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 이단 등

관상기도 글 모음 (종교다원주의 등)

Sola. 2023. 11. 11. 06:00

 

관상기도에 관한 위험성과 실체를 밝히는 글들을 모아놓았습니다.

 

관상기도는 온누리교회(장로교 통합) 손기철 장로 등이 많이 합니다.

지구촌교회(침례) 이동원 목사가 손기철 장로를 자주 초대해 관상기도가 성경적이라고 설파했습니다.

교계의 비판이 커지자 앞으로는 관상기도 세미나를 안하겠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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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상기도의 경악할 실체를 벗기다

 

임헌원 목사(한돌교회 담임. 예장합동)

 

 

하나님을 인격화 신(神)으로 생각지 않고 기(氣) 수준으로 보는 것은 인격적인 성령하나님을 에너지(기,氣)로 약화시킬 수 있다. 자기 암시를 주어 집단 최면을 거는 관상기도행태 속에서 생각나는 것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으로 합당한 것인가? 그러므로 사실상 관상기도는 허구적이며 비성경적인 자기고백 수준이라 하겠다. 경악할 관상의 실체 앞에 이래도 머뭇거리며 망설일 것인가?

 

필자는 2007.5.1.오후6시30분경 한국의 G 대형교회 별관 8층 목회자 리더쉽연구센터 입구에서 영어담당 목사(남, 관상을 안 함)와 모 전도사(남, 현재 관상을 하고 있음)를 동시에 만나 관상에 관하여 물었다. 다행히 모 전도사는 G 대형교회의 담임 L 목사의 관상기도 가르침을 받아 담임 L 목사와 함께 현재 관상을 실제 하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G 대형교회의 담임 L 목사의 관상기도 가르침(관상기도 세미나는 일정기간하며 유료 약 30만원)의 일부를 그 교회 모 전도사(남)가 고백하는 것 중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 글은 2007.5.3.오후3시경 G 대형교회 관상기도세미나 실제 운영 담당 J 전도사와의 핸드폰 통화에서도 2007년5월1일 모 전도사가 고백한 사실에 동의하며 필자에게 확실하다며 재확인 하여 준 내용으로 틀림이 없다)

 

들숨에서 하나님과 성령을 마시고 날숨에서 죄악을 몰아낸다?

 

“우선 자세를 반듯하게 하고 눈을 감은 상태에서 숨(호흡)기도의 방법은 이런 것”이다 하며 알려 주었다. “들숨(흡吸, 숨을 들이마심)에서는 하나님과 성령을 받아들인다고 생각하며 하나님과 성령을 인지하고, 날숨(호呼, 숨을 내쉼)에서는 내 속의 죄악을 몰아낸다고 생각하라”는 것이다.

 

상기와 같이 생각하며 ‘관상기도 놀이’를 하라는 것은 '상징적으로 죄를 몰아내겠다며 애쓰는 모습으로 차분히 성령하나님과 교제하는가보다' 라고 그저 이해를 하고 싶으나 그렇게 단순하게 보고 넘길 사안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여기에 심각한 신학적문제가 다음과 같이 발생할 수 있게 되어 위험한 신호를 보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동양종교 기(氣)운동의 기(氣)에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만 대입

 

이미 한국 개신교회들 중 여기저기에서 실행하는 관상기도에는 동양종교 기(氣)운동의 기(氣)에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만 대입을 시키는 것이 다를 뿐 나머지는 동양종교의 기(氣)운동 단학 선(禪)과 다를 것이 없다. 하나님을 인격화 신(神)으로 생각지 않고 기(氣) 수준으로 보는 것은 인격적인 성령하나님을 에너지(기,氣)로 약화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사실상 관상기도는 허구적이며 비성경적인 자기고백 수준이라 하겠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받으라!’ 하신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고, 그 성자하나님께서 성령하나님을 파송하시기 때문에‘성령을 받으라!’가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피조물인 우리는 어디까지나 하나님께 기도하는 입장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을 받으라!’라고 하며 카리스마를 좌지우지 하겠다는 것이야말로 비성경적이다.

 

또한 죄는 내 기분으로 생각하면서 내 마음대로 나오는 것이 아니고 또한 인위적으로 내보내어지는 것도 아니다. 호흡(숨)으로 내 자신의 마음이 스스로 죄악을 내보낸다고 생각하는 인본주의적 발상은 죄의 속성을 물량적인 것으로 속이는 것이다. 죄는 무형체이며 영적인 것인데 육적이며 물량(에너지)적인 것으로 표현하려는 비성경적인 의도가 무엇인가?

 

죄는 하나님이 없애주시는 것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있다. 하나님께서 죄를 씻어 주시며 불가항력적으로 구원하시는 것이다. 죄까지도 제 자신이 마음대로 내보내 없앤다는 것은 교만한 것을 뛰어 넘어 예수님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과 동일시하려는 것으로 비성경적인 해괴한 일이다.

 

신비주의 자아최면 행각의 실체 드러나!

 

그리고 “복음서의 변화산 말씀을 마음으로 생각할 때는 2000년 전의 변화산의 현장에 자신이 가있는 것으로 인식하고 그때 그 주님을 마음에서 느끼며 그 당시의 제자가 된 내 마음에 말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라”는 것이며, 또 “혈루병을 앓는 여인의 현장에서 그 말씀을 생각하고 그때 그 주님을 자신의 마음에 생각하고 있으면 역시 그 순간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거기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하나님 앞에 머무르는 일체의 행위가 경험 되는데 그것을 관상이라”고 한다.

 

“그룹으로 모여 할 때는 관상을 인도하는 리더가 반듯한 자세로 눈을 감은 상태의 사람들에게 ‘자! 지금 산을 올라갑니다’라고 하면 마음으로 함께 산을 오르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요!’라고 하면 모두가 그 아름다움을 본 것처럼 마음으로 느끼며 마음으로 여행과 등산과 산보를 함께 행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관상리더가 말과 분위기를 어떻게 인도하느냐에 따라서 많이 다르다”고 고백을 하였다.

 

자기암시를 준 최면상태에서 인식되는 생각이 주님의 음성으로 합당한가?

 

여기에서 우리는 마치 최면을 거는 모습하고 너무 흡사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 자기 암시를 주어 집단 최면을 거는 관상기도행태 속에서 생각나는 것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으로 합당한 것인가? 이것은 존재론적으로 슐라이마허의 감정의 신학이요, 무신론이요, 영매를 쓰는 뉴에이지의 흐름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이교도인들의 명상과 다름없는 행태에서 때로는 자기 생각 속에서 자기 없음(무無)현상이 나타나는 캄캄한 무아(無我)의 상태에서 태고의 고요함을 느끼는 자아(Ego)와의 대화가 마치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교제와 안식을 얻는 것으로 착각을 하게 만드는 비성경적인 모습이다.

 

그러나 더 위험한 것은 자기 생각 속에서 자기 없음(무無)현상이 나타나는 캄캄한 무아(無我)의 상태에서 태고의 고요함을 느낀다며 평안을 주장하지만 그것은 심지어 영혼이 무(無)가 되는 것, 자아(Ego)가 없어짐 즉 영혼의 멸절상태를 경험할 수 있다는 비약이 얼마든지 가능한 비성경적인 행각이 나올 수가 있다.

 

관상기도에 대해 비상경계령을 발효함이 옳다

 

관상을 이끄는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배가 고프지 않다. 그저 성경적인 설교만하고 있어도 비행기타고 해외여행을 자주 다닐 수 있는 탄탄한 재력도 있다. 그들은 실제생활에서도 전혀 아쉬운 것이 없는 부요한 사람들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왜! 이 관상기도를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 머무르는 기도로, 이 세대 영성의 새로운 모태가 될 수준 높은 영성기도로 치켜 올리며 수많은 성도들을 관상의 허구 속으로 몰아가려는지 그 숨은 의도가 무엇일까 궁금하다.

 

관상에 참여하면 시대가 요청하는 진보개혁 엘리트 교인이고 관상에 반대하면 시대에 뒤떨어진 수구보수 세력으로 비아냥을 해서는 안된다. 시대정신을 따라하지 말고 무엇이 성경적으로 옳고 그른지 건전한 비판을 통하여 교통정리를 하여 주어야 할 것이다. 이제 개신교가 관상기도를 받아들인다는 것이 왜 위험한 도박이고 한국교회를 망치는 지름길인지 확연히 드러난 이상, 관상기도에 대해 비상경계령을 발효하는 것은 지극히 옳다.

 

유행하는 시대정신(최근의 시대사조는 포스트모더니즘과 뉴-에이지)이 느낌(Feeling), 즉 감성을 강조하여 원시 고대 문명의 부활(회귀)을 강조하여 힌두교, 불교식의 명상으로 회귀하려는 움직임에 동양종교 단학 선 같은 기(氣) 운동이 합세하여 서울한국에 우후죽순처럼 들어 선 것이 벌써 10년 이상 되어 한국의 문화적 강산을 변하게 하였다.

 

그래서 관상은 그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정신의 사도들(동참한 목회자들 포함-그 사도들은 누구의 종들로서 갈 길을 가겠다는 것인지 모르지만)이 역사적인 사명감에 도취되어 열려진 감성적 느낌문화(Feeling Culture)의 물결로 개신교의 근간을 바꾸려하는 비성경적인 큰 흐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성경적 진리는 시대정신(시대사조,포스트모더니즘과 뉴-에이지)이 제아무리 요동을 쳐도 달라질 이유가 없다. 아직 늦질 않았으니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정신을 진리로 알고 분별없이 따르려는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 앞에서 죄악의 씻음을 받고 성경으로 돌아오길 기대한다.

 

<림헌원 목사>

 

총신대원 졸

 

명지대학교 학부와 사회교육원 및

 

협성대학교 학부 강의

 

성남시 건강가정지원센터 가족상담팀 면접상담원

 

제13호 • 2009년 4월 21일 화요일

 

* 출처 : 크리스천인사이드 http://www.cio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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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상기도 비판

 

김성건 논설위원/서원대 교수

 

가톨릭의 신비적 영성에 중독 된 한국교회

 

한국교회에 침투한 ‘가톨릭 영성’의 문제와 위험

 

지성사적으로 보아, 미국의 히피 그룹을 위시해 프랑스, 독일, 영국, 일본 등 주요 선진국에서 기성의 이데올로기와 체제에 도전하는 젊은이들의 반(反)문화운동이 잇달아 격렬하게 전개된 것은 지난 1960년대 중반이었다.

 

당시 세계적 수준에서 권위주의적 정치체제를 대표한 거대 관료 조직으로서 가톨릭교회는 자연스럽게 안팎의 비판에 직면하게 됐다. 세계의 보편적 교회를 표방하는 가톨릭교회로서는 그 같은 비판적인 저항의 시대 조류에 어쩔 수 없이 부응해 모종의 신학적 대타협을 시도할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가톨릭교회는 1962년부터 1965년까지 무려 3년간에 걸쳐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개최해 타종교에 대한 종전의 권위주의적, 배타적 태도를 바꾸어 종교 간에 대화를 앞장서서 추구하는 에큐메니즘(ecumenism, 초교파주의)의 선봉에 서는 등 이른바 종교다원주의 쪽으로 일대 신학적 전환을 이루어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 사실이다. 그 결과 로마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교리)과 개신교회의 가르침 양자 사이에 종래 존재했던 뚜렷한 간격이 시간이 흐르며 점차 흐려지게 됐다.

 

한국 가톨릭교회의 경우는 지난 18세기 말 조선에서 포교가 처음 시작된 이래 수많은 종교적 희생자 곧, 순교자를 내는 등 줄곧 강하게 이단시하고 금지했던 유교적 조상제사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계기로 이제는 한국의 전통문화의 한 부분으로 돌연 인정되는 일이 벌어졌다.

 

역사적으로 보아, 지난 1세기에 오순절 성령운동의 결과로 초대 교회가 출현한 이후 기독교가 핍박을 받던 중 3세기에 들어와서 로마 제국의 정치권력을 장악한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서 국교로 공인됐다. 그렇지만 그 당시 가톨릭교회는 초대교회의 전통보다는 오히려 그 주위에 있었던 이방 종교들의 주술적 요소를 상당 부분 수용한 전통이 오늘까지도 면면히 계속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 주지의 사실이다.

 

한편, 1960년대의 히피문화로 대표되는 반문화 운동을 배경으로 지난 1980년대에 출현한 ‘탈근대’, ‘다원주의’, ‘개인주의’, ‘감성’ 등으로 표상되는 포스트모던의 시대적 흐름과 비교적 최근인 1990년대에 나타난 세계화와 정보화의 영향 아래 세계 종교들 중에서도 기독교 전반 특히 한국 개신교 내에서 약 10년 전부터 ‘제도 종교’와 구별되는 주관적 ‘경험’에 바탕을 둔 이른바 ‘영성’(spirituality)에 대한 관심이 갑작스럽게 크게 고조됐다.

 

여기서 우리의 주목을 특별히 끄는 측면은 바로 2006년 말 오늘에 이르러서는 본질적으로 다분히 주술적 요소를 많이 갖고 있는 ‘가톨릭 영성’이 16세기 말 당시 가톨릭교회의 면죄부 등 각종 주술 타파를 목표로 이루어진 종교개혁의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자처하는 보수적인 한국 개신교회에 마저도 조금씩 미묘하게 침투해 이제는 사실상 거의 지배하게 된 새롭고도 자못 흥미 있는 현상이다.

 

필자는 종교를 사회과학적으로 연구하는 종교사회학자로서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 평소에 종교개혁의 유산을 이어받은 복음주의 신앙은 마땅히 가톨릭과는 본질적으로 구별돼야 한다고 믿는 한 사람의 개신교 신자로서 최근에 한국 교회에 침투한 ‘가톨릭 영성’의 문제와 이것의 위험을 제대로 밝히는 일이야말로 현재 침체 상태에 빠져있는 한국 교회의 이노베이션을 위해 여러모로 매우 중요하면서도 시급한 과제라고 본다.

 

오늘날 수많은 복음주의자들이 ‘로마 가톨릭 스타일의 영성’ 혹은 달리 말해서 ‘종교개혁 이전의 영성’으로 돌아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런 영성은 많은 경우 이방 종교들로부터 차용된 것으로서, 예를 들자면 의례적인 기도 혹은 지루한 되풀이 기도, 영창, 곧 시편 따위의 글귀를 단조롭게 읊는 일, (선불교에서 강조하는) 명상(meditation), 집중기도(centering prayer), 곧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하나님의 존재를 느끼며 단순히 안식을 취하는 명상적 행위 등이다.

 

그래서 약 120년 전 미국의 선교사들에 의해 복음이 전해진 이래 현재까지도 미국의 문화적 영향권 아래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는 한국 복음주의 개신교 진영에 커다란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북미의 주요 신학교중 거의 가장 대표적 기관인 초교파적 풀러신학교의 ‘영성’ 코스 관련 주요 필독 도서 목록에는 물론 한국의 대표적 신학교들의 각종 ‘영성’ 과목의 경우도 저자의 상당수가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쓴 토마스 아 켐퍼스(Thomas A. Kempis) 등 로마 가톨릭 신자인 것을 새삼 주목할 수 있다.

 

한편, 금년 여름 한국을 잠시 방문해 연일 개최한 집회를 통해 국내의 수많은 성도들에게 대단한 감동을 불러일으킨 바 있는 미국 남가주 소재 새들백교회의 릭 워렌 목사는 베스트셀러 <목적이 이끄는 삶>으로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데, 이 릭 워렌 목사 역시 명상, 집중기도 및 여타 가톨릭의 이교도적 영성 형태를 증진시키기 위해서 로마 가톨릭 저자들의 주장을 자신의 저작이나 설교에서 빈번하게 인용하고 있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구체적 예로서, <목적이 이끄는 교회>와 <목적이 이끄는 삶>에서 워렌 목사는 존 메인(John Main)을 인용하고 있는데, 메인은 베네딕트 수도사로서 그리스도가 나사렛 예수에게만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수도원의 지도자들, 병든 자들, 가난한 자들 같은 우리들 속에 남아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또한 워렌 목사는 북미 기독교계에서 현재 상당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사람으로서 최근 한국을 방문해 당시 국내 기독교계 언론으로부터 비판을 받기 보다는 오히려 커다란 주목을 받은 바도 있는 <영적 훈련과 성장>과 <기도>의 저자인 퀘이커 출신의 신비주의자 리처드 포스터(Richard Foster)가 강조하는 ‘명상’을 실천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한국에서 이 시대의 영성신학자를 대표하는 목사로 이미 잘 알려진 포스터가 창시한 이른바 ‘레노바레’(Renovare) 운동은 오늘날 미국의 유명한 윌로우크릭 교회를 위시해 한국 기독교계에서도 잘 알려져 있다. 명상의 각종 테크닉에 바탕을 둔 레노바레 운동은 본래 평화주의를 지향하는 퀘이커 전통으로부터 나온 것으로서 진보적인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초교파주의(ecumenism)의 배경에 자리 잡고 있는 운동이다. 주지하듯이 교파 간 일치와 연합을 추구하는 에큐메니즘은 기본적으로 교리(doctrine)에 대해서는 크게 상관하지 않는 전략을 갖고 있다.

 

이로써, 필자는 오늘날 자신을 복음주의자라고 고백하는 사람들 가운데 적지 않은 수가 '‘종교적(가톨릭) 신비주의’와 ‘성서적 영성’ 양자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제대로 이해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고 본다.

 

그런데 여기서 제기할 수 있는 중요한 문제는 교회사를 통해서 볼 때 교회 내의 ‘신비주의의 발전’과 ‘성령운동의 번성’ 양자 사이에 매우 흥미 있는 관련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순절 성령운동(Pentecostalism)과 카리스마 운동들은 놀랍게도 많은 측면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 속에서 발전한 신비주의의 표현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는 빈야드 운동의 창시자인 존 윔버(John Wimber) 같은 이가 그의 책 <파워 이반젤리즘(Power Evangelism)>에서 아빌라의 테레사(Teresa of Avila)와 이그나티우스 로욜라(Ignatius Loyola)를 아무런 문제없이 추천하고 있는 데서도 잘 나타난다.

 

이런 측면에서 오늘날 로마 가톨릭 진영 속에서 수용되고 있는 관점은 바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카리스마적 부흥을 위한 예언자적 충동(자극)을 마련했다는 것이다. ‘성령세례’ 경험, 비전(환상), 내적 목소리, 황홀감과 엑스터시, 진위가 의심스러운 예언하기, 모종의 힘 아래로 떨어지는 것, 각종 방언 따위 같은 카리스마 운동과 오순절 성령운동의 주요한 표현들은 전적으로 로마 가톨릭 신비주의와 일치한다.

 

오늘날 자신을 복음주의자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의 대다수가 오순절 성령운동 및 카리스마운동 추종자들에 의해서 구성되고 있기 때문에, 일부에서는 가톨릭신앙과 새로운 복음주의가 기묘하게도 동일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까지 주장한다.

 

왜 수많은 개신교인들이 가톨릭 신비주의에 매력을 느끼게 될까? ‘교리’(doctrine, 신조)와 ‘헌신/신앙심’(devotion) 사이에는 종종 긴장이 있기 마련이지만, 중요한 것은 올바른 교리는 자연적으로 올바른 헌신/신앙심을 갖다 준다는 점이다. 결론적으로, 한국 개신교회는 차제에 ‘개인주의’를 강조하는 포스트모던 문화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 ‘종교적 감정주의’(religious emotionalism)를 ‘기독교 영성’과 잘못 동일시하는 오류를 더 이상 저질러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최근 한국 교회 내에서 유명한 간증자들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의 드라마틱한 중생 체험과는 뚜렷이 모순 되는 치명적인 문제를 개인 차원에서 일으킴으로써 기독교의 공신력이 크게 추락하는 일이 종종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구굿닷컴 이영주 기자의 2006년 12월 25일자 글 ‘드라마틱한 간증의 함정’ 참조). 이는 한국 교회의 평신도들에 대한 강단의 가르침(설교)과 기독교계 언론의 수준 양자 모두가 아직 매우 낮은 데 머물러 있다는 것을 잘 방증한다.

 

끝으로, 필자는 신비적 경험에 대한 우리 개신교 크리스천의 사고를 기본적으로 틀 지우는 데 중심이 될 수 있는 두 개의 성경 구절을 제시하고자 한다. 하나님께 대한 겸손한 신뢰가 나타나 있는 시편 131편과 천사숭배와 금욕주의의 위험에 대한 경고가 나타나 있는 골로새서 2장 18절에서 23절까지의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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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상(觀想)기도’의 실상을 밝힌다

 

림헌원 목사_한돌교회

 

“관상추종자들은 성경적 해석과 기도의 방법론 왜곡하지 말아야”

 

시작하는 말

 

미국과 한국의 개신교계에 불고 있는 관상(觀想)기도는 다양한 이름으로 위장하여 표현되어 각 개신교계 교단의 교회 속에 침투 되고 있다. 관상기도는 경청기도, 침묵기도, 숨(호흡)기도, 마음기도, 향심(向心)기도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위장하여 교회 안에 들어와 개신교의 신앙과 성경적 가르침의 뿌리를 은근히 뒤흔들며 미혹하고 있는 실정이다. 관상기도 추종자들은 ‘관상기도의 성경적 근거 구절들이 많이 있다’라고 주장하며 관상기도가 매우 성경적인 것인 양 위장하고 있다. 그렇지만 인터넷에 올라온 관상추종자들의 글들을 보면 관상기도의 실체는 숨겨 버린 채 온갖 미사여구로 교묘히 치장하여 덮어씌우고 뜬구름 잡는 듯한 관상의 이야기만을 늘어놓고 있을 뿐이다. 다행히 관상 지지자 중에 한신대학교의 K 교수가 ‘관상기도의 성경적 근거’라고 하여 매우 용감(?)하게 인터넷에 공개 제시하므로 인터넷과 각종 지면상에서 토론을 시작할 수 있는 단초가 되어 세상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분별력의 시야를 넓혀 줄 기회가 찾아 오게 되었다. 이에 대부분의 관상추종자들이 내세운 대표적 성경구절들의 인용이 관상기도를 억지로 정당화하려는 황당무계한 것이라는 점을 밝히고자 한다. 이 글에서는 뉴스엔조이 사이트에 K 교수가 제시한 ‘관상기도의 성경적 근거’ 구절의 해석에 대해서 비교적 짧게 반론하는 비판을 전개하고자 한다.

 

1. 이사야 30:15의 제시에 대한 반론

 

그들은 “관상기도를 해야 한다는 성경적 근거는 무수히 많다. 지면 관계상 구약과 신약의 대표적 본문을 몇 개 언급하도록 한다. 영성의 분야에서 미국과 한국에서 많은 독자를 지니고 있는 유진 피터슨이 <관상적 목회자>란 책에서 목회자는 밖으로 분주하기보다는 주님 안에서 잠잠하여야 한다고 이사야서 30장 15절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돌이켜 조용히 있어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거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고’란 말씀의 예를 들어 책망했다” 고 주장하고 있다.

 

▶ <반론> : 상기와 같이 관상가들은 이사야 30장 15절에서 조용히 관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책망 받았다는 내용을 본문의 전후 문맥에서 찾아 볼 수 없다. 본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본뜻은 사람이 노력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구원 받는 것에 대한 전초적인 뜻을 밝히 전하고 있는 것이다. 본문에서는 전적으로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전적인 능력에 의하여 구원을 받는다는 뜻을 전한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인위적인 해석이다. 관상가들의 이러한 해석은 성경의 영감성과 계시를 모르고 구속적인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이러한 황당무계한 해석을 하게 되었다고 본다. 관상가들의 그릇된 인용은 여호와의 증인들처럼 “조용히 있어” “잠잠하고” 등의 단어만을 몇 개 찍어내어 인용한 것으로 성경 앞뒤의 문맥을 살핀 뒤 그 문맥 속에서 그 단어의 참된 의미를 해석한 후 인용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성경해석원리 중의 하나가 문맥상의 해석임을 소홀히 하지 말 것을 정중히 주문하는 바이다.

 

2. 시편 46:10의 제시에 대한 반론

 

그들은 주장하기를 “시편은 관상기도의 성경적 근거 구절들이 많이 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시46:10). 여기서 ‘가만히 있어’의 영어 표현은 ‘be silent’로서 침묵 가운데 있어서 내가 하나님 됨을 알라는 중요한 말씀이다”라고 한다.

 

▶ <반론> : 본문에서는 하나님께 의지하고 안식하라는 것이지 ‘기도로 조용히 관상하라’는 내용을 찾아 볼 수 없다. 설령 기도하라는 말이 나오면서 소리를 내지 말고 조용히 관상하라고 한다 할지라도 역시 성경의 전후문맥에서 그 의미를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본문은 구원과 관계된 것이지 관상기도와 연결된 흔적이 없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라’ 하는 말은 ‘너희가 하나님의 행적의 증거를 찾아 조용히 보고 믿으라’ 하는 뜻이다. 곧 조용히 하라는 것은 과거 하나님이 행하신 행적들을 가만히 보고 되새김질(음미, 또는 묵상)하여 보고 하나님 됨을 믿으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행적이라 한다면 구약의 역사 가운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약하지만 이기게 하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던 다양한 하나님의 행적들을 지시하고 있다.

 

3. 열왕기상 19:1-18의 제시에 대한 반론

 

그들은 “또한 엘리아 선지가가 하나님의 호렙산의 동굴에서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열왕기상 19:1-18)고 성경은 기록했다”는 내용을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 <반론> : 본문을 문맥 속에서 살펴본 뜻은 하나님은 물리적으로 나타나지 않으시고 영적으로 나타나신다는 의미이다. 요란하게 외부적으로 물리현상 가운데 나타나시지 않고 영적으로 임재하신다는 것이다. ‘세미하다’는 것은 내적으로 은밀하게 나타나시는 하나님, 내적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인데 ‘세미한’이란 말은 ‘물리적인 외부의 것들이 조용하다’는 것이지 ‘엘리야가 조용하여 관상기도를 했다’는 근거가 될 수가 없다. 그리고 구약시대 하나님의 임재 방식은 선지자가 원하여서 음성을 듣는 것이 아니고 갑자기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 임하셨다. 즉 하나님 편향적인 말씀이 임하신 것이지 우리의 기구적인 말씀이 아니었다. 우리가 분위기를 만들어 놓고 기다려서 듣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네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일정한 시간과 장소를 만들고 기다려라’ 고 말씀하신 바 없다.

 

4. 마태복음 5:3의 제시에 대한 반론

 

그들은 “신약에서 예수님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 5:3)라고 산상수훈의 첫 구절을 말씀하셨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마음을 비운 자가 가난한 자이고, 빈 마음에 성령께서 임하신다는 것이다. 요한복음에는 관상사상을 의미하는 구절이 많다”고 주장한다.

 

▶ <반론> : 본문의 빈 마음이라는 것은 탐욕, 정욕, 물욕, 등의 생각을 갖지 않고 정결한 심령으로 사는 이미 구원 받은 사람들의 모습(상태)이 어떠한가를 보여 주는 말씀이다. 자신의 부족함과 죄인임을 겸손히 선언하고 하나님의 도우시는 은혜만을 구하는 구원 받은 자로서의 겸비한 모습으로 성령을 받은 상태를 말한다(행2:28). 주님이 연합하시기 위해 들어오시는데 마치 우리가 침묵하여 도와주는 알미니안적 인본주의를 엿 볼 수 있게 하는데 이것은 성령 하나님의 전능성을 훼손하는 것이고 신인 합동사역인 것처럼 꾸며서 하나님의 독자적인 능력을 평가절하 시키는 것이 된다. 결국 인간이 성령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이나 이유, 방법 등을 관상이라는 채널을 통하여서만 행하는 것처럼 미혹하려는 행위는 성령의 독자적인 능력을 훼손할 뿐이다. 마태복음 5장 3절 말씀에서는 무슨 기도를 하는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조용하여 관상하는 것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다.

 

5. 요한복음 14:10, 20; 17:21의 제시에 대한 반론

 

그들은 “요한복음 14장 10절, 14장 20절, 17장 21절 등에 반복적으로 나오는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라는 말씀은 관상기도를 통해 기도자가 마음을 비워 그곳에 주님을 모시고 그분이 내주하여 나의 주인이 되는 상태를 지칭하는 것이다”고 주장한다.

 

▶ <반론> :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라는 말씀을 동거동행으로 해석할 수는 있으나 그것이 관상기도를 통해서 한다는 근거는 그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요한복음 14장 10절과 14장 20절은 14장 전체 문맥 가운데서 살펴볼 때, 결국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지켜 행하는 자에게 당신을 나타내시고 함께 하시겠다는 뜻이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요 14:23). 이처럼 동거동행은 하나님의 임재하심으로 하나 되는 연합사상을 말한다. 제 삼자가 아닌 일자가 되는 하나님의 역사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무궁한 사랑을 뜻하는 것이다. 귀하고 복되신 말씀 사이에 관상의 의미를 끼워 넣으려는 시도 자체가 함정이다. 관상가들이 말씀의 좋은 말 사이에 관상기도의 의미를 끼워 넣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들의 관상의 상품을 멋있게 포장하여 선전하니 많은 목사와 연약한 성도들이 미혹되고 있는 안타까운 실정이다.

 

6. 로마서 8:26-28의 제시에 대한 반론

 

그들은 “로마서 8장 26-28절은 관상기도 하는 신자의 내면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알지 못하지만, 성령께서는 친히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여 주십니다’(롬 8:26)는 말씀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데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해주신다는 구절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런 성령의 활동을 도와주는 일로써 조용히 침묵 가운데 마음을 비워드리는 일인 것이다. 이것이 곧 관상기도다”라고 주장한다.

 

▶ <반론> : 하나님께서 탄식함은 죄 때문에 죄로 얼룩이 지어진 인간들을 안타까워하시고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후에 인간이 타락하여 하나님의 지혜의 본질을 잃어버린 지구촌의 상태를 탄식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관상기도의 의미를 끼워 삽입을 하다니 있을 수 없는 해석으로 황당한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원초적 상태를 향하여 나가시는 것이며, 최종적인 목표를 향하여 가시는 것이다. 즉 이것은 성령의 독자적 영역이다.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총이다. 여기에 우리 인간의 인위적인 관상행위가 들어가겠다는 것은 인본주의요 하나님의 말씀을 훼손하는 행위가 된다.

 

7. 요한계시록 3:20의 제시에 대한 반론

 

그들은 “마지막으로 관상기도 수련회 때마다 인용하는 구절인 요한계시록 3장 20절 ‘내가 문을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말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로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개역). 여기서 주님께서 문을 두드리실 때 ‘문을 연다’는 것은 우리가 침묵 가운데 머무르며 다른 생각을 멀리하고 주님께로 우리의 마음의 문을 열어놓고 주님을 초대하면 내 영혼 안에 들어오시겠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 <반론> : 이 말씀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침묵’이라는 언어는 필요 없는 말이다. 주님이 연합되어 들어오시기 때문에 그 방법이 ‘침묵’이라는 것은 절대적인 방법이 아니다. 주님과의 연합의 방법이 침묵이라는 것은 관상가들의 자의적 해석이다. 결국 지금까지 관상의 성경인용과 다른 곳에서의 실체적 행위를 지켜 보건데 나중에는 ‘주님이 들어오시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침묵이 주가 되

 

는 것’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해석이요 황당한 발상이다. 이러한 해석은 성경의 본질을 떠난 것이다. 주님께서 연합하기 위하여 임재 하실 때 우리는 주님의 능력과 은혜를 믿고 심령의 문을 엶으로써 하나님과의 연합은 성취되며, 이것은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총과 능력에 의해서 성취될 뿐 침묵이라는 인간의 방법이 게재된다는 것을 본문은 언급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과의 연합 사이에 침묵을 삽입하는 것은 그들의 임의적인 입장일 뿐 성경의 입장이 아님은 더욱 분명해 진다. 침묵하여 마음의 입술로 깊고 크게 부르짖는 기도를 한다면 좋겠지만 관상기도의 실체를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 관상기도는 침묵기도에서 파생된 새로운 양태의 이방 종교의 인본주의적 기도 형태이다. 침묵만 하려들고 거기에 인도의 명상과 만트라(주문)식으로 짧은 내용을 반복하여 중언부언하는 것은 분명 이교도의 명상에 말씀 몇 구절을 얹혀 놓은 것으로 초월적 명상행위와 그 차이가 없는 인본주의, 신비주의, 신영지주의, 뉴에이지로서 미래로는 종교다원주의(모든 종교에는 각기 특별한 구원의 법이 있으니 서로의 입장을 존중하여 세계 모든 종교를 평화적으로 통일하자는 입장)와 맥을 같이 하게 되는 비성경적 흐름을 막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마치는 말

 

지금까지의 내용을 살펴 볼 때 K 교수와 관상 추종자들의 성경 인용은 성경 말씀에 대하여 일종의 기만하는 행위가 될 수 있다. 관상가들이 미사여구로 잘 포장하여 성경 말씀 속에 살며시 끼워 들여 놓은 가시(관상, 경청, 침묵 등)를 사람들이 모를 수 있다. 허를 찌르는 가시는 그냥 놔두면 피부를 자극하여 아프게 하고 곪아 퍼지면 급기야 치명적일 수 있으므로 발견하는 즉시 더 늦지 않도록 속히 뽑아 버려야 할 것이다. 더 이상 경건한 기독교의 성경적 해석과 기도의 방법론을 왜곡하지 말고 모든 종교를 통합할 수 있고종교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여 서로 넘나들게 할 수 있는 용어인 ‘영성’과 ‘관상’이라는 용어 사용과 그 구체적인 방법과 실제 행위들을 일거에 내어다 버리길 바란다. 그리고 매스컴에 자주 오르는 일부 대형교회 유명 목사들과 추종하는 젊은 목회자들이 관상기도 관련 영성기도 행위를 이 시대의 최고의 영성신학이라고 주장하며 교회성장의 한 방법으로 목회 현장에 도입하고 있는 실정은 ‘기도’에 대한 성경적 정체성의 혼란을 야기시키고 교회의 미래를 어둡게 하는 일로 매우 우려되는 바이다. 그러므로 이와 관련하여 신학적으로 증명하여 공교회의 정체성에 배치되거나 혼란이 야기될 경우 등에 대한 대처 방안을 교단 차원에서 제시해야 마땅하다고 사료 된다.

 

기독교개혁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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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상기도 정체성 도입 경계령

 

 

관상기도 신일합일 위장 자기확신

 

본 글은 림헌원 목사가(한돌교회 담임목사, 예장합동, 명지대학교 교양학부 강의 역임, 협성대학교 교양학부 강의)연구한 글임을 밝힌다(편집자 주).

 

시작하는 말.

 

관상기도는 형식상으로 보면 ① 거룩한 성경읽기 단계 ② 읽은 것 묵상단계 ③ 묵상한 것을 놓고 기도하는 단계로 나눠진다. 여기까지는 보통 QT와 거의 같아서 분별이 어렵다. 그러나 문제는 4단계에 설정된 관상기도의 단계이다.

 

그들이 표방하는 관상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같아 보이지만 실제는 불교나 천주교, 여타 동양종교의 명상 기도법이 가미된 것이다. 다 같으나 마치 이단(異端)처럼 끝이 다른 것이다. 바른 교회라 하면 보다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기도, 믿음의 기도를 배워 하여야 할 것이다.

 

신약 성경의 사도들이나 예수님은 기도를 할 때 ‘하나님이 임재하는 시간이 니 촛불을 켜라! 주먹 크기의 종을 쳐서 소리를 울려라!’는 등과 같이 어렵고도 요상하게 승려들이 좌선하고 명상하는 식으로, 혹은 무당이 폭포수 밑바위에서 촛불을 켜고 종을 흔들어 소리를 내며 신(神)내림 굿을 하듯이 가르치지 않았다.

 

1. 관상이란 정의와 용어 자체의 문제.

 

관상(觀想)이란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응시이며, 생각과 말과 감정을 뛰어 넘어 우리의 모든 인식 활동을 활짝 열어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한다. 여기에는 인간의 수행과 노력, 지력이나 어떤 사람의 뛰어난 안목으로 해탈의 경지에 이르려는 불교 사상, 이성주의, 과학주의 사상(복음이 아닌 인본주의 사상) 등이 끼여 있다. 마치 인도 명상가들의 모습과 그 옛날 중국이나 한국의 도사들 모습같지 아니한가?

 

그렇기 때문에 성경적 신앙의 세계관 속에 독소같은 불순물로써 접목할 수 없는 요소가 되어 하나님께서 신구약 성경을 막론하고 가장 싫어하시는 종교혼합주의(religious syncretism)로 급 비화 될 수 있어 위험하지 않을 수 없다 할 것이다. 물론 우리 개혁주의 교회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66권 말씀의 든든한 초석 위에서 영혼과 육을 통하여 하나님을 다양하게 느끼도록 해야 할 것이다.

 

2. 정적인 침묵 행위의 위험성.

 

관상가들은 ‘내 마음이나 생각, 언어로 내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 라 그냥 하나님 안에서 쉬면서 말씀하시면 듣고, 말씀하시지 않더라도 조급해 말라’고 한다. 명상의 도를 깨우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 안에 영적 바이러스가 있다. 이것들은 타 종교의 명상, 참선, 무아의 경지사상과 다를 바 없다.

 

‘침묵기도’, ‘경청기도’라고 하는 미명아래 분위기를 조성하여 놓고, 깊고도 높은 경지에 도달하고자 노력하고 또 노력하며 영성을 추구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한다면 ‘두 가지의 계시’를 인정하고 있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지금 하나님의 음성이 임한다면 이미 기록된 정경 66권 말씀과의 차이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결국 두 개의 계시를 인정하는가?’라는 질문에 관상가들은 마땅히 대답해야 한다. 그렇다면 관상가들이 계시의 종결성(혹은 충족성)과 그 완성을 인정하지 못한다는 의미가 된다.

 

신구약 성경은 계시의 방편으로 여호와의 사자(하나님의 현현), 자연, 구 름, 불꽃, 사건, 말씀 등으로 임하였다. 구약성경에서는 예언의 성격에 따라서 계시되기 때문에 세미하게 또는 강렬하게 또는 강, 약, 격정적으로 계시가 임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계시의 시대가 끝났기에 음성이 들려질 이유가 없다.

 

다른 어떤 것을 통하여서도 하나님은 음성을 주시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기록된 말씀에 감화를 받고 깨달아서 그 계시된 말씀의 지표에 맞추어 걸어가며 사는 것이 오늘날 정경을 손에 든 성도들의 올바른 자세이다. 우리는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과 말씀묵상을 통하여 성경 66권에 기록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

 

3. ‘관상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나, 객체와 주체가 일치되는 신비한 경험을 하는 것’이 성경적인가?.

 

관상기도를 주장하는 자들은 ‘관상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나, 객체와 주체가 일치되는 신비한 경험을 자기 내면에서 하게 되는데 지성적인 냉랭함이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는 정감적인 경험이요, 직관적인 경험’이라고 한다.

 

관상 기도를 통해 일상적이지 않는 종교적 신비 경험을 한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의 쟁점은 관상기도를 통해 어떤 경험을 했다는 것이 사실인가 아닌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경험이 성경이 계시한 길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관상가들이 관상기도를 통하여 체험하게 되는 경험은 타 종교, 곧 힌두교의 요가를 통한 명상법이나 불교의 명상수련, 단 수련원의 뇌 호흡, 마음 수련원의 자기를 비우는 명상 수련법 등을 통해 어떤 종교적 절정을 경험했다는 주장과 별로 다를 바 없다.

 

타 종교인들은 명상을 통해 우주와 자신이 하나 되는 경험을 했다고 말한다. 그래서 자기에게서 벗어나 신의 경지에 이르러 신과 자신이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관상가들이 말하는 객체와 주체가 일치되는 신비체험은 그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명상수련을 통해 궁극에는 인간이 신이 되는 정점에까지 이를 수 있다고 말하는 이교도들의 주장과 다를 바 없지 않다.

 

성경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종들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의해 인간이 경험할 수 없는 신비체험을 했던 경우를 보게 된다. 이사야 선지자(사 6장), 에스겔 선지자(겔 1:1; 40:1), 다니엘 선지자(단 10:5-17), 자신이 몸 밖에 있었는지 몸 안에 있었는지 모를 정도의 상태에서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갔던 사도 바울(고후 12:1-5), 인자같은 이 앞에 엎드려져 죽은 자 같이 되었던 사도 요한(계 1:9-20) 등이 있다.

 

그러나 선지자 이사야, 에스겔, 다니엘이나 사도 바울이나 사도 요한의 체험은 자기들이 원했기 때문에, 그리고 관상기도라고 하는 자기 수련 기도방법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들이 신비한 경험을 했던 것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종들에게 알리시고, 그 종들을 통해 당신의 뜻을 자기 백성들에게 전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사건이었다.

 

성경은 하나님의 종들이 경험한 이런 신비한 체험에 대해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다거나, 객체와 주체가 하나가 되었다고 말하지 않으며 그런 정황조차도 나타내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들은 창조주이신 거룩하신 하나님의 가히 이를 수 없는 영광 앞에 피조물 된 하나의 객체로서 두려움으로 주님을 뵈었다.

 

관상가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하나님과 내가 하나 되는 신비한 경험’이 실제로 하나님과 그들이 하나 된 것일까? 앞서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경우와 비교해 보자면 관상가들이 하나님과 하나 된다는 경험은 내적 경험이든 외적경험이든 실제로 하나님과 하나가 된 것이 아니라, 종교적 절정의 어떤 감정적 직관적 경험을 주님과 하나가 되고 싶어하는 체험을 하고자 하는 자신들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그렇게 말하는 자기 확신에 불과하다.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 됨’은 관상가들이 말하는 하나 됨과는 다르다. 우리가 주님과 하나 되는 길은 주님 안에 있는 것, 즉 포도나무이신 주님께 붙어 있는 것이다. 곧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길은 주님의 계명을 지킬 때이다(요 15:1-10).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한다”(요15:10)고 말씀하셨다.

 

또한 관상으로 기도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모든 관계를 성찰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것이 진정한 기독교의 세계관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언뜻 보면 이것이야말로 최고의 선같아 보이고, 이보다 더 이상적인 것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또 무슨 사상인가?

 

교인들이 쉽게 도달하기 어렵고 소위 그들이 말하는 ‘중보기도’ 이상의 훈련이 된 사람들에 한하여 자기 혼자 가정에서, 또는 그들이 지어 놓은 영성수련장에서 이교도의 도사들처럼 오랜 세월 수련해 도달해야 하는 굉장한 수준의 높은 경지를 논하는 것 같아서 그 고상함의 매력에 이끌려 미혹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4. ‘모든 기도가 본질적으로 관상기도’라는 말의 허구성.

 

예장 통합 측 J대 R 교수는 2007년 05월 16일의 인터뷰 기사에서 “관상이 란 하나님과 친밀한 삶”이라는 제목 하에 관상기도를 묻는 뉴스엔조이 기자 에게 “관상기도는 없다”라는 도발적인 말로 시작하지만 사실 그는 모든 기도가 다 관상기도라고 말하고 있다.

 

R 교수는 관상과 관상기도를 구분해야 한다고 말하며, 계속해서 “관상은 방법이 아니라 상태를 말한다. 성서뿐만 아니라 모든 삶의 영역에서 그리고 전 피조세계를 통해서 스스로 드러내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관상적인 체험 속에서 하나님과 친밀한 삶은 형성한다. 그러기에 모든 기도는 본질적으로 관상적이다”라고 주장하였다.

 

여기에서 R 교수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관상’으로 덮어씌우고 모든 기도를 ‘관상기도’로 덮어씌우고 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성과 관련된 것들을 모두 ‘관상’이라 대체하고,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기도를 ‘관상기도’라고 대체하자는 주장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도 관상기도요, 주님이 하신 기도도 관상기도요, 사도들이 드린 기도도 관상기도이며 묵도, 합심기도, 통성기도, 부르짖음의 기도 등 모든 기도가 다 관상기도라는 말이 되고 말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신영지주의와 다를 바 없다. 그것을 모르니 미혹이 따로 없는 것이 아닌가?

 

R 교수와 같은 관상가들의 언어적 유희를 보면 그 얼마나 기상천외한 문구를 사용하고 있는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는 관상의 성경적 근거들을 제시하지 않으면서도 마치 성경적인 것처럼 치장하여 덮어씌우고 뜬구름 같은 소리만 그럴듯하게 전개하니 많은 사람들을 더욱 혼란스럽게 하고 있을 뿐이다.

 

5. 관상기도는 성경계시의 충족성과 종결성을 부정하는 것.

 

‘성령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거듭나게 하시고, 말씀으로만 성도를 바르게 성숙케 할 수 있다’는 말씀을 내려놓고 관상가들이 실천하는 4단계 관상에서 신, 구약 성경 그 어디에서도 발견된 사실이 없는 ‘관상’이란 용어를 새삼 끼워 넣어서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하고 그의 음성을 듣겠다고 하니 그 얼마나 황당한 일이며 모순인가?

 

사도 바울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17)고 했다. 그러나 이 시대의 관상가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된 모든 성경 말씀의 충분성(딤후 3:16-17)을 믿지 못하므로 ‘관상’이란 이교도의 용어를 삽입하여 새로운 반전을 도모하고 있는 것이다.

 

호세아서에서는 하나님이 탄식하시기를 “내 백성이 자기 하나님의 지식이 없어 망하는구나” 하였고, 예수님은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라고 기도하셨고,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골3:16)라고 가르쳤고, 사도 베드로 역시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벧전 1:24-25)고 하였다.

 

우리가 기도를 할 때 “주님, 오직 세세토록 있을 유일한 말씀이 내 영혼 속에 채워져 하나님과 하나님의 독생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알게 하여 주소서. 성령님이 저를 주관하셔서 내 영혼에 채워진 말씀의 능력으로 인하여 주님의 성품을 닮아가 삶에서 작은 예수로서의 향기를 품게 하소서…”라는 내용으로 말씀을 바르게 묵상하기 위한 기도를 한다면 내면의 세계가 하나님 은혜로 충만한 것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영성신학이니 뭐니 하면서 기도의 방법론을 말하기 이전에 성경 말씀의 본질이 지향하는 바, 기도의 본질이 무엇인지 바로 알아야 할 것이다.

 

6. 관상가들의 자유주의 다원주의 포용주의 신학적 해석.

 

기록된 66권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찾아오실 때마다 감사할 일이지 무엇 때문에 성경말씀을 제쳐두고 촛불을 밝혀 놓고 구도자의 심정으로 자기 스스로 애써서 하나님을 찾아가 만나려는 수련을 한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

 

관상하는 영성가들이 촛불을 사용하려는 행위는 무슨 이유일까? 촛불은 원시종교로의 회귀인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모더니즘의 이성주의를 배격하는 감성주의)은 원시종교로의 회귀를 요구한다. 이러한 관상기도의 다양한 행위는 상호 종교간의 벽을 허물 수 있다.

 

그들의 말대로라면 성경 없이도 이교도와 동일한 자리(미국의 영성수련장 ‘샬렘’에서는 이미 다종교가 함께 영성 수련을 하고 있다)에서 종교행위를 함께 시행할 수 있는 관상을 이용하여 서로 대화하며 종교간 통합을 유도하게 된다. 결국 관상이 세계 종교 일치(종교다원주의)로 가려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첫 단초(端初)가 아닌가 한다.

 

이미 한국의 유명한 몇몇 교회에서는 ‘관상당회’ 시간에 당회원들은 당회 주제에 대한 대화가 일체 없다고 한다. 아예 아무런 말도 없이 침묵으로 일관하게 하고 당회를 끝낸다고 한다. ‘초에 불을 붙이는 순간 성령의 임재를 상징’한다며 촛불을 켜고, 두 개의 주먹크기만한 종을 갖고 임재지기들로 하여금 관상 종교의식을 시도하게 하여 관상기도와 관상회의 등과 같은 방식으로 그 열기를 더해 가고 있는 실정이다.

 

성경 말씀까지 내려놓고 마음을 비우며 하나님을 만난다는 기막힌 세상(그래서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요설이 나오는 것이다)을 구현하겠다는 관상가들의 입장을 보면 무척 안타깝다.

 

만약 그들이 예수를 믿는다면 성령님께서 그 안에 내주해 계실 텐데 그들이 마음을 비운다면 큰 일이 날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귀신이 와서 보니 그 집이 깨끗이 청소되어 빈 것을 알고 가서 다른 일곱 귀신을 데리고 들어 갈 것이다. 물론 마음을 비운다고 성령님이 들어오시고 마음을 채운다고 나가시는 분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성령께서 항상 내주해 계시기 때문이다.

 

좌선요가의 단계로 마음을 비우고 호흡, 즉 들숨에 성령님이 들어오고 날숨에 죄를 내보내고 하면서 어떤 경지에 이르러 하나님을 만난다고 하니 도대체 그 경지에서 만나는 실체가 무엇이란 말인가?

 

관상가들이 말하는 성령은 성경에서 증거하는 성령님이 아니며 그들이 어떤경지에서 만나는 것은 분명 성경적 하나님이 아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그 어떤 기술이나 훈련으로 도를 닦아서 들어오고 나가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채우지 아니하고 그 마음이 비어 있는 데는 성령님께서 계시지 않는다. 성령님이 분명히 안 계시니까 마음을 비우고 성령을 모신다는 소리가 나오는 것이 아닌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여 죄 씻음 받고 성결케 된 자에게 성령님 이 계시고 주님의 자녀로 살면서 죄를 짓더라도 회개하여 주의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히 4:16).

 

관상에 관하여 성경적 근거를 제시 하였던 H대 K 교수도 오해하고 있는 것같다. 성경은 마태복음 5장 3절에서 ‘자기 부인’을 말하고 있다. 이를 불교의 무아(無我)나 유교의 ‘사(私)를 버려라’나 도교의 ‘오상아’(吾喪我 : 나를 잃어버림)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여타 종교에서 추구하는 것의 결국은 “나는 없다”라든지 “마음을 비운다”라는 상태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자기 부인’의 상태는 ‘죄인’ 이라는 존재가 전제된다. 죄인중의 괴수인 ‘나’라는 존재가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주님은 당신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는 그 죄인, 자기를 부인하는 그 죄인에게 찾아오셔서 의롭다고 인쳐 주신다. 그리고 그 죄인은 자신을 의롭다 하신 그 주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것이다.

 

빈 마음이나 ‘나’라는 존재가 없는 상태에서 성령이 임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한 죄인에게 성령이 임하신다. 이 또한 인간이 성령을 받을 수 있는 이유나 조건이나 방법이 아니라 주님이 미리 정하시고 홀로 행하신 결과일 뿐이다.

 

아울러 성경에서 하나님 앞에서 “잠잠하라”든지, “가만히 있어라”든지 하는 말씀은 말을 적게 하고 떠들지 말고 침묵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철저한 ‘자기 부인’을 의미하는 것이다.

 

7. 유혹이 전개되는 통로를 주의하자! .

 

21세기에 진입하여 끊임없이 알게 모르게 관상기도가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 논쟁의 핵심은 그것이 성경적인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것이야말로 가장 경건하며 성경적인 기도라 하고, 주로 ‘경험을 통해서’ 강력하게 주장한다. 반면 어떤 이들은 다원주의적인 경향을 발견할 수 있다며 매우 주의할 것을 말하고 있다.

 

우선 관상으로 하는 이런 관상기도방법(통합측 J대 R 교수는 태도라고 말하지만 분명히 ‘방법’이라고 볼 수 있는 요소가 있다)이 유행하게 되는 사회적인 흐름을 살펴보면 소위 마음을 다스림으로 성공하는 세속 사조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이른바 철저한 성경적 자기부인의 삶을 살아가는데 익숙치 않은 ‘먹고 살만한’ 지성인과 중산층 쯤의 교인들이 이러한 맥락에서 상당히 호응하는 것 같다. 그리고 이것을 뒷받침해주는 실력이 탄탄한 신학교 교수들과 유명한 목회자들이 비성경적인 근거를 근거랍시고 제시하며 효과를 입증하여 이른바 ‘영성신학’의 주된 흐름으로 자리매김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항상 유혹이란 ‘낯선 언어’를 선봉장으로 하여 ‘보다 새롭고 좋아 보이는’ 하나의 흐름을 조장해 내게 된다. 예를 들어 ‘경건’이라는지 극히 성경적인 용어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것을 그 의미도 애매모호하고 충분히 다원주의적으로 나아갈 수 있는 ‘영성’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들어오자

 

‘경건을 경직으로 오해하여 질식할 듯한 상태에 있던 자’들이 마치 해방군이 온 것 마냥 ‘밀고 들어’ 왔다.

 

이러한 결과는 결국 경건을 질식시키고 영성을 추앙하는 교묘한 배도적 베이스 캠프를 설치하는데 조금의 부족함이나 주저함도 없이 은밀하게 진행되기 마련이다. 게다가 성경적으로 철저하지 못한 교수들이나 목회자들이 무언가 새로운 유행을 불러 일으켜 ‘경건을 이익의 도구로 삼고 싶어 하는 이들’ (딤전 6:5)의 이해 조건과 맞아떨어지면 이는 곧바로 기독교계의 새롭고도 강력한 도구가 되고, 적당하게 손질하면 쓸 만한 프로그램으로 탄생하여 넉넉한 재정을 충당하는 요소도 될 수 있다.

 

그렇게 해서 등장한 것들이 이른바 ‘영성에도 색갈이 있다’는 류의 사상이나 레노바레 운동, 관상기도 등이다.

 

우선 관상기도만 하더라도 그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면 이는 하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와 비슷하나 결국은 다른 길로 인도하는 극히 교묘한 유혹이다. 물론 이들의 가르침이란 관상가들이 볼 때 기도에 대한 기본 자체도 잘못 형성되어 일부 교회가 그런 것처럼 소위 막가파식으로 울부짖고 시끄럽게 ‘따따 부따’ 기도(?)하는 그것에 대한 반작용의 대안으로 나온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신바 하나님과의 진실한 대화,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에 따른 실천, 마음을 살피며 자기를 부인하는 태도, 말씀 묵상에 따른 내용을 붙잡는 의지적인 간구 등으로도 충분히 성경적인 기도가 가능하다.

 

그런데 이런 기도를 성실하게 하지 않고 아버지되신 하나님과의 친밀한 대화가 부족하니까 기도에 대해 무엇인가 부족하다고 느끼게 되고 새로운 방법론 을 찾다 보니 해아래 새 것이 없음에도 ‘무언가 신선한 것이 존재하고 있다’고 오해하기에 이른 것이다.

 

마치는 말.

 

우리들이 살고 있는 지금의 영적 세계는 참으로 혼돈의 시대로 치닫고 있다. 그에 대한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철저히 성경적인 신앙으로 무장하지 못한 기독교 지도자들의 영적인 흔들림이다.

 

이들은 분명히 비성경적인 열매를 보고서도 엄청난 규모로 성장해버린 오순절 주의와 성령 운동의 세력 앞에 자신의 빈곤함을 느끼는 듯하다. 그리하여 연합해서는 안 될 자들과 함부로 연합을 선언하고 실천하며, 받아들이지 않아야 할 사상과 사조를 거리낌 없이 수용할 뿐 아니라, 그들의 영향력과 인격을 단순하게 인정하며 따르는 수많은 성도들을 자신도 모르게 잘못된 길로 인도하고 있는 영적 시력저하의 상태에 빠져 있는 것이다.

 

수많은 개혁주의자들과, 성경을 사랑하는 동료들과 후진들이 이를 지적하고 있지만 이미 대세는 우려할만한 상황으로 진입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중심에 바로 관상기도를 하는 유명한 목사와 교수들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영향력이 막강한 지도자들이 영적 분별력을 상실할 때 교회가 얼마만큼 영적 혼동과 피해를 입게 될지 심히 우려가 된다.

 

진실로 성경적인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이제 엄청난 영적 전쟁을 치를 각오를 가져야만 하는 때가 되었다. 많은 이들이 교묘하게 흐르는 유혹의 강물을 따라 배도의 대해로 서서히 나아가고 있지만 그러한 것을 분별할 수 있는 시력마저 상실한 지금의 상황은 안타까움 그 자체이다. 아무쪼록 깨어있는 소수라도 우리의 신앙 세계를 파고드는 유혹의 통로를 잘 분별하고 끝까지 말씀을 붙잡는 대열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이제 개혁주의 교회의 영적 지도자들은 성경 66권에 기록된 하나님의 메시지를 올바로 깨닫는 법을 성도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부르짖는 간구와 묵도와 묵상이 언제나 성경계시와 조화를 이루도록 그 대안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기독교이단대책협회

 

림헌원 목사 (onestone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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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상기도의 가장 큰 문제는 이교성과 종교혼합성

 

 

한국성경신학회는 ‘불건전한 신앙운동에 대한 성경신학적 검토’라를 주제로 지난 2일 오후 신앙세미나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는 ‘관상기도’에 대한 진단과 대안이 다뤄져 눈길을 끌었다.

 

▲김성봉 목사는 최근 관상기도에 이교도적인 요소가 혼합됐음을 우려하면서 성경적 가르침에 충실한 기도가 영적으로 유익함을 강조했다.©뉴스미션

 

발제자로 나선 신반포중앙교회 김성봉 목사(대신총회신학연구원)는 최근 여러 목회자들이 ‘관상기도’를 추구하고 있지만 여러 면에서 유의할 점이 있음을 강조했다.

 

관상기도가 단순히 ‘묵상하는 기도’, 달라고만 하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뜻을 헤아리는 기도일 때 그것은 유익한 기도가 될 수 있지만 실상이 그렇지 않은 것을 우려한 것이다.

 

김성봉 목사는 관상기도의 이교적이고 혼합적인 양상으로 문제점으로 꼽았다.

 

김 목사는 “관상기도에 대한 불교와 힌두교의 영향은 명백하다”면서 “‘이탈’, ‘변이’, ‘비움’, ‘계발’, ‘각성’ 같은 단어들이 관련 도서에 많이 등장할 정도”라고 밝혔다.

 

그는 관상기도를 도입하기 위해 한 목회자 부부가 미국의 종교다원주의 뉴에이지 수도원에서 영성 훈련을 받은 것을 언급하면서 “일부 단체들이 기독교단체 같아 보여도 ‘종교’의 경계를 초월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최근 새로운 기도의 분위기 정당, 성경의 가르침에 더 귀 기울여야

 

또 일부에서는 관상기도를 ‘침묵기도’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인도의 명상과 주문식으로 짧은 내용을 반복해 중언부언하는 형식을 덧붙이고 있다는 점도 언급했다.

 

김성봉 목사는 “관상기도는 이교도의 명상에 말씀 몇 구절 얹어 놓은 것으로 초월적 명상행위와도 맥을 같이 하는 경향이 있다”며 “말씀 사이에 관상의 의미를 끼워 넣으려는 시도 자체가 미혹이요 함정이 아닐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성경적인 가르침과 전통 안에 머무르는 것이 영적으로 안전하다고 말할 수 있다”며 “지금까지 통용되던 “겉모양이 같더라도 속의 정신과 내용이 다를 수 있기 때문에 기도방식을 도입할 때 배경을 살펴 조심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한편 최근 기존의 기도 분위기에서 새로운 기도방식에 대한 요구에 대해서는 긍정적 현상이라고 보면서 “성경의 교훈을 통해 고요히 묵상하며 뜻을 헤아리는 기도라면 얼마든지 드려도 합당하다”고 강조했다.

 

성경은 부르짖는 기도와 아울러 조용히 묵상하듯 하는 기도, 달라고 하는 기도와 아울러 주의 뜻을 헤아리는 기도 모두를 언급하고 있음을 볼 때 어떤 기도든지 성경의 교훈 아래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성경신학회는 신반포중앙교회에서 2일 신앙세미나를 열었다.©뉴스미션

 

발췌 : http://blog.daum.net/googood1/16889942?srchid=BR1http%3A%2F%2Fblog.daum.net%2Fgoogood1%2F168899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