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장. 루터와 독일에서의 개혁운동
7. 루터파의 성립과 발전
이상규, 교회개혁사, 성광문화사, 1997 / 개혁주의 학술원 (2007.3.28)
독일에서 루터주의는 1526년 제 1차 슈파이에르 제국회의를 전후하여 예배의식을 발전시켜갔고, 교회조직을 갖추어가기 시작하였다. 루터는 전통적인 예식문(liturgy)을 이용하여 독일어 찬송가 가사를 지었으며 음악과 찬송, 가정생활과 교육을 강조하였다. 그는 성경이 명백하게 금지하지 않는 한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전해오던 관습은 반드시 부인할 필요가 없다고 보았다. 그는 행정당국자들에게 각자의 권한 안에서 예배와 교회의 조직과 운영을 규제하도록 격려하였다. 그리하여 독일 안에는 영방교회(領邦敎會, Landeskirchen)가 생기게 되었고 그 밖의 다른 나라에서는 국가교회가 출현하게 되었다.
1521년 당시만 해도 루터는 외롭게 보름스제국회의 앞에서 정죄를 받았으나 1529년 제 2차 슈파이에르 제국회의 당시는 결코 루터가 외롭게 심판대 앞에 나와 있지 않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루터를 중심으로 한 개혁운동은 하나의 커다란 조직을 갖추면서 독일 내에서 새로운 신앙운동을 일으키며 확산되고 있었던 것이다. 1529년 슈파이에르 제국회의에서 ‘로마 가톨릭 신앙만이 유일한 합법적 신앙’이라고 선언했을 때 5명의 군주(제후)들과 14개 도시의 대표들이 루터를 지지하고 제국회의 결정에 ‘항의’(protest)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1530년은 루터파의 역사와 신앙에서 볼 때 중요한 해였다. 황제 칼 5세는 오랫동안 불화관계에 있던 교황과 프랑스왕과 화해하였고 1530년 2월 24일 볼로냐(Bologna)에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이제 그는 독일에서의 종교적 분쟁을 해결할 여력을 얻게 되었고 그 자신이 로마 가톨릭교회와 루터파와의 문제를 직접 해결하기 위해 9년 만에 독일로 돌아온 것이다. 그래서 1530년 6월 20일 제국회의가 아우그스부르크(Augusburg)에서 공식적으로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서 로마 가톨릭측은 교회에 ‘반역한 무리’들이 ‘교회의 품’으로 다시 돌아오도록 할 것을 황제에게 요구하였고, 프로테스탄트 측에서는 그들의 문제가 편견 없이 공정하게 취급될 것을 요청하였다. 또 한편 다수의 인사들은 이 회의를 통해 양측의 화해와 타협을 기대하였다. 멜란히톤도 그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타협적으로 로마교회 측과 프로테스탄트진영 간에 화해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했었다.
황제 칼 5세는 그간의 사건의 전개와 더불어 양측의 신앙상의 차이를 알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신교도들에게 그들이 로마 가톨릭교회와 다른 점들을 분명하게 밝혀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래서 루터의 동료이자 후계자였던 필립 멜란히톤은 1530년 신앙고백서를 작성하였는데 이것이 유명한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서’(Confessio Augustana, The Augusburg Confession)이다. 남부독일의 바덴(Baden)지방에서 출생한 멜란히톤은 당대 최대의 히브리어 학자였던 요한 로이힐린(Johannes Reuchlin, 1455-1522)의 영향을 받았던 유명한 인문주의자였다. 그는 언어적 재질과 함께 학자로 명성을 얻었는데 로이힐린의 천거로 비텐베르크대학의 헬라어 교수로 임명되기도 했다. 이미 그는 1521년에 신학요의(Loci Communes)를 썼는데, 이 책은 최초의 개신교 조직신학서로 알려져 있다.
부연하자면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서 외에도 그해 7월 8일에는 쯔빙글리가 작성한 신앙고백서(신앙의 이유, ratio fidei)가 제출되었고, 이로부터 사흘 후에는 스트라스부르크, 콘스탄츠, 멤밍겐, 린다우 등 4개 도시의 신앙고백서, 곧 ‘4도시 신앙고백서’(Confessio Tetrapolitana, Tetrapolitan Confession)가 부쩌(Bucer)와 카피토(Capito)에 의해 제출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일련의 문서가 제출된 후 다양한 입장의 신학적 견해가 논의되었던 것이다.
멜란히톤이 작성한 아우그스부르크 신조는 후일 루터파의 가장 중요한 공식문서가 되었고 1517년부터 1648년까지의 교회개혁 기간 중에 나타난 첫 신앙고백문서가 되었다. 어떻든 이 문서는 루터주의의 복음적 신앙을 표현하면서도 로마 가톨릭과의 어느 정도 화해를 의도하였기 때문에 로마 가톨릭을 자극할만한 교황수위권의 문제, 연옥설 등 7개항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스토페르(Richard Stauffer)의 말처럼 사실 멜란히톤은 이 문서를 통해 프로테스탄트들이 ‘로마 가톨릭의 기본적 신앙’에서 이탈되지 않았음을 보이려고 시도하였고 따라서 가능한 한 비텐베르크와 로마를 갈라놓은 교리적 차이들을 축소시키려 애쓴 흔적이 있다. 또 복음주의 교회에 도입된 개혁적 조치들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폐습들을 교정하려는데 있었음을 지적하려고 했다. 그러면서도 이 신앙고백서는 루터파에 대한 오해를 해소하고 교회의 폐습들을 개혁하는 한편, 프로테스탄트신앙을 천명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이 신앙고백서는 전 28장으로 된 문서인데 1장에서 21장까지의 제 1부는 ‘신앙과 교리’로서 루터파의 기본적 신앙을 진술하였다. 즉 하나님, 원죄, 세례와 같은 교리는 따랐지만, 칭의, 성찬, 선행 등에 대해서는 로마 가톨릭과 견해를 달리하였다. 22장에서 28장까지의 제2부 ‘개정된 폐단들에 대한 논의’에서는 당시 교회의 폐단들에 대해 지적하고 있는데, 성찬식을 행할 때 평신도들에게 분잔 하지 않는 일, 성직자의 결혼을 금지한 일, 미사, 고해, 수도원 서약 등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루터는 1521년 보름스제국회의에서 정죄를 받아 법의 보호를 박탈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우그스부르크에는 가지 못하고 코부르크(Coburg)까지만 갔고 멜란히톤이 루터파의 대표단을 이끌고 아우그스부르크 제국회의에 참석하여 이 신앙고백서를 제출하였다. 이 문서는 제국회의 본회의장에서는 낭독되지 못했으나 1530년 6월 25일 황제의 개인접견실에서 200여명의 고위성직자들이 자리한 가운데 삭소니지방 선제후의 고문이었던 크리스티안 바이어(Christian Beyer)에 의해 약 두 시간에 걸쳐 낭독되었다.
비록 이 문서가 유화적이고 화평을 의도하였으나 제국의회의 과반수이상을 차지했던 로마 가톨릭주의자들에게 호의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제국회의는 멜란히톤과 에크를 대표자로 하는 양측의 위원회를 임명하였고, 로마 가톨릭측은 루터의 적수였던 에크로 하여금 멜란히톤에게 응전토록 하였다. 그래서 에크, 파베르, 코흐레우스 등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은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서에 대한 반박서’(Confutatio Confessionis Augustanae)를 제출하였고 그해 8월 3일에 채택케 하였다. 그래서 멜란히톤이 제출한 신앙고백서와, 로마 가톨릭측이 제출한 반박서를 중심으로 타협을 시도한 것이다. 그러나 타협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사실 멜란히톤은 타협의 길을 모색하여 루터파와 로마 가톨릭파의 다른 점은 미사에 있어서 독일어를 사용하는데 불과한 극히 작은 것이라고 보는 데까지 이르렀고, 교황권 자체를 승인하려는 데까지 타협적이었다. 반면에 루터는 교황이 그의 지위를 폐지하지 않는 한 그와의 평화를 도모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고 보았다.
결국 제국회의는 1530년 11월 회의를 끝내면서 로마 가톨릭측이 제출한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에 대한 ‘반박서’를 교회의 공적인 대변서를 받아들이고, 프로테스탄트에 대해서는 루터와 그 추종자들을 이단으로 정죄했던 1521년 보름스 제국회의에서 결정을 재확인하는 것으로써 신·구교간의 문제를 종결지었다. 다시 말하면 루터파의 지도자들에게 로마 가톨릭으로의 복귀를 요구한 것이다. 그러나 헷세의 필립, 작센의 요한, 브른스빅-루네부르크의 에른스트 등은 이 명령에 불복하였다. 멜란히톤은 한때 로마 가톨릭과의 타협을 시도하였으나 타협이 결렬되자 다시 루터주의의 신학입장을 강하게 변호하였다. 그것은 코부르크에 와 있던 루터의 영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멜란히톤은 그가 작성한 신앙고백서를 변증하는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 변증서’를 1531년 5월 라틴어로 출판하였다. 독일어로는 그해 가을에 출판되었는데, 이 변증서는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에 대한 신학적인 해설서로서 신앙고백서보다 4배나 많은 분량이다.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서를 제출할 때만 해도 로마 가톨릭과의 타협을 희망하였고 고백서 마지막 부분에서 이 점을 밝히고 있으나 이러한 희망이 좌절되자 변증서에서는 현실을 시인하고 프로테스탄트의 입장을 보다 분명히 천명하고 있다. 이를테면 신앙고백서에서는 침묵을 지켰으나 변증서에서는 교황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했고 7성례에 대해서도 강도 높은 비판을 가했다.
황제는 제국회의를 마감하면서 프로테스탄트들에게 항복을 요구하고 1531년 4월 15일까지를 시한으로 결단을 촉구하였다. 그렇지 않을 경우 무력행사를 불사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프로테스탄트들은 또 한 번의 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만일 황제가 스페인 병력과 독일내의 로마 가톨릭을 지지하는 영주들의 군대를 동원한다면 프로테스탄트를 지지하는 영주들은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루터주의를 지지하는 영주들은 동맹을 맺지 않을 수 없었다. 루터는 이 문제에 대하여 오랫동안 고민하였다. 그러나 황제에 대항하여 정당방위로써 무력을 사용하는 것은 합당한 일이라고 결론짓고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하여 프로테스탄트 영주들은 소위 쉬말칼텐동맹(League of Schmalkald)을 체결하였다. 이번에도 정치적 변화는 루터파에게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이미 1529년 9월 비엔나를 공격했던 터키군은 이전의 실패를 설복할 기회를 찾고 있었고 터키인들의 발칸 진입을 저지하는 일은 제국의 가장 긴박한 과제였다.
프랑스왕 프란소 1세도 다시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처럼 강력한 대항세력에 적절히 대처하기 위해서는 프로테스탄트의 지원이 필요했으므로 황제는 1531년 7월 23일 뉘른베르크 평화회의(The Peace of Nürenberg)를 통해 프로테스탄트와의 ‘휴전’을 체결하였다. 그래서 아우그스부르크 제국회의에서의 황제의 시한부적 항복요구는 일단 유보되었고 그 대신 프로테스탄트들은 터키에 대항하여 황제를 지원하기로 약속한 것이다. 이제 루터주의는 새로운 정치적 변화 속에서 여러 지역으로 확장되어 갈 수 있었다.
그리하여 독일을 중심으로 하여 스칸디나비아 반도지역으로 확산되어 갔고 교회개혁을 통해 나타난 양대 교파의 하나인 루터파교회로 발전되어 갔다. 1517년 교회개혁이 시작된 후 30년간 개혁의 최전선에 서 있던 루터는 1546년 2월 18일 아이스레벤에서 6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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