈은 성적결합을 타락의 결과로 받아들이기 하지만, 그것이 결혼이라는 틀 안에서 정숙하게 행해진다면 사악한 것이 아니라 선한 것으로 보았다. 칼빈의 이러한 견해는 정신적·영적인 것과 육적·물질적인 것을 구분하는 이원론을 극복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칼빈은 1545년 말에 결혼법을 제정했다. 칼빈은 결혼법에서 예절과 질서에 대한 것뿐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부분적으로 회복된 남녀간의 기본적 평등에 관한 관심을 보여준다. 특히 8항에서 “어떤 아버지도 그의 자녀들의 즐거움과 동의가 없이는 그 결혼이 아무리 좋게 생각될지라도 그의 자녀에게 강요할 수 없다”며 결혼이 자유의사에 의해 행해져야 한다고 밝혔다.

 

칼빈은 부부의 연합에 따라서 자녀가 있게 되므로 혼인에 대한 규례는 부모를 공경하라는 제 5계명의 기초가 된다고 설명하였다. 자녀들이 귀하기는 하지만 그들의 부모가 되는 부부의 사랑을 선행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칼빈은 결혼은 쑥과 같이 쓴 부분도 있지만 그 자체는 서로 연약한 사람들이 약점을 보완하고 상처를 치료하는 꿀과 약과 같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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