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한 주기도문 해설
배현주 목사
1.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 부분은 신자들의 기도의 대상이 누구신가를 알려준다. “하늘에 계신다”(εν τοι? ουρανοι?)는 의미는 그의 주권이 하늘 이외에 다른 곳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늘”이 표상하는 바는 “높음”, “엄위로움”, “고상함”, “고귀함”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신다는 것은 그의 얼머나 높으심을 찬송하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영역은 무한하시다. 그러나 그의 장엄하시고 높으시고 엄위로우심은 “하늘에 계시다”는 표현으로 압축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신다는 것은 그를 높이며 찬송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 엄위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버지 하나님으로 다가오신다.
“우리 아버지”(Πατερ ημων)라고 할 때 “아버지”(Πατερ)는 성부만을 지칭하지 않는다. 그것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서 하나이신 하나님을 지칭한다. 성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우리 경배와 찬송의 대상은 성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어제나 오늘이나 여상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선지자 이사야도 메시아에 대한 예언을 할때에 “그는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시다.”라고 선포하였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시다. 이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하나의 본체로서 계시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하늘에게 계신 우리 아버지”(Πατερ ημων ο εν τοι? ουρανοι?)는 신자들의 간구의 대상이신 성삼위일체 하나님을 의미한다.
2.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나님의 성호는 여러 가지이다. “엘사다이” 이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여호와”라는 성호는 이스라엘의 언약의 하나님의 성호이다. “아도나이”라는 성호는 이스라엘의 주권자이시고 온 세상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성호이다. “엘로힘”은 이방 종교에서도 부르는 “신”이라는 의미이지만 구약 성경이 증거하는 “엘로힘”은 그 백성의 하나님으로서 “엘로헤누”로 계시되었다. 이는 “우리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란 의미는 신자들의 찬송의 목적이다. 신자들의 찬송은 성삼위일체 하나님을 기리며 그의 이름을 높이는 것이다. 여기에서 신자들의 전 생애가 하나님의 찬송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별스럽게 찬송을 드리지 못할 지라도 신자들의 삶 전체가 아버지 하나님께 찬송이다. 그러므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간구를 드리는 신자들은 자신들의 생애 전체가 하나님께 드려진 바되는 삶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찬송은 신자들의 삶이다. 거기에는 입술의 열매를 포함한 전체의 삶이다. 그래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3. 나라이 임하옵시며..
주기도문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간구하라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지고 오신 하나님 나라는 신자들의 매일의 삶 가운데 임재하는 나라이다. 하나님 나라의 임재는 항상 현재적이다. 지금 주님과 동행하는 삶 가운데서 이미 그 신자들에게 항상 임재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감각으로 혹은 진동으로 느끼는 나라가 아니다.
가장 고난 가운데 있을지라도 그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는 오직 믿음으로 경험이 되는 나라이다. 그래서 신자들은 믿음으로 그 나라를 날마다 경험하며 살아간다. 하나님 나라가 있다. 다만 믿음이 있는 자들만이 들어가는 나라이기에 이 세상은 전혀 깨닫지 못한다. 그리고 세상 나라에 속한 많은 거짓 신자들도 깨닫지 못한다. 하나님 나라는 그리 멀리 있는 나라가 아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이 계신 것과 그가 그에게 나아가는 자에게 상주시는 분이심을 깨닫지 못한다. 그래서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히 11:6) 그렇게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그의 나라를 매일 순간 순간 신자들이 경험할 수 있도록 내려 주신다.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경험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신앙이다. 그것은 가장 가난한 삶 가운데 가장 충만하게 임재하는 나라이다. 그래서 물질의 부재로 인하여서 하나님 나라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부재하여서 하나님의 나라가 그러한 자들에게 멀리 있다. 오직 믿음으로 만 경험이 가능한 하나님 나라는 우리에게 매우 가까이 있다.
대부분 인생들의 어두움이 하나님의 나라를 보지 못하게 가로 막는다. 그것은 죄악이다. 죄가 하나님 나라의 풍성한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게 날마다 막아서고 신자들을 뒤흔들고 어지럽힌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중생한 신자들에게 날마다 경험되는 놀라운 거룩한 나라이다. 성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영원한 나라이며 정결한 나라이고 순결한 나라이다.
4.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뜻”이 헬라어로 “뗄레마”(θελημα)이다. 이것은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신적 작정이다. 그리고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신적 작정은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토록 계획된 것이다. 그것은 변함도 없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며 왜곡과 뒤틀림이 없다. 오직 그의 뜻이 반드시 성취될 것이다. 그러므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의미는 하나님의 섭리적 경륜의 역사를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그의 섭리를 따라서 경륜적으로 구속사를 이루어가신다.
이미 천상에서 영원 전부터 계획된 그 모든 신적 작정은 일점 일획도 어그러짐이 없이 반드시 성취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따라가는 그 복된 신앙이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 영광의 나라에 지금 현재적으로 임재를 경험하면서 더욱 충만한 완성을 향하여서 달려가는 자들이 신자들이다. 신자란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서 푯대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달려가는 달리기 선수와 같다. (빌 3:14)
세상의 면류관은 썩을 면류관이지만 신자들의 면류관은 썩지 아니할 면류관이다. 그 영원하고 완전한 면류관을 바라보며 달려 간다. 그 면류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자들에게 씌워주시는 영광의 면류관이다. (고전 9:25) 하나님 나라의 계시(αποκαλιψι?)는 반드시 성취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신구약 성경은 무오하며 하나님의 영감으로 되었다. 그 일점 일획도 없어지지 않는다. 천지가 없어지기가 더욱 쉽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흔들고 거짓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의 허망함이란 실로 가소롭기 짝이 없다.
신구약 성경의 무오성을 거절하는 순간 신의 계시를 부정하는 것이며 이는 이신론이다. 그리고 이신론은 반드시 무신론으로 나아간다. 결국 신의 존재를 부정하며 하나님의 실재를 부정한다.
하나님의 뜻이 이 세상에서 구속사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로 성취되는 모든 지식을 우리는 신구약 성경으로부터 얻는다. 신구약 성경은 그 만큼 위대하며 높은 가치가 있다. 그것은 유일하신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속 계시이다. 그것은 신의 계시이다. 그래서 절대성과 영원성과 완전성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하는 자는 이미 하나님 나라에서 멀다.
그렇게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토록 계획하신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신적 작정은 신자들이 살아가는 역사 안에서 하나씩 하나씩 성취되고 있다. 결국 신자들이 확신과 경외심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것은 신구약 성경이다. 그렇게 신구약 성경의 권위가 절대적이며 완전하고 영원하다.
5.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신자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일용할 양식은 두 종류이다. 첫째는 일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물질이다. 그것이 없으면 살 수 없다. 그래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기도하라 하셨다. 그러나 신자들이 일용할 양식을 얻어서 생명을 유지하고 살아가는 목적이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살아가는 자로서 부르심을 받은 그 위치에 있다. 신자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목적은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데 있다.
그 옛날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신명기에서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라고 권면하였다. 이는 모든 인생들의 삶의 목적이지만 오직 신자들에게만 유효하다. 신자들 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 번째 의미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것은 만나이다. 이스라엘이 광야 생활 가운데 여호와 하나님께 만나를 받아서 먹고 살았다. 그들의 광야에서 생활 40년간 그들이 굶지 않고 살 수 있었던 것은 만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오셔서 그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산떡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만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표상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하늘에서 내려오신 생명의 양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광야같은 매일의 삶에서 반드시 필요한 만나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나의 실체이시다. 그러므로 신자들이 매일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사는 자로서 살아가지 않는다면 그들의 신앙은 금세 메마를 것이고 그들의 영혼은 곤고하여서 광야를 헤매는 가련한 영혼이 될 것이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돌아와야 한다. 그것만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위로이다. 하나님 나라의 유업은 그의 말씀을 통하여서 신자들에게 성취된다. 여호와의 말씀에 대한 무지는 실로 신자들에게 심각한 재난이다.
인간의 체온 보다 높아진 기온을 몸으로 받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바로 광야같은 삶이다. 주의 말씀만이 광야 같은 삶 가운데 따가운 햇살을 가려주는 구름 기둥이다.
“1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2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3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4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5 해는 그 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6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 온기에서 피하여 숨은 자 없도다 7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8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9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로우니 10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11 또 주의 종이 이로 경계를 받고 이를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시19:1-11)
6.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주님께서 가르치신 사죄의 은총에 대한 간구는 실은 전적으로 그의 은총이다. 인간편에서 공로를 내세울 것이 없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라 가르치신다.
이는 우리가 이웃의 죄를 사하여 준 것이 그 공로가 되어서 우리의 죄가 사하여 진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져 주지 못하는 그 죄가 여전히 남아 있어서 속죄를 받을 수 없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우리의 복을 위한 말씀이며 우리에게 어떠한 수고를 행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다.
이웃의 죄를 중심으로 사하여 주지 못하는 자는 그 죄가 항상 남아 있다. 그래서 자신을 괴롭힌다. 과거와의 결별이 불가능하다. 항상 과거에 매여서 살아가다 죽는다. 그래서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주는 태도가 중요하다.
이것은 마태복음이 증거하는 큰 빚을 탕감받은 어리석은 종의 비유에서 잘 드러나 있다. 큰 빚을 주인에게 지은 어떤 종이 그 빚을 탕감해 줄 것을 요청한다. 그것은 그 종이 평생 갚아도 갚을 수 없는 엄청난 빚이었다. 그 재력가인 주인이 그 종의 요청을 들어 주었다. 그래서 그 빚을 탕감해 주었다. 그런데 그 종이 자신과 처지가 비슷한 동관 하나가 곧 갚을 수 있을 정도의 작은 빚을 당장 갚으라며 윽박질렀다. 동관이 조금 기다리면 갚아 주겠다고 했으나 전혀 무시하고 그 동관을 법정에 고소해서 감옥에 가두어 버렸다.
이 배은망덕한 짓을 한 이야기가 그 주인의 귀에 들어가고 그 주인이 그 종을 불러서 어마한 빚을 갚아준 주인의 은혜를 잊고 네 동관의 작은 빚도 기다려 주지 않는다고 말씀하면서 그 종에게 모든 빚을 갚을때까지 감옥에 가 있으라고 명령한다. 이는 실로 이웃의 허물을 중심으로 사하여 주지 못하는 많은 신자들의 어리석은 모습이다. 이 비유가 주기도문의 한 부분을 차지한다.
신자들은 중심으로 우리 이웃의 허물을 사하여 주어야 한다. 신자들이 중심으로 우리 이웃의 허물을 사하여 주게 되면 그를 미워하는 마음이 사그라 들면서 그를 향한 애정이 싹튼다. 이는 실로 놀라운 경험이다. 자신에게 범한 이웃의 허물을 중심으로 사하여 주는 마음이 매우 중요하다.
그러한 자세가 그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사죄의 은총을 받는 것이다.
신자들은 자신에게 죄를 지은 자의 허물을 중심으로 사하여 주어야 한다. 그것이 구속 받은 신자에게 최고의 은혜이다.
7.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모든 시험은 우리 각자의 죄악으로부터 비롯된다. 사도 야고보가 그의 저서에서 분명하게 증거하였다.
“13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3-15)
인생들 안에 감추어져 있는 은밀한 욕망이 시험에 드는 원인자이다. 그래서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는다고 사도 야고보는 증거하였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주기도문에서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옵소서”라 간구하라 하셨다. 이는 신자들이 항상 살펴서 시험에 들지 않게 주의하라는 의미이다.
8.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신자들이 악에 빠지는 경우는 자신들 안에 부패성이 절제되지 못할 때이다. 신자들은 부단히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서 악에서 떠나야 한다. 악을 좋아하고 악을 따라가는 자는 멸망을 피할 수 없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복있는 자는 “악인의 꾀를 좇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자의 자리에 앉지 않으며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서 그 율법을 밤낮아로 씨름하는 자이다”(시 1:1-2)라고 고백하였다. 시편 기자의 말씀처럼 “악인의 꾀를 좇지 않는 삶이 복되다. 대부분의 망가져가는 인생들은 악인의 꾀를 좇는다. 잠시 유익있고 이익이 되며 이 세상에서 호의 호식하며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원한 멸망일 뿐이다. 더 어렵고 더 힘들게 살게 될지라도 주의 말씀을 따라서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복되다.
9.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이제 주기도문 맨 마지막 부분은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이 있사옵나이다.”로 마친다. 하나님 나라와 그의 권세와 그의 영광이 영원토록 아버지 하나님께 있다.
신자들의 간구에 맨 마지막에 우리의 간구를 들어주시는 하나님께 마땅히 돌려야 할 송영이다. 그래서 맨 마지막 부분은 송영으로서 간구이다.
하나님을 찬송함으로서 기도를 마치는 것이다.
오직 성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영원토록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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