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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개혁운동과 문서의 역할 (2-8)

Sola. 2025. 1. 2. 06:00

 

제 2장. 루터와 독일에서의 개혁운동

 

8. 루터의 개혁운동과 문서의 역할

 

이상규, 교회개혁사, 성광문화사, 1997 / 개혁주의 학술원 (2007.3.28)

 

 

루터의 개혁운동에 관한 우리들의 긴 이야기를 마감하면서 인쇄매체가 개혁운동에 얼마나 큰 기여를 했던가를 정리해두고자 한다. 비록 루터는 그 시대를 이끌어간 사건들을 태동시킨 인물이지만 그 뒤를 이어 온 유럽을 격동시킨 힘들은 한 개인에 비할바 없는 강력한 것이었다. 그 중요한 매체가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뒷받침된 문서의 역할이었다. 이 문서들을 통해 가장 짧은 기간 내에 가장 심오한 정신적 혁명을 가져올 수 있었다. 일반 대중들에게 대규모적으로 사상이나 정신을 전달하는데 있어서 문서는 중대한 역할을 하였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때가 차매…"(갈 4:4)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던 하나님께서는 개혁운동이 짧은 시간 안에 유럽 전역에 전파될 수 있는 외적 여건이 갖추어진 때에 루터를 보내시고 그를 통해 일하셨던 것이다. 1517년 95개조의 게시로부터 루터파가 정식으로 법적으로 인정을 받았던 1555년 아우구스부르크 평화회의까지 약 40년간은 신․구교간의 대립이 심각하였고, 이름 그대로 전쟁이었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 개혁정신은 문서를 통해 확산되었고 루터에게 유리한 여론이 형성되어 갔다.

 

구텐베르크(1394/99~1468)에 의한 활판 인쇄술의 풀현은 세계사의 여러 가지 발명중에 가장 획기적인 사건으로서 군사사(軍事史)에 있어서의 화약의 출현과도 비길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14, 15세기는 흔히 발견과 발명의 시대로 일컬어지고 있다. 지리상의 발견이 유럽인의 시야를 대서양 너무 미지의 대륙에까지 넓혀주었고 지적 세계의 끝없는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면 인쇄물의 발명은 이 가능성을 실현토록 뒷받침해 주었다. 따라서 16세기에서부터 룻소에까지 이르는 스스로 갈등하며 자유로운 지성의 출현에 큰 계기를 마련하였다고 할 수 있다. 독일 마인쯔시의 귀족 가문 출신의 금은세공(金銀細工) 기술자인 구텐베르크는 정치적 이유로 1440년경 스트라스부르크에 망명한 이후부터 인쇄에 종사하였다. 그리고 마인쯔로 돌아간 후에 1450년에는 수동식의 금속활자에 의한 인쇄기술의 발명에 성공하였다.

 

그가 자신의 인쇄소에서 최초로 출판한 활자본은 후일 「42행성서」(The 42-lines Bible)라고 불리게 된 성경본이었다. 이 책은 구텐베르크가 인쇄소를 시작한 1452년(혹은 53년)에 활자조립을 시작하여 1456년 8월 이전에 출판되었으므로 실로 4년이나 소요된 인쇄였다. 이때로부터 100년 사이에 활자본 인쇄술은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그래서 개혁의 기운이 일어나고 있던 15세기 말경에는 독일에 52개소, 이탈리아에 약 80개소, 프랑스에 약 40개소, 네덜란드에 21개소, 그리고 이베리아 반도에는 31개소의 인쇄소가 설치되었다. 전 유럽을 통해서는 300여 처에 1,000여 인쇄소가 세워져 있었다. 수도원에서는 1480년부터 이 신기술을 도입했다. 그래서 1500년경에는 이미 40,000종 이상의 서적들이 나돌고 있었으며, 총수량은 천만 권 이상에 달했던 것으로 추산된다. 우후죽순처럼 각 지역에 문을 연 인쇄소는 주로 인문주의자들에 의해 운영되었고, 각종 고전, 교부 문서, 경건서적 등 종교, 신학관계 출판이 압도적 우위를 차지하였으며 사용된 언어는 거의 라틴어였다.

 

1500년 이후 교회개혁까지 한 인쇄업자가 연간 발행하던 서적 종류는 평균 40종에 달하고 있었지만, 일단 교회개혁의 물결이 밀어 닥치자 이 숫자는 무려 연간 500종으로 급증하였다고 한다. 이 사실은 루터의 개혁운동에 있어서 문서의 역할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의 발명은 슈펭글러가 정의했던 바처럼, "서적 및 독서문화의 시기가 유럽역사에 전개되게 하였고" 이 혁명적 도구가 개혁의 전파와 확산에 적지 않은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 결과 1517년 10월 31일 루터가 내걸었던 95개조는 불과 한 달이 못되어 유럽 전역에 퍼져 나갔다. 루터는 더 이상 비텐베르그 대학의 무명의 교수일 수 없었다. 이젠 교황도 그를 "술주정뱅이 독일인이며, 술이 깨면 달라질 것이라."고 가볍게 보아 넘길 수 없는 인물이 되고 말았다. 이 당시 문서들은 대개 8페이지나 16페이지. 혹은 32페이지 정도의 소책자들이었고, 가격도 저렴한 편이어서 그 당시 대중성 있는 판형이었다.

 

루터의 작품들은 대부분이 이런 소책자들이었고 또 그는 주로 독일어로 글을 썼다. 당시 인문주의자들은 라틴어를 사용했는데, 이것은 식자층의 언어였고 일반민중의 언어는 되지 못했다. 인문주의자들이 교양 있는 식자층에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했다면 개혁자들은 일반평민을 상대로 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했던 점도 특이할 일이다. 1518년에 루터는 「면죄부와 은혜에 대한 설교」를 독일어로 썼는데 이것은 3년 만에 무려 23판까지 출판되었다.(Hans J. Hillerbrand, The World of Reformation, 1973, p.32). 이 후에 나온 루터의 대부분의 소책자들도(특히 독일어로 쓴 글들) 똑같은 인기를 누렸다. 그 당신 10판, 15판, 20판 등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어떤 통계에 의하면 1524년까지 약 100만부의 루터의 소책자가 배포되었다고 한다. 1518년부터 1522년 사이에 독일에서의 출판물의 성격이 크게 달라졌는데 세속적인 책들은 거의 자취를 감추고 종교가 가장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 교황대사 알레안더(Aleander)가 1521년에 남긴 글을 보면 "독일어와 라틴어로 된 루터의 소책자가 매일 쏟아지고 있습니다. 루터의 소책자 외에는 여기서 아무것도 팔리지 않습니다."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과장이 아니다. 또 베아투스 레나누스가 쯔빙글리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서 "루터가 쓴 책들은 인쇄기에서 빠져 나오기가 무섭게 팔려 나갔다."라고 전하고 있다. 1519년 바젤의 인문주의자이며 출판업자였던 요하네스 프로벤(J. Froben)이 루터에게 보낸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가 나아있다.

 

 

우리는 내가 출판한 당신의 전집 600권을 프랑스와 스페인으로 발송했습니다. 이들은 파리에서 판매되어 소르본느에서 읽히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파비아(Pavia)의 서적 도매상 클라부스도 상당한 양을 이태리 전역에 팔기 위해 가져갔습니다. 영국과 브라방(Brabant) 지방에도 이들을 발송하였으며 현재 재고는 10권뿐입니다. 나는 이제까지 서적출판을 통해 이처럼 돈을 번 적이 없습니다.(Froben to Luther, February 14, 1519, in Martin Luthers Werke: Briefweehsel vol 1, Weimar, 1930, vol 1, p.332)

 

이와 같은 여러 자료들을 통해서 볼 때, 루터의 사상이 그 당시 상당한 공명을 얻었고, 문서를 통해 그의 개혁의지를 전파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520년에 루터는 「독일 크리스챤 귀족에게 보내는 편지」, 「교회의 바벨론 감금」, 「기독자의 자유」등 소위 종교개혁의 3대 작품을 발표했는데 이 세 작품은 종교개혁 정신이 표명된 중요한 작품이다. 이 루터의 글이 개혁운동에 끼친 영향은 대단한 것이었고 이 문서를 여러 도시에 공급하기 위해 세 개의 인쇄소가 동시에 책을 출판한 일도 있다. 수요가 공급에 훨씬 앞질렀기 때문이었다. 어떤 기록에 의하면 이해(1520)에 독일에서는 208종의 인쇄물이 나왔는데 그 중 133종이 루터의 작품이었다고 한다.

 

루터의 개혁운동 가운데 최대의 업적은 그의 성경번역임은 이미 말한바 있다. 그가 보름스 제국의회 이후 1521년 5월부터 발트부르크성에 은거하는 동안 헬라어 원문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일을 착수하였다. 그는 1521년 12월부터 다음해 2월까지 에라스무스의 헬라어 성경 제2판(1519년판)을 대본으로 번역하여 1522년 9월에 출판하였고 1536년까지 16회 수정판이 나왔고 계속해서 50판이 나왔다. 구약을 원어로부터 번역하는 작업은 그가 비텐베르크로 돌아온 후 친구의 도움을 얻어 1534년에 완성하였다. 루터의 성경번역은 종교개혁운동에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독일어의 통일과 문화발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루터의 성경번역을 영어를 포함한 기타 일반인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성경이 번역되도록 자극을 주었다는 점에서도 큰 의의가 있다.

 

루터의 다양한 저술과 성경번역이 종교개혁에 준 영향은 문서의 역할과 중요성을 예증하기에 조금도 부족하지 않다. 루터는 1517년 이후 1546년 사이에 약 400여 편의 논문을 썼는데, 이는 평균 한 달에 1편 이상씩을 집필한 셈이다.

 

보름스 제국의회 당시 제국의 황제였던 챨스 5세와 교황의 사절 알렉산더는 제국의회 책상 위에 놓인 모든 책들을 루터가 썼다는 사실을 의심할 정도였다. 루터의 문서들은 쮜리히를 비롯한 스위스 여러 지방에 전파되어 있었고, 그곳에서 이미 동조자들을 얻고 있었다. 화란에도 일찍이 루터의 문서들이 전해지고 읽혀졌다. 이곳에서는 재세례파나 칼빈파보다 훨씬 앞서서 루터의 글들이 소개되었는데. 당시 루터의 문서를 배포하거나 읽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안트윕에서 400부가 켄트에서는 300부가 불태워지기도 했다.

 

프랑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1519년에서 1522년 사이에 루터의 문서들이 밀반입되었고 이곳의 개혁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프랑스에서의 개혁운동의 지도자인 르페브로(Jacques Lefevre, 1455~1536)는 1530년에 불어로 서경을 번역했는데, 이것은 루터의 독일어 성경번역이 준 자극의 결과이기도 했다.

 

복음주의 운동은 종족과 언어를 초월하여, 노동자에서부터 영주들에 이르기까지 제국의 전 지역으로 확산되어 갔고 16세기 유럽의 역사에 커다란 변혁을 가져오고 있었다. 문서를 통한 전파가 이 혁명적 역사과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도구의 역할을 한 결과였다.

 

르네상스시대의 프랑스왕 루이 12세는 활판 인쇄술의 발명을 가리켜 "그것은 인간적이라 보다는 오히려 신적인 발명"이라고 감탄했는데, 루터는 "인쇄술이야말로 복음의 전파를 위해 하나님께서 내리신 최대의 선물"이라고 했다. 이것은 그의 개혁운동과정에서 얻은 생생한 체험으로부터 나온 확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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