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정치

'만인제사장'에 대한 이해

Sola. 2023. 5. 26. 07:00

 

'만인제사장'에 대한 이해

장대선 목사 (2020.5.28)

최근까지 소위 ‘평신도신학’을 강조하는 일부 교파들과 이를 무분별하게 혼용하는 일부 장로교인들 가운데서 ‘만인제사장’(Universal priesthood)을 근거로 하여, 개신교 현실의 문제점에 대한 대안을 주장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리고 그러한 주장들에서는 흔히 ‘평신도’라는 용어를 전혀 문제의식이 없이 사용하는 것을 찾아볼 수가 있다. 하지만 ‘평신도’(the laity)라는 영어는 로마 가톨릭교회나 루터교회 혹은 성공회와 같이 수직적이고 위계적인 직제의 체계를 지지하는 교파들에서나 사용할 수 있는 용어로서, 만인제사장의 개념을 언급하면서는 결코 동시에 사용할 수 없는 용어다. 그러므로 만인제사장을 근거로 개신교 직제를 부정하면서 대안으로 평신도 신학을 주장하는 것은, 이미 용어사용에서부터 만인제사장에 대한 부정확한 이해와 혼란스런 인식을 스스로 입증해 보이는 일이다.

 

★ 몽테스키외(Montesquieu, Charles De, 1689-1755)가 1748년에 제네바에서 익명으로 출간한 '법의 정신'은 서구사회에서 최초로 삼권분립의 개념을 정의한 책으로 알려져 있다.

기본적으로 로마가톨릭의 수직적이고 위계적인 직제에 대한 거부를 바탕으로 하는 종교개혁의 신학과 개혁된 교회들의 직제는 수평적이며 기능적(혹은 수종적)인 것인데, 잘 아는바와 같이 영국에서부터 잘 발달하기 시작한 근대 민주주의 삼권분립(separation of legal, administrative, and judicial powers)의 정치원리는 바로 종교개혁의 직분체계에 있어서 각 직분의 동등성을 아주 잘 정립하고 있는 장로교의 교회정치원리의 영향을 받은 것이기도 하다. 아울러 종교개혁을 바탕으로 개혁되고 갱신된 교회들의 직제론에 있어서 만인제사장의 이해는 제사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없이는 개념지울 수 없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Incarnation)과 십자가에 달리신 구속의 성취(Crucify) 이후로, 구약시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유대교의 제사와 제사장 제도가 모두 폐기된 것이라는 이해를 바탕으로 해서만 만인제사장의 정확한 이해가 가능한 것이다.

사실 이러한 개념을 가장 적극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성경본문은 히브리서 본문인데, 히브리서는 기본적으로 유대교로 돌아오라는 회유에 직면하여 흔들리는 히브리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유대교의 제사장과 제사제도가 모두 폐지되었음을 확신하도록 하는 사도의 권면으로 되어 있다. 만일에 그들이 유대교의 회유에 흔들리고 만다면, 그들이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히 3:1)”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히 6:6)” 하는 패역을 범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 제사장과 같이 ‘중보’(Mediation)의 사역을 하는 인간 직분도 완전히 폐지되었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중보로 해서만 신앙과 믿음이 가능한 것을 굳게 붙들도록 히브리서의 사도는 강력히 권면한다.

​사실 제사와 관련한 이러한 성경적 이해는 종교개혁 이후의 개혁된 교회들이 왜 ‘미사’(missa)가 아닌 ‘예배’(worship)를 드리는 지에 대한 근거로서, 종교개혁 이후의 교회들의 신앙에 있어서 예배는 제물의 봉헌과 제사장의 수납을 통해 이뤄지는 제사가 아니라 말씀(성경)과 설교자(성경의 교사)가 중심을 이루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종교개혁의 신앙유산은 ‘성찬’에 있어서도 로마 가톨릭교회와 확연하게 구별되는데, 로마 가톨릭교회의 ‘화체설’(transubstantiation)과 달리 우리들은 ‘영적임재’(spiritual presence)를 바탕으로 한다.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속성의 교류’(communicatio idiomatum)-그리스도의 참 하나님의 본성과 참 인간의 본성간의 교류-라고 하는 신학이론을 통해서 로마 가톨릭교회의 화체설과 간격을 벌리면서도 결과적으로는 대동소이한 맥락 가운데 머물러 버렸으나, ‘영적임재’를 바탕으로 하는 개혁교회들의 성찬에 대한 이해는 그러한 맥락과 확실하게 구별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영적임재에 있어서 한 가지 유의할 것은, ‘영적’(spiritual)이라는 말의 중심에 ‘성령’님이 계심과 아울러, 그 성령께서는 말씀의 영이시기 때문에 항상 성찬예식 자체로서만이 아니라 성찬에 관련한 성경말씀과 강설을 통한 정확한 성찬론(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의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의미에서 임재 하신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개신교의 성찬은 제사 드리는 ‘사제’(priest)가 아니라 말씀의 교사이자 목자인 ‘목사’(‘pastor’ or ‘minister’)에 의해 집행된다. 그리고 그러한 직분으로서의 사제와 목사의 차이는 곧 제사장적이며 수직적인 직제인 사제 제도와, 말씀교사 혹은 목회자로서 직능(functional)적이며 수종(service)적 직제인 목사 제도의 차이로서 극명하게 구별된다.

그러므로 소위 ‘평신도 신학’을 강조하는 분들의 주장에서 오해하는 부분이 바로 이러한 부분으로서, 평신도 신학의 취지로 보건데 ‘평신도’라는 용어는 함께 사용할 수 없음과 아울러 목사와 성도인 신자들이 동일한 역할을 수행한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도 없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사도바울이 설명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고전 12:28)” 이를 바탕으로 목사와 직분자(장로, 집사)들이 분명하게 구별되는 가운데서 수종적으로 그 직능을 수행하는 점에서 동일할(수평적일) 뿐인 것이다. 아울러 ‘수종’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직제에 있어 중요한 것은 자신이 수종하는 직능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를 성경 가운데서 반드시 알아야만 한다. 왜냐하면 거의 모든 현대 개신교의 문제점들이 바로 이러한 직분과 직능에 대한 구별에 대한 무지와 오해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만인제사장을 주장하며 평신도신학을 강조하는 분들의 문제의식은 거의가 다 이러한 직분과 직능에 대한 이해를 결여하고 있다. 따라서 바로 이러한 정확한 이해와 개념이 없이 생각하는 개신교에 대한 문제의식은 당장에는 통쾌하고 명쾌한 대안인 듯 보이지만, 결국에는 더욱 큰 문제를 야기하며 해결해야 할 사안들을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혼란만 초래하고 말 것이니, 바로 이 점에서 장로교회의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은 거의 유일한 대안이라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치리하는 장로가 자유롭게 예배의 설교를 수행할 수 있다고 주장하거나 교회의 치리회인 당회와 같은 회의의 의장(moderator)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경우, 혹은 집사들도 자유롭게 당회의 회의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만인제사장의 원리에서 도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유일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서, 치리하는 장로는 치리하는 직능을 다른 직분의 직무와 구별되게 수행하며, 말씀의 사역자인 목사는 기도하며 말씀을 가르치고 설교하는 일뿐만 아니라 그 말씀을 따라 치리하는 일을 치리장로들과 더불어 수행하되(행 6:4), 서로 높은 자리를 고집하지 않고 같은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 존중하는 것이 바로 만인제사장의 원리다. 마찬가지로 집사의 직무 또한 교회의 재정과 봉사(섬김)과 관련한 직분으로서 동등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니, 바로 그 같은 원리로 세워진 교회의 질서(church order or government)야 말로, 개혁된 교회에 필요한 ‘Jus Divinum’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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