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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 (시편찬송으로의 한정) (오디오 지원)

Sola. 2024. 4. 10.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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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kExtCQtyCMA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 (시편찬송으로의 한정)

 

'공적인 예배에 합당한 노래에 관한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미국 정통장로교회(OPC) 총회(제13-14회) 공적예배에서의 '노래'에 관한 보고서

 

​장대선 목사 (2020.12)

 

 

미국의 정통장로교회 제11회 총회의 위원회 위임을 시작으로, 이미 ​1940년대로부터 하나님께 대한 공적인 예배에 합당한 노래로서의 찬송가에 관련한 심각한 양분이 있었음을 이후의 제14회 총회의 위원회 보고서 가운데서 분명하게 확인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양분을 간단히 정의하자면, 성경에서 예배의 노래로 공히 언급되어 있는 150편의 시편서 바깥으로 나아가려는 ‘원심력’centrifugal force과, 150편의 시편서에 한정하는 ‘구심력’centripetal force의 양상이라 하겠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미국의 정통장로교회에서조차 제14회 총회에서의 “하나님께 대한 공적인 예배에서의 노래에 대한 소위원회의 보고서” 이후로, 시편을 향한 구심력은 감소하고 원심력이 더욱 강하게 작용하는 변화를 거스르지 못하는 실정이다. 특히 한국의 경우에는 애초에 구심력을 잃어버리고 원심력의 양상으로 모든 예배의 노래들이 진전되어 왔기 때문에, 구심력을 형성하기가 여간 어려운 현실이다. 특히나 현대modern의 실질적인 시작이라 할 수 있는 1950년대 시작을 앞둔 1940년대 말의 마지막 정통주의 장로교회의 구심력을, 현재contemporary의 우리들이 확인해 볼 수 있는 것이 이 글의 의미이자 취지일 것이다.

 

 

사실 공적인 예배에서의 노래로서 시편을 사용하는 문제는 결코 작은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장로교회의 예배의 원리인 ‘규정적 원리’를 가장 단적으로 실감할 수 있을 만큼 중요한 현안이 바로 시편송의 사용이다. 하나님께서 성경에 명시적으로 규정하신 바에 대해서는 그대로 따르되, 성경에 명시적으로 규정하시지 않은 바에 대해서는 자율적인 판단을 허용하는 규범적 원리와 다르게, 장로교회의 예배의 원리는 하나님께서 성경에 명시적으로 규정하신 바에 대해서는 그대로 따르되, 성경에 명시적으로 규정하시지 않은 바에 대해서는 금하는 것의 생생한 현안이 바로 공적인 예배에서의 노래로서의 시편의 한정인 것이다.

 

 

얼핏 ‘구심력’이란, 공적인 예배에서의 노래를 기도와 같은 것으로 여기는 가운데서도 발생하는 것처럼 생각될 수 있을 것이다. 즉 하나님께로 향하는 기도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로 향하는 노래 또한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구심력의 양상이 아닌가 생각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구심력이란 바깥에서 안으로 향하려는 힘이 아니라 안에서 붙잡는 것이듯, 구심력과 같은 예배의 노래 또한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말씀에 한정하는 것을 일컫는다. 그러므로 그러한 구심력이란 애초에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것이라 할 것이지, 우리들 스스로 생각하고 규정하는 양상이 아닌 것이다. 우리가 자유로이 예배에 합당한 노래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노래에 애초에 한정되는 것이 바로 구심력으로서의 예배의 규정적 원리인 것이다.

 

 

태초에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류의 대표로서의 조상들에게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 2:16-17)고 하시어, 하나님께서 명하신 말씀에 머무르도록 명하신 것을 볼 수가 있다. 그 때에 선이라는 것은 그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머무르는 것이요, 악은 그 명령의 말씀에 머무르지 아니하고 스스로의 안목과 욕심에 끌려 행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나무의 열매를 금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넘어서서 오히려 그 열매를 취했을 때에, 죄와 악이 첫 조상들을 통해 모든 인류에게까지 퍼지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롬 5:12절에서 사도는 이르기를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는 창 2:17절 말씀에 순종하며 머무르지 않고 넘어갔을 때에, 죄와 죽음이 사람에게 이르게 된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을 행하고,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을 금하는 율법의 원리, 즉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구심력’은, 이미 창 2:16-17절의 말씀 가운데서 온 인류의 대표인 첫 조상들에게 제시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머무르지 않고 넘어가서 행한 범죄The Original Sin 이후로, 타락하고 부패한 인류의 첫 조상들과 그 허리에서 나온 모든 인류는 하나님의 말씀에 머무르기를 싫어하고, 스스로의 지혜를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 밖으로 향하는 ‘원심력’에 끌려 다니는 노예와 같은 본성 가운데 살아간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없다며 부인하는 자들은 아예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을 두지 않으며, 하나님을 인정하는 자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머무르려 하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규정하지 않는 것들 가운데서 자유로이 스스로의 지혜를 쫓아 행하는 ‘규범적 원리’the normative principle에 따라 예배하는 자들로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머무르려는 소수의 중생한 신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규정된 것들에 대해서는 규정된 대로,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규정되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는 스스로 금하고 더욱 말씀의 표준으로 한정하여 행하는 ‘규정적 원리’the regulative principle에 따라 예배하는 자들로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구별로 볼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정한 방식으로만 예배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기도의 내용 가운데서 자유의 실행을 보증한다. 함축적으로 그리고 신약 성경의 성도들의 승인된 예들 모두에 의해 그것은 또한 노래의 내용에 관한 주의와 함께 자유의 실행을 보증한다. 그렇다면, 노래의 내용은, 우리의 기도의 내용처럼, 성경의 참된 말씀에만 한정할 필요는 없다.”는 애매한 결론을 내리는 Marsden의 보고서가 아니라, “1. 성경에는 공적인 예배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할 때 영감을 받지 않은 인간의 작곡들을 사용하는 것에 대한 보증이 없다. 2. 영감 된 노래들을 사용함에 관한 명백한 권위가 있다. 3. 신성한 예배의 노래들은 그러므로 성경의 노래로 제한되어야만 하는데, 왜냐하면 그것들만이 영감을 받았기 때문이다. 4. 시편은 우리에게 성경의 권위를 가지는 종류의 곡들을 제공한다. 5. 우리는 그러므로 시편을 부르는데 있어서 신적인 인가와 승인을 확신한다. 6. 우리는 비록 다른 영감을 받은 노래들을 사용하는 것이 성경이 명백하게 부여하는 기본 원칙, 즉 영감을 받은 노래의 사용이 위배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다른 영감을 받은 노래들이 하나님을 예배할 때 부르도록 의도된 것인지 확신 할 수가 없다. 7. 영감 받은 다른 노래들의 사용과 관련한 불확실성을 고려하여, 우리 자신들은 시편에 국한하여야만 한다.”는 보고서를 제출한 John Murray와 William Young의 설명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바로 이러한 설명들과 이해들이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에 머무르려는 거듭난 신자들의 바른 예배의 맥락과 자세를 확신할 수 있는 세세한 원리들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즉 “시편과 찬미[찬송]와 신령한 노래”를 언급하는 엡 5:19절과 골 3:16절 말씀에 연계된, 공적인 예배에서의 노래에 관련한 일련의 연구와 보고의 내용들은, 단순히 예배의 한 부분에 대한 지엽적인 주제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머물러서 예배를 규정하려는 참된 신자들의 예배와 신앙의 원리를 실감할 수 있는 중요하고도 시급한 현안을 다루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비록 말씀 밖으로 넘어서려는 원심력은 자연스럽고, 이를 거슬러 말씀 안으로 돌아가려는 구심력을 얻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것이 우리의 신앙과 삶의 현실이지만,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된 하나님의 백성들은 오늘도 그러한 구심력을 얻으려, 혹은 얻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머무르기를 힘쓰는 자들임을 확신할 수 있기를 바란다.

 

 

출처: https://blog.naver.com/daleun71/222198630070

 

 

책 구입처:

https://search.shopping.naver.com/book/catalog/32489403745?query=%EC%8B%9C%EC%99%80%20%EC%B0%AC%EB%AF%B8%EC%99%80%20%EC%8B%A0%EB%A0%B9%ED%95%9C%20%EB%85%B8%EB%9E%98&NaPm=ct%3Dlm5t3qww%7Cci%3D332f8eb9c4eb47b2fd35467174caaec376029f11%7Ctr%3Dboksl%7Csn%3D95694%7Chk%3D6c5d917c96b29b2ab617e69e0045a14c2a631a2d

 

 

<시편찬송을 부를 것을 명시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647년판 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