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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창조
김병훈 교수 / 화평교회, 합신 조직신학 교수 (2013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4장 1항
“태초에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원한 능력, 지혜, 그리고 선하심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무로부터,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보이는 것이든지 보이지 않는 것이든지 모든 것을, 6일 동안에 창조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들은 심히 좋았습니다.”
1항에서 교훈하는 것은 이러합니다.
첫째, 이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입니다.
둘째, 창조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사역입니다.
셋째, 하나님은 창조의 일을 자신이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자유롭게 행하셨습니다.
넷째, 창조는 영원한 능력과 지혜, 그리고 선하심을 지니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것입니다.
다섯째,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무로부터 창조하셨습니다.
여섯째, 하나님께서는 6일 동안에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끝으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들은 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습니다.
이러한 교훈들에 대해서 지난 호에 이어 다섯째 내용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섯째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무로부터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명령을 발하심으로써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3).
‘무에서의 창조’(creatio ex nihilo)라는 말이 뜻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창조의 원인이 될 뿐이며, 하나님 이외의 다른 어떤 물질이 ‘나타난 세계’의 원인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어떤 이들은 ‘어떤 것도 무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ex nihilo nihil fit)는 명제를 들어 ‘무에서의 창조’를 비판하기도 합니다. 어떤 일이라도 그것이 발생하려면 그것으로 하여금 그렇게 존재하게 한 어떤 것이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에, 이 세계도 이 세계가 나타나기 이전에 이 세계를 존재하게 하는 원인으로서의 물질이 먼저 있어야 한다고 주장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우선 ‘어떤 것도 무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명제가 의미하는 바는 ‘원인이 없는 결과란 없다’는 것임을 유의하여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 명제는 질료적 원인으로서 물질이 창조 이전에 이미 존재하여야 한다는 원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에서의 창조’를 말할 때 그것은 이 세상이 어떤 원인도 없이 창조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이 창조의 유일한 원인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것도 무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명제는 결코 ‘무에서의 창조’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무에서의 창조’는 두 가지 내용을 말합니다. 하나는 아무 것도 없는 것에서 무엇인가를 존재토록 하시는 일이며, 또 다른 하나는 존재하도록 만든 그것으로부터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만드는 일입니다. 혹자는 이 가운데 전자의 경우는 ‘무에서의 창조’라고 할 수 있겠지만, 후자의 경우는 이미 존재한 물질로부터 만들어진 것이므로 이를 ‘무에서의 창조’라 말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고 주장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잘못입니다. 왜냐하면 ‘무에서의 창조’를 말하는 것은 전자의 경우처럼 하나님께서 오직 명령만으로 존재하지 않았던 어떤 것을 존재하도록 하신 사실을 말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후자의 경우처럼 물질 그 자체는 무엇인가를 만들어 낼 수가 없는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가지고 이 세상과 그 안에 가득한 것들을 만들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질은 세상과 세상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나타나 있는 바대로 그렇게 나타나도록 하는 능력을 그 자체 안에 가지지 못합니다. ‘무에서의 창조’는 이처럼 물질 자체의 무능력을 말하면서, 이처럼 물질을 사용하여 오늘에 보는 바와 같은 세계와 그 안에 있는 것들로 하여금 나타나도록 한 창조는 바로 오직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여섯째로 4장 1항의 신앙고백은 하나님의 창조와 관련하여 ‘6일 동안의 창조’를 고백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가장 먼저 유의하여야 할 점은 창세기 1장은 단지 종교적 진리만을 교훈할 따름이지 과학에 대한 사실을 언급하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입니다.
이러한 주장은 성경을 도덕과 윤리와 미학과 종교라는 주관적 영역에 가두어 버리고, 오직 과학만을 자연에 대한 설명과 같은 객관의 영역의 주인으로 삼게 됩니다. 그리하여 성경에게서 창조에 대해서 발언권을 빼앗아 버립니다. 이러한 주장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말할 것도 없고 성경에 기록된 수많은 기적의 사건들을 객관적으로 인정될 수 없는 주장으로 만들어 버리게 됩니다. 이것은 성경에 대한 매우 잘못된 접근입니다.
성경은 자연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와 간섭을 분명하게 교훈합니다. 성경적 교훈에 합당한 과학은 이적을 배제하지 않는 과학이어야 합니다. 창세기 1장은 단지 이 세상이 창조되었다는 종교적 주장을 말하고 있을 뿐이며, 창조된 세계를 이해하는 모든 기준과 판단에 대해서는 오직 과학만이 말해줄 따름이라는 주장은 성경과 과학에 대해서 각각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창세기 1장에 기록되어 있는 ‘6일 동안의 창조’에 대한 해석과 관련하여 다양한 주장들이 개진되어 왔습니다. ‘간격’(Gap)이론은 창세기 1장 1절과 2절 사이에 광대한 시간의 간격이 있었으며, 이로 인하여 지질학적으로 지구의 연대는 오래된 것으로 나타난다고 말합니다.
이 주장은 2절에서 말하는 바가 하나님께서 행하신 첫 창조가 그만 ‘혼돈하고 공허하게 변하여 버렸다’를 뜻한다는 해석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2절의 말씀은 처음의 창조가 ‘혼돈하고 공허한 상태였음’을 뜻하는 것이지, 본래 그렇지 않았던 것이 그렇게 변하여 버렸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 해석은 인정할 만한 정당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합니다.
어떤 이들은 6일 동안의 각 날은 그 사이에 긴 기간이 존재한다고 주장을 합니다. 그러나 창세기 1장의 흐름은 하나님께서 6일 동안에 걸쳐서 창조의 사역을 마치시고 안식하셨음을 말합니다. 이러한 흐름은 바로 이스라엘이 6일 동안 일을 하고 하루를 안식하는 삶의 형태를 명령하는(출 20:8-11) 신학적 이유가 됩니다.
하나님의 창조와 이스라엘의 안식의 주기 사이의 이와 같은 유비는 각 날들이 연속적으로 간격이 없이 연결이 되는 것임을 말해 줍니다. 특별히 첫째, 둘째, 셋째 등으로 이어지는 날의 계수는 각 날 사이에 시간의 커다란 간격이 있지 않음을 말해줍니다. 만일 어떤 오랜 시간의 간격이 있다면 첫째 날 이후에 많은 날들이 지나고 나오는 날을 가리켜 둘째 날이라 일컬을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이는 ‘6일 동안의 창조’는 하나님께서 실제로 창조하는 데에 사용하신 기간이 아니라, 모세가 하나님의 창조의 사역에 대한 계시를 받는 시간이라고 해석을 합니다. 그러나 창세기 1장의 본문은 이러한 해석을 지지해줄 아무런 근거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안식일과 관련한 일주기의 명령은 하나님의 사역과 쉼을 반영하는 명령이지, 모세가 계시를 받은 날을 모방하는 명령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이는 ‘날-시대’(Day-Age) 이론을 주장합니다. 이것은 ‘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욤’(탗)이 24시간의 하루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문맥에 따라서 밤과 대비되는 낮 기간을 가리키거나, 특별한 성격을 갖는 어떤 시간의 간격을 가리키기도 하며(습 1:14-16), 또는 불특정한 기간을 가리키기도 한다는 점을 고려한 주장입니다(창 19:37, 습 3:11).
창세기 1장 5절(하루 밤낮 주기)과 창세기 2장 4절(천지를 창조한 특별한 성격의 때)은 서로 다른 ‘날’의 의미로 사용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각 날에 첫째, 둘째, 셋째 등 숫자가 덧붙여져 있으며, 각각의 날이 또한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라는 표현과 연결이 되어 나오고 있다는 사실은 각 날이 통상적으로 저녁과 아침으로 이루어진 24시간의 하루를 뜻한다는 판단을 강하게 지지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출애굽기 20장 11절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는 말씀에 의해 강력하게 지지를 받습니다. 따라서 ‘날-시대’(Day-Age) 이론은 해석의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합니다.
다른 어떤 이는 창세기 1장과 2장을 문학적 관점에서 읽을 것을 요구하는 ‘구조이론’(framework theory)을 주장합니다. 이 견해에 따르면 창세기는 세계가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말할 뿐, 창조와 관련한 시간의 길이나 순서 그리고 방식에 대해서는 말하여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6일의 ‘날’은 문자적으로 24시간 하루가 아니며, 단지 첫 날과 넷째 날, 둘째와 다섯째 날, 셋째와 여섯째 날의 짝으로 상호연결이 되는 문학형식의 수단일 뿐입니다.
이러한 문학형식을 통해서 하늘의 공간, 바다, 마른 땅과 같은 세 영역들의 창조가 첫 날부터 셋째 날까지 제시가 되고, 이어서 공간에는 해, 달, 별들이, 바다에는 물고기와 새들이, 마른 땅에는 동물과 사람들처럼 각 영역의 지배자 또는 왕들에 대한 창조의 언급이 넷째로부터 여섯째 날까지 연결이 되고 있다고 주장을 합니다.
더 나아가 ‘구조 이론’은 창세기 1장의 하늘과 땅의 창조를 보이지 않는 세계와 보이는 세계의 창조로 말하며, 전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거하실 곳과 천사들을 위하여 만드신 영적 영역이며, 후자는 보이는 물리적인 세계를 가리킨다고 말합니다. 이 때 전자는 후자의 원형이며, 후자는 전자의 모형의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해에 따라서 이들은 창세기 1장의 ‘6일 창조’의 이야기는 보이지 않은 천상의 영역의 창조에 대한 모형으로서의 보이는 물리적 세계의 창조를 말하는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따라서 ‘6일의 창조’는 하늘의 영역에서의 ‘한 주 - 6일 노동’이라는 창조의 틀을 반영한 것일 뿐, 물리적인 시간으로서의 ‘6일’과는 상관이 없으며, 단지 앞서 말한 바대로의 주제별로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이 상호 연결된 문학적 표현일 뿐이라고 주장을 합니다.
‘구조 이론’의 최대의 약점은 창세기의 1장과 2장을 역사적 사실에 대한 계시로 보지 않는다는 점에 있습니다. 주석적 관점에서 창세기 1장과 2장을 문자적 의미에 따른 역사적 사실로 보는 것은 훌륭한 해석이라는 점을 인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앞서도 지적한 바처럼 ‘날’이라는 말이 순서에 따라 연속적으로 이어져 나오는 흐름은 각 날이 서로 구별이 되고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이것은 ‘하늘의 공간’을 창조한 첫째 날과 그것의 지배적인 왕으로서의 ‘해와 달과 별들’을 창조한 넷째 날이 서로 동일한 날로 해석하는 ‘구조 이론’에 대한 강한 반론을 줍니다.
‘구조 이론’은 일곱째 날의 안식은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말이 없으며, 또한 24시간이 아니라 끝이 없이 긴 시간을 가리킨다는 점에 강한 논거를 의지합니다. 그 이론에 따르면 일곱째 날이 영원한 시간인 만큼, 다른 6일 동안도 24시간일 수가 없으며, 따라서 ‘6일 창조’는 문자적 24시간이 아니라 비유적인 시간들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곱째 날에 ‘저녁-아침’의 표현이 생략이 된 것은 더 이상 창조의 사역을 이어가지 않으시고 이미 여섯 날로 완성이 되었으므로 새롭게 덧붙일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 안식의 일곱째 날은 한 주간의 마지막으로 그 날로 한 주가 완성이 되었기 때문에 이어지는 다음 날과의 구별을 위해 ‘저녁-아침’의 구절이 덧붙여질 필요가 없습니다.
일곱째 날도 앞의 여섯 날과 마찬가지로 하루의 날이었을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안식이 영원하다면 그것은 일곱째 날 이후에 그러한 것이므로, 굳이 일곱째 날을 영원한 날로 주장을 하며, 이에 근거하여 앞의 여섯 날도 비유일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정당한 해석적 적용이 아닙니다.
더욱이 ‘구조 이론’은 창조의 방식에 관하여 ‘자연섭리’를 말합니다. 즉 오늘날 경험이 되고 있는 자연의 질서 과정을 따르는 통상적인 방식으로 이러한 것들이 창조되었다고 말합니다. 창세기를 연대기적 시간 개념을 배제하고 문학양식으로 읽는 ‘구조 이론’은 유신론적 진화론자들(theistic evolutionists)이나 점진적 창조론자들(progressive creationists)들에 의해서 지지를 받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1장은 ‘6일 창조’를 말하면서 하나님에 의한 직접적인 특별 창조를 말합니다.
1절은 하나님의 창조를 특별히 선언하며, 2절 또한 성령 하나님께서 창조된 세계를 보존하고 또한 창조를 이끌어 가는 초자연적 사역을 행하심을 나타내 보입니다.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또한 모든 세계를 지으셨다고 할 때(요 1:3, 히 1:2), 그 말씀들은 일반 섭리에 의한 것이 아니라 바로 특별한 섭리에 의한 직접적인 창조를 뜻하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창세기 1장에 기록되어 있는 ‘6일 동안의 창조’에 대한 가장 정당한 해석은 종교개혁자들의 해석학에 따라 본문의 명백한 의미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24시간의 6일 동안에 창조하셨다는 해석입니다. 이 해석을 부정하려면 앞에 예시한 여러 해석들처럼 그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참으로 어렵고도 복잡하면서도 확신을 주지 못하는 해석의 절차들을 따라가야 합니다. 반면에 이러한 해석들과 달리 ‘24시간-6일 동안’의 창조는 창세기 1장을 성경 자체만으로 해석할 때 가장 분명한 해석입니다. 신앙고백서는 성경에 있는 대로 ‘6일 동안의 창조’를 믿을 것을 교훈합니다.
어떤 이들은 ‘6일 동안’의 창조론은 현대과학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를 말해주지 않는다고 불평을 합니다. 현대과학은 오랜 지구의 역사를 말합니다. 따라서 어떤 이들은 6일 창조론으로 인하여 성경이 믿을 수가 없는 것이라는 불신앙을 조장할 따름이라고 비판을 합니다.
그러나 현대과학 이론은 여전히 수정을 겪고 있으며, 또한 이 세계의 창조의 연대와 관련하여서는 많은 점에 있어서 의문을 해소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구가 오래되었다는 주장은 현대의 주류 과학이론에 의해서 지지를 받고 있지만 아직 진리로 확정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성경의 진리와 자연의 진리는 둘 다 하나님의 진리이므로 모순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의 창조와 관련한 해석들 가운데 ‘6일 동안’의 창조론을 제외한 거의 모든 것들은 현대과학의 주장을 자연에 대한 확정적 진리로 인정을 하고, 그것에 따라서 성경의 해석을 조정하려는 노력의 결과물들입니다. 그러나 지구의 창조와 연대에 관한 현대과학의 주장들을 진리로 확정을 하기에는 아직도 너무나 많은 의문점들이 풀리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주장을 준거로 하여 ‘24시간-6일’ 창조론을 버리는 것은 지극히 경솔한 성경 해석적 태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현재로서 가장 적절한 해석은 하나님께서 ‘24시간-6일 동안’에 성숙한 우주를 창조하신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지구의 나이가 오래 된 것으로 여겨지는 것으로 판단이 되는 관찰이 나타나면 그것은 성숙한 지구를 만드신 까닭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반면에 지구의 나이가 오래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는 관찰이 나타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6일 동안의 창조를 마치신 때가 그렇게 오래되지 않은 까닭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이 때 주의할 점은 성숙한 지구의 나이가 얼마만큼의 나이를 가진 지구인지는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아담은 성숙한 성인으로 창조가 되었을 것입니다. 창조 때의 아담의 나이가 얼마나 되었을 것인지는 아담의 자손들의 성장을 통해 확인을 할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주의 창조는 그러한 반복을 통해 초기 창조의 상태가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란 하나님께서 창조를 6일 동안 하셨음을 믿고, 그러한 창조의 시점이 얼마나 오래 된 것인지를 성경과 과학적 연구를 통해 살펴보면서, 아울러 하나님께서 창조 초기에 이미 우주를 일정한 정도로 성숙한 상태로 만드셨음을 기억하면서, 성경해석과 과학의 관찰의 노력을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와 권능의 영광을 찬송하는 일입니다.
끝으로 신앙고백서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들은 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음을 천명합니다. 이러한 선언은 창조에 대한 하나님의 긍정적인 평가를 분명히 드러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만드신 세계가 창조 처음에는 어떤 악이나 죄가 없었음을 명백히 합니다.
성경이 이 세상이 악하다고 말할 때 그것은 이 세상이 처음부터 그러했던 것이 아니라 단지 죄로 말미암아 타락하고 오염이 되었기 때문이며,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저주 아래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얼마나 오랜 시간 전에 창조가 이루어졌는지를 답하는 앞선 질문과 매우 밀접한 연관을 갖습니다.
동물의 화석들이 긴 연대를 증거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수 많은 동물들의 죽음이 있는 세상이 그토록 오랜 동안 있어 왔다는 것을 가정하는 것인데, 그러한 세상을 가리켜 성경이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실 수 있는 것일까? 동물의 죽음은 사람이 타락한 이후에 결과적으로 나타난 것이 아닌가? 만일 사람의 타락 이전에 동물의 죽음이 있었다면 사람의 타락은 오직 사람에게만 죽음의 저주를 결과한 것인가? 또 소위 사람 이전의 많은 종류의 유인원들이 있었다면 사람은 오랜 세월의 유인원들의 죽음을 통해 창조된 것이며 그 후에 또한 완성된 사람은 죄로 인하여 자신의 죽음을 다시 초래하게 되었단 말인가?
이러한 죽음의 문제에 대해 긴 연대설은 어떠한 이론들이라 할지라도 신학적으로 커다란 문제점들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긴 연대설을 따르는 새로운 답변이 앞으로 주어질 가능성이 없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현재로서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신 것은 악과 고통, 그리고 죽음의 문제를 고려할 때 ‘24시간 6일 창조’의 해석이 신학적으로 가장 적절하다는 것을 성경적으로 지지해줍니다.
출처: http://rpress.or.kr/xe/94932
https://m.youtube.com/@osola24 Osola (유튜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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