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서 본 장로 직분
임경근 목사 / 다우리교회 (개혁정론 2016.1.26)
1. 초대교회: 장로 직분의 원리
장로들(목사와 장로)의 모임인 ‘장로회’(presbyterion, 당회)는 성경에 나온다(딤전 4:14 “장로의 회”). 사도행전의 예루살렘 회의(행 15장)도 장로들의 모임인 것으로 보인다. 성공회 성경 신학자인 라이트푸트(J. B. Lightfoot)도 장로교회가 신약교회에서 가장 유행하던 것이었음을 인정했다.
초대교회가 장로교 정치원리에 따라 다스려졌다는 것은 역사적 기록을 통해서도 증명된다.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 of Rome, 약 96년)가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장로회’를 계속 유지하도록 권면한 것에서도 분명하다. 사실 신약 성경 안에 ‘장로’(presbyteros)가 ‘감독’(episkopos)이라는 이름으로 교차해 사용된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이점을 클레멘트도 인정했다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Ignatius of Antioch, 약 107년)도 두 용어를 구분하지 않았다. 비록 클레멘트와 이그나티우스에게 ‘감독’(Bishop)이라는 칭호가 주어졌지만, 현재 교회의 제왕으로 등극한 로마교회의 교황(감독)과는 달랐다. 그들은 단지 교회 지도자들에 이해 선택된 것일 뿐이다. 그들의 위치는 장로회의 ‘의장’ 혹은 ‘리더’였다. 초기 2세기에는 감독(주교)과 장로의 구분이 없고, 장로와 집사의 두 직분이 있었다. 4세기의 교부였던 암브로시우스(Ambrosius)와 제롬(Jerome)도 초대교회가 장로체제 였음을 인정했고 고위 성직자주의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시대가 지나면서 점차 ‘감독’과 ‘장로’가 하나의 직분에서 두 개의 직분으로 분리되기 시작했다. ‘감독’과 ‘장로’가 나눠지고 고착화 된 후 신학자들은 ‘감독’과 ‘장로’는 본래부터 다른 직분이었다고 고집했다. 그러면서 점점 두 직분이 하나에서 둘로 위계적으로 분리되었다. ‘감독’의 지위가 높아지면서 ‘장로’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낮아지게 된 것이다. 결국 장로는 낮은 지위의 성직 계급으로 전락한다. 집사 직분은 장로보다 더 낮은 직분으로 위계화 되었다. 이런 소위 ‘장로주의’에서 ‘사제주의’로의 변화는 3세기의 카르타고의 키프리안(Cyprianus of Cartago)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본다. 제국에서의 로마의 위치가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우위에 서게 되고 힘을 가지게 되었고 로마의 ‘감독’이 최고의 위치에 자연스럽게 서게 되면서 장로의 고유 역할이 사라지고 만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과 초대교회의 역사를 볼 때 옳지 않다.
2. 중세교회: 장로 직분의 변질
그래도 5세기까지만 해도 ‘여러 평등한 관계 가운데 첫 번째’(primus inter pares)라는 인식이 존재했다. 그러나 점점 경건하고 자질이 있는 자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영향력 있는 인물이 감독(주교)으로 뽑히는 상황이 전개 되었다. 이런 현상은 로마 제국의 정치적 관계와 맞물리면서 발전했다. 사제 가운데 ‘특별한 감독’이 생겨남과 동시에 초대교회에 있었던 ‘장로’ 직분은 변질되어 사제를 보조하는, 혹은 사제가 되기 위하여 거쳐야 하는 하나의 낮은 단계로 위계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렇게 장로의 직분은 평가 절하되고, 대신 감독의 지위는 성경의 뜻과는 달리 하늘 높이 높아져 그리스도의 대리 역할을 하게 되었다. 더 큰 도시의 주교가 작은 도시의 주교보다 더 높은 위치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상황이 중세 1천 년 동안 고착화되었다.
3. 종교개혁: 장로 직분의 회복
루터
루터(M. Luther, 1483-1546)는 계급적이고 비성경적인 로마교회의 직분관을 거부했다. 루터를 파면하고 출교시킨 로마교회는 이미 사단의 회가 되고 말았다. 루터는 교황이 보낸 파면장과 교회법전을 공개적으로 불태워 버렸다. 그의 그런 자세는 그의 교회관과 관련이 있다. 당시 눈에 보이는 로마 교회는 거짓되고 부패해 참 교회로 인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교회가 참 교회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곧 참 교회는 ‘구조와 법’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보이지 않는 ‘바른 말씀의 선포’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루터는 로마교회의 교회법을 인정할 수 없었다. 단지 ‘하나님의 법’만 교회에 존재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말씀이 선포되고 경청해야 하는 하나님의 법과 명령”만으로 충분하다고 보았다. 인간이 교회를 다스릴 수 없다고 보았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다스리시는데, 그 분은 왕이실 뿐만 아니라, 말씀의 왕(Wortkönig)이시다. 결론적으로 루터에게 교회의 다스림은 ‘말씀이 선포되는 것’ 더 이상이 아니었다. 그래서 루터가 작성한 아우구스타나 신앙고백(Confessio Augustana) 14조에 보면 “교회법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말씀이 선포되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한다.
믿음으로 예수님에게 접붙임 받은 진실한 그리스도인만이 참 교회를 형성한다. 교회법에 의한 강제가 아닌 자발적인 믿음의 순종만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운다고 보았다. 결국 말씀을 통한 복음 선포 주변에 교회의 모습이 드러난다. 목사의 설교가 보이지 않는 교회를 드러내는 가교 역할을 한다. 만인제사장적인 일반 성도의 직분관으로 만족하고 말씀의 담지자인 목사의 직분 이외에 장로직분을 살리지 않았다. 교회의 관리는 국가에 맡기고 말았다. 그래서 루터에게는 장로의 역할이 필요 없다.
하지만 1525년 농민전쟁 이후 교회는 혼란 속에 빠져 들어갔다. 루터가 생각한 것처럼 교회의 질서가 유지되지 않았다. 로마교회에서 분리한 교회들은 혼란스러웠다. 교회 성도들은 무지하고, 예배는 제 각각이고, 교회의 재산을 관리할 수 있는 규정이 없었고, 교회는 가난해 목사의 생활비를 줄 수 있는 여력이 되지 못했다. 루터는 정부 지도자에게 교회를 감독하도록 도움을 요청했다. 물론 일시적인 조치로 감독(Notbischof)을 요청한 것이었다. 목사는 말씀 선포에만 관심을 가져야지 다른 세상적인 잡다한 것에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는 이원론적인 생각이 강했던 것은 사실이다.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 “선제후가 우리의 유일한 감독이다.
감독 외에는 우리를 도울 자가 없다”(Der Kurfürst ist unser einiger Bischof, weil sonst kein Bischof uns helfen wil). 주 정부 통치자는 감독으로서 점점 교회의 권력을 가져갔고, 정부 조직처럼 ‘콘시스토리움’(konsistorium)라는 위원회를 만들어 교회를 통치했다. 결국 로마교회가 잡았던 교회의 권력을 주 정부가 가져간 격이 되고 말았다. 이 위원회는 신학자들과 법관들로 구성되었다. 물론 정부 관리가 이들을 임명했다. 국가가 교회의 법을 규정하게 된 것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이 위원회가 교회의 재정을 결정하고 설교 시간과 설교할 본문을 정해 준다. 물론 1536년에 루터가 만든 쉬말칼트(Schmalkald) 법에 의하면 정부의 역할은 교회를 돌보고 이단을 방지하는 역할만 한다고 말하지만, 국가 정부는 교회의 일을 결정하는데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르게 되었다. 그래서 독일 루터교회에는 ‘장로’와 ‘장로회’가 필요하지 않았다. 대신 ‘총감독’(Superintendent)이 등장한다. 총 감독은 위원회에 의해 임명되는데 목사의 교리와 행동을 감독한다. 그래서 결국 이들이 실제적으로 교회를 다스린다. 그들이 목사를 임명한다. 목사는 교회의 영적인 면만을 책임진다. 결국 루터교회는 교회법을 버린다고 했지만, 버린 것이 아니라, 로마교회에서 빼앗아 국가 정부에게 주고 만 것이다. 루터교회에 로마교회의 교회 법전이 되살아난 격이 되고 말았다.
칼뱅
칼뱅(J. Calvin, 1509-1564)은 루터가 시작한 종교개혁(이신칭의)의 터 위에 종교개혁을 이어갔다. 칼뱅은 이신칭의의 진리와 그리스도의 통치 위에 교회법적 측면의 토대를 놓았다. 그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이 장로정치의 회복이다. 그의 영향은 유럽 여러 교회에서 발표된 각종 신앙고백과 교회법에 나타난다. 성경이 제시하는 기본 지침이 교회의 틀을 만드는 기초가 된다. 그것은 신약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는 사도들이 제시한 질서와 일치해야 했다. 칼뱅은 전통을 중시하는 로마교회와 달리 모든 권위를 말씀에 두었다. 직분자와 성도를 교회의 주인이신 예수님에게 돌려 드리고 주님의 말씀과 성령이 교회를 통치하도록 했다. 하지만 칼뱅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스리는 수단을 무시하지 않는다는 점을 알았다. 곧 장로 직분을 통해 교회를 다스린다는 점을 알았다.
본래 칼뱅은 1536년에 쓴 [기독교 강요]에서 말씀의 선포자인 목사 직분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그가 구상한 목사의 직무(권징, 찬송, 교육, 결혼) 가운데 ‘권징’의 일은 시의회가 택한 시민(교인)의 생활을 감독하고 권징하고 목사를 보조하는 인물에게 맡겼다. 그들의 사역은 장로의 직임과 같았지만, 그 직임을 ‘장로’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그런데 1538년 제네바에서 반대파의 계략에 의해 추방되어 스트라스부르(Strasbourg)에 머물 때 부써(M. Bucer, 1491-1551)로부터 ‘장로 직분’에 대해 배웠다. 특별히 외콜람파디우스(J. Oecolampadius, 1482-1531)와 부써는 이미 1530년 경 교회의 권징을 위하여 일종의 ‘장로’(Kirchenpfleger)와 시 당국으로부터 독립된 ‘치리회’를 세워 교회를 다스렸다.
칼뱅의 장로 직분에 대한 변화는 1541년 제네바로 복귀한 후 만든 ‘교회법’(de Ordonances Ecclesiastiques)에 나타난다. 그 교회법에는 직분의 종류가 ‘목사’(pasteurs), ‘교수’(docteurs), ‘장로’(anciens), ‘집사’(diacres)로 나뉜다. 여기에 주목할 직분이 ‘장로’이다. 왜냐하면 그 이전에는 ‘장로’라는 직분이 교회에서 그 본연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역할은 이렇다. “각인의 생활을 살피고 범죄한 자들과 방종한 생활을 하는 자를 책망하며 필요한 경우 친절히 징계하기 위해 구성된 회에 보고할 것이며, 다른 분들과 함께 실제로 징계를 한다.”(OC, I 185-187)
칼뱅은 처음 12명의 장로를 세웠다. 2명은 25인 소위원회에서 뽑고, 4명은 60인회에서 선출하고 6명은 200인 회에서 각각 택했다. 칼뱅의 시대는 교회가 국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교회와 국가가 독립된 상황에서 교회의 선거를 통해 장로를 뽑는 것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다. 실재로 칼뱅은 당회의 권징권을 그의 사역 말년(1559)에서야 겨우 쟁취할 수 있었다는 점을 아는 것도 그 시대와 제네바 교회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칼뱅이 한 가장 큰 기여라고 한다면 로마교회의 교황과 사제들이 전유했던 교회의 다스리는 직분을 장로직분의 회복으로 개혁한 것이다. 물론 평신도를 직분의 위치로 다시 회복시킨 점도 큰 기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하튼 칼뱅은 성경에서 교회를 통치하는 직분이 장로에게 주어졌지, 주교나 교황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란 것을 발견하고 실천에 옮겼다.
모든 개 교회는 완전한 그리스도의 교회이다. 그렇지만 개 교회는 다수회(노회와 총회)의 결정에 복종한다. 칼뱅은 목사와 장로로 구성된 노회로 모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스위스는 너무 많은 자치구역으로 나뉘어 있었고 제네바는 너무 작았다. 제네바에 당회를 구성한 후 칼뱅은 목사들의 모임을 구성하긴 했지만 시찰이나 노회로 모일 수는 없었다. 칼뱅이 실천한 장로와 장로 정치는 오늘날 장로교회가 가진 모습과는 분명히 달랐다. 하지만, 그 중심 의미는 오늘의 장로 개념과 같다.
여러 나라들의 장로 직분
런던에서는 1570년 이후 네덜란드,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망명 온 성도들로 구성된 개신 교회들이 ‘노회 형태’로 모였다. 각 지역 교회가 스스로 결정하기 어려운 일들을 함께 의논했다. 이 모임의 감독은 런던의 난민 교회에서 목회한 폴란드의 종교개혁가 요하네스 아 라스코(Johannes a Lasco, 1499-1560)였다.
네덜란드 개혁교회도 장로의 직분을 회복시켰다. 네덜란드 개혁교회는 장로 가운데 가르치고 다스리는 일에 전무하는 목사와 다스리는 일만 하는 장로로 나눈다. 특별히 네덜란드 개혁교회는 로마교회의 권력추구를 거부했지만, 동시에 목사의 주도적 권력추구(domino-cracy)도 반대했다. 한 직분자가 다른 직분자에게 권력을 행사할 수 없도록 했다(parity of offices). 목사와 장로가 직임에서 그 역할은 다르지만, 그 사역의 중요성은 같다는 점을 실천하고 있다. 실제로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장로들은 적어도 1년에 한 번씩 자신이 맡은 교구의 가정을 심방하며 목양적인 사역을 감당한다. 그러므로 장로의 사역은 매우 무겁고 힘들다. 이 교회의 장로는 3년 임기제를 택하고 있다.
프랑스 개혁교회는 신앙고백과 신학, 정치에 있어서 칼뱅적이다. 1559년 첫 총회에서 ‘교회치리서’(The Ecclesiastical Discipline)를 채택한다. 이 교회법의 특징은 개체교회와 다수회를 인정하고 장로들의 다스림을 인정한 것이다.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경우 존 녹스가 제네바에 머물면서 칼뱅의 영향을 받아 고향에서 장로교 정치를 정착시킨 경우이다. 그러나 장로교회 정치가 처음부터 완전한 형태로 시작하지는 않았다. 존 녹스를 비롯한 6명의 존(John)은 1560년까지 신앙고백과 교회정치를 만들도록 임명되었다. ‘제1 치리서’(The First Book of Discipline, 1560)는 목사에 대한 매우 높은 기준을 제시하였다. 당시 목사가 아주 귀한 때여서 평신도 가운데 ‘낭독자’(Reader)라는 직분이 시작되었다. 또 지역의 대표인 ‘감독’(Superintendent)이라는 직분이 있었다(로마교회식으로 하면 감독 관구, dioceses). 12개 혹은 10개 지역이 한 감독의 관구로 정해 졌다. 이 ‘감독’은 게을러서는 안 되고, 설교, 성경적 교리와 경건에 있어서 근면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 이 제도는 일시적이었는데, 처음 임명된 자들이 죽고 이 제도는 사라졌다. 1578년 ‘제2 치리서’(The Second Book of Discipline)(Andrew Melville 등이 기안)를 총회가 받아들였는데 첫 번째 것보다 훨씬 더 장로교적인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목사, 교사, 장로, 집사 직분 체계를 세웠고, 모든 목사들은 교회에서 선출되고 서로 ‘동등 됨’을 강조했다. 뿐만 아니라 당회와 노회, 총회, 국제회의를 인정했다. 이렇게 해서 스코틀랜드는 오늘날 장로교회의 어머니 교회가 된다.
4. 웨스트민스터 총회(1644)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스코틀랜드 장로교 대표들의 노력으로 장로 직분이 성경에 일치하고 성경이 보증하는 직임임을 인정했다. 1644년 12월 정치모범을 완성했을 때 장로에 관해 이렇게 정리했다. “유대 교회에 교회 정치에 있어 제사장과 레위인과 연합한 백성의 장로들이 있었다는 것과 같이, 교회에 정치를 세우시고 교회 치리자를 세우신 그리스도의 말씀의 봉사자 외에 그의 교회의 어떤 사람에게 다스림에 은사를 주시고 부름을 받을 때에 그 일을 수행할 사명을 주셨다. 이들은 교회 정치에 있어 목사와 연합할 것인데(롬 12:7-8, 고전 12:28), 이 직분자들을 개혁교회는 일반적으로 장로라고 부른다.”
영국 의회는 이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고 스코틀랜드 총회는 받아들여 명실상부한 세계 장로교회의 장자로 우뚝 선다. 1578년의 ‘제2 치리서’(The Second Book of Discipline)와 같은 맥락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스코틀랜드 교회 총회는 ‘교회정치규례’(The Directory of Church Government)를 1647년 받아들임으로 장로교회로서의 정체성을 이어간다.
5. 세계 교회에서의 장로(교)의 역사
미국에 영향을 미친 장로교는 두 계열인데,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장로교의 영향과 네덜란드 개혁교회이다. 네덜란드 개혁교회가 1620년대에 미국에 왔으니 먼저 왔다. 두 전통은 18세기에 미국이라는 환경에 적응했다.
네덜란드 개혁교회는 1772년 암스테르담 시찰로부터 법적으로 독립했다. 장로교인들은 아래로부터 위에까지 새롭게 구성했지만 네덜란드 개혁교회는 위로부터 아래로 왔다는 점이 차이가 있다. 미국개혁교회(Reformed Church in America)는 도르트 교회법을 고집했다. 1792년에 영어로 번역하면서 73개의 설명을 덧붙였다. 1914년 도르트 교회법이 개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장로교회는 1706년에 처음 당회를 구성하고, 7명의 목사들이 등록했다. 노회는 1716년에나 시작했고 25명의 목사들로 구성되었고, 네 개의 당회가 있었다. 1787년에 최초의 총회가 4개의 노회로 구성되었다. 다른 한편 언약적 유산을 주장하는 장로교회가 생겨났다. 모든 장로교회는 웨스트민스터 정치모범을 따랐다. 교회와 국가의 관계가 적힌 부분을 제외하고는 모든 장로교회가 1729년까지는 같은 교회법을 유지했다. 1729년부터는 국가가 교회의 일에 간섭하는 것을 거부했다.
장로교회와 개혁교회는 다음 네 가지 점에서 동의했다. 첫째, 교회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는 사람을 임명해 성경적 원리에 따라 교회를 다스리도록 하신다. 둘째, 교회의 통치 형태는 기본적으로 지역 교회에서 뽑은 목사와 장로로 구성된다. 셋째, 다스리는 장로와 가르치는 장로는 차별이 없다. 넷째, 교회는 상위 질서 아래로 모여 단일성을 유지한다.
장로교 안에서는 언약주의자들의 교회 회원의 정부 일 참여를 거부함으로 차이를 드러냈다. 1860년에 이 이슈는 다시 한 번 수면 위로 부상했는데, 남부 장로교회는 북부 장로교회가 노예 문제에 있어서 연방정부의 결정을 지지함으로 시민정부에 복종하는 것을 비난했다. 물론 교회 정치에서 차이가 나는 부분은 여러 다른 부분에서도 나타났다. 교회 직분자의 종류가 2명(장로:다스리는+가르치는, 집사), 혹은 3명으로 차이가 있기도 했다.
6. 한국 교회의 장로 직분
한국 장로교는 미국과 호주, 그리고 캐나다 장로교회의 선교로 세워졌다. 외국 선교사들은 한국에 하나의 장로교회를 세웠다. 장로교회는 1907년 독노회를 조직하고 다음 해 1908년 12신조를 신앙고백으로 채택하면서 [대한예수교 쟝로회 규칙]을 총 20개 조항으로 시작한 후 1917년 제6차 총회에서 헌법을 만들었다. 1934년에 신앙고백과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교회정치, 권징조례, 예배모범을 한 권의 책으로 엮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교단마다 각각 다르게 발전해 왔다.
분명한 것은 한국 장로교회도 종교 개혁가들이 재발견한 장로 직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 교회 역사 초기 1887년 새문안교회(옛 정동교회)가 몇 명의 장로를 뽑아 조직 교회로 시작했지만 2년 후 임직 받은 장로들에게 문제가 생겨 중징계를 받았다. 새문안교회는 그로부터 15년이 지나서야 다시 장로를 뽑았으니, 그 부정적 여파가 컸던 것으로 보인다. 선교사들은 초기에 성숙한 장로를 세울 수 없었을 때 ‘영수’라는 임시직분을 두어 교회를 섬기도록 하기도 했다. 이 영수 제도가 한국 교회에서는 장로에 준하는 교회의 직분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진정한 의미의 장로 직분의 전신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미조직 교회를 전적으로 돌보는 교인 중의 으뜸이 되는 자로 선교사 대리, 혹은 ‘목사+장로+집사’의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 한국 교회의 장로 직분의 정체성은 상당히 혼란한 상황에 있다. 왜냐하면 한국 교회의 장로는 다스리는 직임 가운데 ‘영적 돌봄’보다는 ‘행정적이고 사무적인 결정’을 하는 데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장로들이 교인을 심방하고 영적으로 다스리는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 점을 다르게 설명하면 장로의 직분이 교회에서 명예적인 감투로 전락하고 말았다고 볼 수 있다. 교회 직분의 타락이다.
또 장로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은 일꾼’으로서의 직분이 아니라, ‘교인의 대표’로 인식되고 있다는 점도 본래 장로교회 정신으로부터 퇴보한 면이 없지 않다. 장로 직분을 인간적으로 쟁취하거나 사람들이 추천하는 보직 혹은 감투로 여기는 것이다. 이것은 심각한 직분의 위기가 아닐 수 없다.
한국 교회는 성경에서 가르치고 역사 가운데 존재했던 본래의 장로 직분을 회복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장로는 하나님께서 불러 세우시는 일꾼(직분)으로 그 권위와 책임을 진다는 점을 분명히 정리하고 실천해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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