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 이단 등

조직신학적 입장에서 본 가계저주론 비판

Sola. 2023. 11. 4. 06:00

 

조직신학적 입장에서 본 가계저주론 비판

 

  김향주 목사

 

 

1950년대와 1960년대의 미국의 자유주의는 교회와 신학교들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날로 교회를 다른 단체에 팔아 넘기게 되고 신학교는 자유주의를 표방하게 되어 4∼5명의 학생들을 데리고 명맥을 유지하는 신학교도 있었다. 사회는 자꾸만 타락의 늪으로 빠져 들어가고 사람들은 문명에 대한 회의가 깊어만 갔다. 이때 1970년대 대중 심리요법으로 나타난 적극적 사고 방식은 교회에 깊이 침투되어 그것 자체가 복음인 것 같이 느껴졌다. 그러나 교회와 사회의 타락은 깊어만 갔다.

 

이때 Fallwell 목사의 미국의 도덕 우선주의는 갑자기 1920년대 불어닥친 근본주의 운동을 연상케 했다. 이제 미국 교회는 강해 설교가 그 어느 때 보다도 강한 바람을 몰고 왔다. 그런데도 New Age 운동으로 미국교회를 강타하더니 근래 가계 저주론이 바람을 일으키기 시작하였고 샤머니즘과 토속신앙에 뿌리를 둔 한국종교와 접목하기 쉬운 한국교회에 동요을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가계의 저주론에 대한 책을 읽은대로 몇가지 문제점을 들어 역사적 교회가 고백한 신앙고백에 의해 좁은 지면을 통해 논해 보고자 한다. 논지의 관계상 각 주를 세밀하게 달수 없음을 유감으로 생각하며 다음과 같은 몇 가지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성경적 해답을 얻고자 한다.

 

1. 가정의 문제를 부모의 나쁜 행동을 답습하는 경우 에스겔 16:44절의 '속담 하기를 어미가 어떠하면 딸도 그러하리라.' 라는 내용을 나쁜 행실이 자식에게 대물림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가계 저주론자들은 '창26:24, 출20:5, 렘15:4, 삼상2:25. 31-33. 삿2:19. 왕상14:22, 렘7:26, 벧전1:18. 마23:32-36, 눅11:47-48, 행7:51-52' 등의 말씀을 들어 죄의 문제를 유전적 입장으로 해석하려고 한다.

 

이 문제에 대해 두가지의 잘못된 점이 있다고 생각 되어진다.

첫째는 죄에 대한 전가문제이다.

죄의 전가란 아담의 행위언약의 파괴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게 된 것은 아담은 행위언약의 대표자로서 범죄하게 되어 아담의 죄책(Guilt)이 인류에게 전가 됐다는 의미이다. 아담의 죄가 후손에게 전가됐다.는 말은 죄가 인간속에 오염되어 유전적이 되었다는 말이 아니고 법적 책무를 지고 죄책이 대대로 내려온다는 뜻이다. 그래서 아담의 후손들이 나면서부터 악인으로 태어나게 된다는 말이다(롬5:12, 렘16:34, 17:4, 시32:52. 롬4:7-8, 고후5:190. 도덕율을 어기면 죄가 전가된다는 사실을 의미하는데 전가라는 의미는 아담이 대표적으로 행위계약을 어긴 죄가 그 후손에게도 유죄로 똑같이 적용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가계 저주론자들은 부모의 죄가 양적으로 질적으로 똑같이 유전에 의해 흘러내려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즉 한 사람이 악한 죄를 범한 것은 특별히 그 조상에서 범한 죄가 있어서 그 죄가 자손에게 대 물림 된다고 생각한다. 이는 성경적으로 위배되는 견해이며 행위언약에 대한 대표죄로서의 죄책이 법적으로 모든 삶에게 전가 된다는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6:3-7)의 견해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이론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원죄를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죄에 대한 훈련이나 가르침이 전혀 없어도 금방 죄를 답습하게 되며 선을 아무리 가르쳐도 악에 대한 경향성으로 빠져들고 만다. 그것을 유전으로 해석하는 견해는 상당히 문제가 있다. 부모가 죄를 범하면 죄를 가르치지 아니해도 자식들은 금방 죄를 닮아가기 마련이다. 그것은 부모뿐 아니라 친구를 잘못 만나도 그렇고 TV나 기타 매스컴을 통해서도 급격히 범죄가 늘어가고 있는 현실이다. 그리고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열조보다 더 큰 악을 행하였다고 책망하는 것은 유전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죄악의 심각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또한 더 큰 문제를 야기시키는 주장이 나오고 있는 데 그것은 '내적 치유와 성화의 관계'를 말하고 있다. 유전된 죄를 끊고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 가는 것이 성화이며 성화를 전진시키는 과정이 내적 치유라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이라면 성화에 대한 성경적 교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성화에 있어서 어떤 경우에든지 원죄 문제를 해결할 길이 없고 점진적 성화가 이 땅 위에서 이루어질 쁜이다. 인간에게는 항상 잔존죄가 남아 있어서 인간을 죄 아래로 끌고 와서 범죄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가정사역의 내적 치유를 통해 성화를 전진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내적 치유가 수술방법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는데 그런 방법이 성경적인지 전혀 납득할 수가 없다.

 

 

 

2. 그들은 가정의 불행한 사건을 인과보응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환난과 재난을 하나님의 뜻과 관련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전쟁이나, 기근이나, 가난이나, 질병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뜻은 선하고 기뻐하시는데 있다는 주장이다. 이는 하나님의 섭리적 신앙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상이다. 이는 근본적인 사상을 추적해 보면 모든 사건을 축복을 위해 하나님이 존재의 가치가 있다는 번영신앙에 기초를 두고 있다. 적극적인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어도 무엇인가 가정에 재난이 있을 때 신학적 해답을 찾기 어려우면 조상의 죄에서 그 근원을 찾아보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적극적 사고 방식에서 인과보응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신학적 방식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무엇을 계획하고 그것이 시공간 세계에서 문제가 있을 때 바꾸어지는 것이 아니다. 시간 이전에 세운 계획은 하나도 빠짐없이 시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이다. 그러므로 불행과 고난도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악마의 활동까지도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가 환난을 당하거나 범죄로 인해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일이 일어날지라도 이는 배후에 주님의 깊은 뜻이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들은 모든 불행을 저주라는 통로를 통해 들어온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2원론의 입장이다. 즉 섭리를 부정하는 조상인 가족의 죄로 인해 후손이 저주를 받는다는 인과보응의 범죄를 적용하는 사상이다.

 

잘 믿는 조상을 가진 자녀가 타락하여 불행에 처한 경우라든가, 심지어는 본인이 알고 있는 어떤 운명 철학자는 그 부모가 참으로 신실한 목회자였고 그 조상들도 대대로 신실한 기독교 집안이었고 모두가 기독교인으로 좋은 일들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자녀중 어떤 이들은 가정적으로 어려움이 많았고 점을 치는 운명 철학자가 되었음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거기에는 우리가 모르는 섭리가 있다는 것이다. 만약 인과보응의 법칙으로 저주론을 주장한다면 한번 신실한 기독교인이 된 자녀들은 모두가 축복만 받는 자년들이 될 것이고 한번 하나님을 불신하고 악한 죄를 범한 사람이 있으면 그 자녀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저주의 자손들만 나타날 것이다. 우리가 알 것은 비록 악마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주권가운데 그 분의 뜻대로 악마를 사용하시어 그분의 뜻을 이루어 가고 계심을 명심해야 한다.

 

 

3. 가정의 불행을 저주로 말하면서 영적이냐? 육적이냐?의 구분이 애매하다. 대부분의 저주론은 가정의 현실 문제를 들고 나온다. 현세에서의 재난이나 범죄의 사건을 영적인 의미로 보는데 미흡하다. 성경적 저주의 개념을 영적으로 말하느냐? 아니면 육적으로 말하느냐?를 신학적으로 정의를 내려야 할 것이다.

 

우리가 선지자들이나 사도들분만 아니라 2천년 교회사를 통해 신앙의 선조들을 탐구해 보면 어떤 의미에서는 그들이 저주를 받은 사람들처럼 느낄 수도 있다. 그들은 한결같이 고난을 지고 일생을 살다가 갔었기 때문이다. 물론 저주론자들도 복과 저주는 본질상 영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이 자가 모순을 범하는 것은, 저주는 사탄의 공격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며 복은 하나님의 보호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더욱이 모든 사건을 하나님의 섭리적이며, 허용적이며, 하나님과 인간의 자유의지는 동류적이라는 데는 전혀 동의하지 아니하고 모든 일을 2원론적이며 원인과 결과론으로 몰고 가고 있으므로 이는 비성경적이 아닐 수 없다.

 

성경은 명제적 진리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타난 의지이다. 그러나 신적 작정은 숨겨진 하나님의 의지이다. 그것은 시공간 세계에서는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우리는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환난이나 범죄를 가계에 흐른 저주로 일관되게 정의하기 힘들다. 깊은하나님의 뜻이 환난이나 범죄를 통해서 나타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참새 한 마리가 떨어지는 일도 하나님의 허락으로 되어지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이런 주장응 하면 물론 말로는 '아멘'이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신적 작정론이나 예정론을 주장하면서 강한 반대를 하는 경우를 보면 그것이 자가 모순이 아니고 무엇인가?

 

 

4. 저주론자들이 주장하는 또 다는 문제점은 축복과 저주는 사용하는 사람들의 소유물이라는 주장이다. 신자는 맹세, 저주, 헌신, 죄와 참상을 통해 온 저주와 속박을 파쇄하는 그리스도의 권세를 가지고 있다는 주장이다. 조상이 사술에 참여하고 바치는 등 조상의 죄를 통해 사탄은 가문을 공격할 수 있는 법적 권리를 부여받았다고 주장한다. 부모들이 사교 조직의 일원일 경우 그들의 자녀들은 정규적으로 사교의 신들이나 사교의 영들에 드려지게 되어 가문의 영들이 각 세대를 공격할 권리를 행사하며 대대로 걸쳐 전래된다. 마찬가지로 부모들이 이단이나 사교 조직의 사탄에게 자신을 드릴 때 악한 영들이 그 가계를 공격 할 수 있는 법적 권리를 부모들뿐만 아니라 자녀들, 또한 손자들에까지 부여된다는 것이다.

 

어떤 저주나 축복은 하나님이나 사탄에게 그 사람의 후손에게 미칠 수 있는 권세를 준다는 주장이다. 눅 9:4-5의 말씀을 들어 예수님이 제자들을 보내어 전도하게 하실 때 그 집에 들어가 축복을 하라고 명하셨다. 만약 그 집에서 제자들을 환영하지 아니할 때는 그 축복을 철회하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기 자신을 저주했다면 저주의 말에 대한 권세를 주장하여 그것을 무효화 시킴으로서 그를 묶고 있는 저주의 세력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는 데서 근원을 찾아 저주권을 주장하고 있다.

 

위와 같은 사상은 축복권에 대한 최종 결정권이 인간에게 있는 것처럼 여겨질 수가 있다. 눅 9:4-5의 말씀은 축복권에대한 말씀이 아니라 주님을 영접하지 아니하는 자에 대한 증거를 삼으라는 내용이다. 만약 이런 식으로 성경을 해석한다면 Contextualism을 넘어 우의적 해석 방법이 될 것이며 전혀 엉뚱한 성경 해석이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물론 성경에 믿음이 좋은 장로를 불러 병든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고 있다(약 5:14-15). 이 말씀은 믿음의 기도가 병든자를 일으킨다는 데 촛점을 맞추고 있다.

 

축복권이 인간에게 주어진 예는 구약의 풍속 율례에 해당되는 말이다. 그것은 메시야를 바라보는 Typology의 교리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예수님이 오심으로 구약의 제사법이나 먹고 마시는 일과 기타 풍속에 관한 율례는 그림자에 그치고 만다(골2:16-17) 그리고 오순절 역사에 대한 문제는 사도시대에 신약 교회를 세우기 위해 사도들에게 주어진 특별한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 내용은 구약에 예언되어 있었고 그대로 예언이 성취되어진 일이다(욥2:28).

 

그들이 주장하는 법적 권리를 가진다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지 진의를 파악할 수가 없으나 확실한 것은 부모의 악한 행동이 자녀들에게 전수되는데 대한 능력을 가진다는 말로 해석된다. 여기서 우리가 알 것은 부모의 악이 자녀들에게 전수되는 문제는 인간은 본래 악한 죄악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부모의 악을 배우는데는 가르쳐 주지 아니해도 자연히 나쁜 일을 따라가게 되어 있다. 저주나 축복이 사람에 의해 후손에게 미칠 수 있는 권세가 사람에게 대대로 내려가는 것이라기 보다 하나님의 정하심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성경의 입장이다(롬9:13, 15, 17-18, 엡1:4-6)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믿지 아니한 집안에서 태어난 자녀들은 자연히 믿지 아니한 방향으로 성장할 것이다. 하물며 하나님의 선택은 가족적이며 백성을 중요시하는 사역이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보아도 명백한 사실이며 나아가 믿는 사람들을 그의 백성이라는 은혜계약을 적용하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내용은 계약의 내용이 가족적인데 그것이 혈육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가족에 포함된 이방인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할례를 받아 구원에 동참한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더욱이 예수님의 족보에는 상당수의 이방인 포함되어 있으며 인간의 윤리나 도덕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죄인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것은 계약의 내용이 가족적이지만 영적인 면이 주체가 된다는 말이다. 악한 죄에 사로 잡혀 있는 가족이 그 죄가 대대로 후손에게 전수된다는 주장보다는 성경은 오히려 믿지 아니하면 모두가 악한 영역에 있는 영적 분리를 말하고 있다(엡2:1-6, 11-13, 롬1:28-32, 갈5:13-24, 6:7-10). 믿지 아니하면 모두가 저주아래 있다는 진리이다.

 

육신적으로 부모가 극악무도한 삶을 살았다고 해도 그 자녀가 영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백성에 가입되도록 선택을 받았다면 그는 그 부모와 상관없이 저주받은 사람이 아니고 축복받은 사람이다. 조상이 악한 이단에 빠져기 때문에 조상의 죄를 통하여 사탄이 그 가문을 공격할 수 있는 법적 권리를 부여받았다는 것은 참으로 가족의 하나님, 백성의 하나님에 대한 계약론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비성경적 주장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은 사탄을 그의 뜻대로 사용하시기 때문에 성도를 훈련하는 도구가 된다. 사탄을 사용하시어 그의 듯대로 성도를 강하고 담대하게 훈련시키기도 한다. 사탄에 대해서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하나님과 사탄의 관계는 이원론(Dualism)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도와 마찬가지로 사탄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것은 성도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영광을 돌리고 사탄은 하나님을 떠나 불순종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탄의 관계를 이원론적인 대립 관계로만 보게 되면 신적 작정론과 예정론과 섭리론을 부정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성경은 명백하게 주장하고 있다. 이 세상은 어는 작은 사건, 성도의 구원, 그리고 모든 일이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과 섭리를 벗어나지서 생길 수 있는 일이 있는가? 없다고 주장한다(욥38:2, 사14:26. 27. 46:11, 렘23:18, 51:11, 잠30:32, 사53:10. 시51:19. 사49:8, 행2:23, 4:28. 히6:17, 헵1:11, 마11:26, 눅2:14, 엡1:4-9, 시33:11, 잠19:21, 행15:18, 딤후1:9, 욥23:13, 눅22:22, 벧전1:2, 창18:19, 암3:2, 호3:2, 롬8:29, 11:2, 고전8:3, 갈4:9, 롬9:5-1, 행4:28, 고전2:7, 요17:6-9, 신4:37, 호13:5, 삼상10:24, 마22:14, 살전1:4, 요6:70, 벧후1:10, 행13:48, 딤후2:21, 시110:3, 빌2:13, 마20:14-15, 유4, 마11:25-26). 선택의 교리에 의하면 어떤 악한 부모를 가진자라 할지라도 택정딘 사람은 축복 받은 사람이다. 또한 어떤 선한 부모를 가진 자라 할지라도 택정 되지 아니한 사람은 축복받은 사람이 아니다.

 

또한 우리가 반드시 규정하고 넘어가야 할 사항은 섭리론이다. 섭리는 시간 이전에 하나님의 내적 사역으로 인해 정하신 뜻이 시공간세계에서 현실화되는 과정을 말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섭리는 숨겨진 뚯이 있어서 현재의 재난이나 고통은 인간의 단편적인 판단으로 쉽게 결정하기 어려운 점이 많다. 지금 당하는 재난이 우리가 보기에는 부모의 악한 행위로 인한 저주로 볼 수 있으나 사실은 하나님께서 재난을 통해 그분의 듯을 이루려는 깊은 섭리가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지금 보기에는 저주이나 결국은 영적으로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가계의 저주론자들이 주장하는 이론은 다 한결같이 현재의 재난이 영적으로 어떻게 승화될 수 있느냐?라는 내용에 대해서는 섭리론을 적용시키기 보다는 인과보응 내지 가계 저주의 전수론에 그치고 만다. 이는 이방종교들도 주장하는 내용이다. 성경은 모든 일을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고는 어떤 일도 일어날 수도 없으며 주님의 뜻이 아니고는 절대로 일어나는 일이 없다고 주장한다. 영적 축복을 받은 가정이라도 현세에서 많은 수난을 당할 수도 있으며 아무리 평안한 가정이라도 영적으로는 하나님과 전혀 거리가 먼 경우가 있다. 오히려 축복으로 생각했던 일들이 저주가 되는 경우가 있고 저주라고 생각했던 일들이 축복이 되는 경우가 허다한 사실을 우리 믿는 사람들은 명심해야 할 것이다.

 

5. 성경해석학적 적용의 문제점이 있다.

저주론자들의 주장은 다음의 몇가지 문제된 해석학을 주장한다.

1) 구약에서 가계나 조상을 통해 후손에게 임하는 축복과 저주는 반드시 그대로 되어진다는 주장이다(출13:11, 눅1:72-73, 신10:15, 시115:14, 창12:2-3, 왕상11:11-12, 시104:17, 잠20:7). 구약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후손에 대한 문제는 그대로 되어지는 경우가 사실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가계저주론도 구약처럼 같이 적용되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 그러면 가계저주론자들이 우리를 향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라고 공격할 수도 있다. 성경은 분명히 그대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대로 믿어야 한다. 그렇게 주장할 것이다.

 

그러면 나는 묻겠다 성경대로(구약대로) 매년 양을 잡아 제사 지내는가? 한 여자가 결혼해서 아이 낳지 못하고 남편이 죽으면 둘째 형제에게 시집을 가는가? 물론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면 왜 성경대로 하지 아니하는가? 나도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데 왜 성경을 거부하는가? 라고 반문할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성경의 영감성를 바로 알아야 한다. 성경은 완전 축자영감설은 그 기록의 내용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틀림이 없다는 말이지 받아쓰기식 무오설이 아니다. 성경이 의미하는 하나님의 전달 계시로서의 내용이 전혀 오류가 없다는 말이다. 구약에서 계시로서의 하나님의 말씀은 그림자로서 교훈하는 내용이 많다. 거기서 Typology와 풍속적 교훈과 폐기율례가 나오는 것이다.

 

2) Typology는 모형론으로서 구약에서 나타난 땅의 개념은 천국을 의미하고, 제사의 개념은 예수님의 희생을 의미하고 왕권은 천국의 다스림을 의한다. 그렇다면 가계의 저주의 개념은 그대로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모형론으로 보느냐?의 문제에 당면하게 된다. 이는 아무리 보아도 모형론으로 해석해야 옳다고 본다. 가족을 대표하는 경우는 아브라함에서 그 의미를 찾아야 한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다. 렘31:1을 보면 여호와는 가족의 하나님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가족중에 구원받은 가족은 혈육으로만 아니고 집안에 있었던 이방인도 할례를 받았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으로 여김을 받았다. 이는 가족의 축복론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영적인 면이 모형론으로 결론이 난다.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시는 가족은 아브라함처럼 믿음을 가진자는 누구나 그 백성으로서 취급받는다는 말이다.

 

구약의 율례 문제에 있어서도 제사장직은 히7:18과 벧전2:4-5에 의해 폐기된 율례이다. 그러므로 지금은 예수님이 오셔서 제사장직으로서 구약의 그림자를 실체로 완성했기 때문에 필요없는 율례이다. 오직 우리는 참 제사장 되시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간다. 또한 풍속적 교훈을 보면 창세기에 나오는 한 여자가 결혼해서 아이를 낳지 목하고 장남이 죽은 경우 차남에게 다시 결혼을 하는 문제는 지금은 실행할 수가 없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오셔서 구약의 가계로 이어지는 족보의 개념이 그림자로부터 실체로 완성돼 버렸기 때문이다(막12:19-25). 그러면 출20:5의 수천대까지의 축복과 3-4대까지의 저주론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이는 하나님의 가족으로서의 백성이라는 개념을 바로 알아야 할 것 같다.

 

구약은 율법이요, 신약은 복음이라는 한정적인 해석의 방법을 도입하는 경우 성경의 통일성을 보는데 문제가 생긴다. 성경은 구약부터 복음의 우월성을 말하고 있다. 출20장의 10계명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실 때 먼저 서론에서 애굽땅에서 구하여 낸 여호와를 강조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 능력으로 구출받은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출받은 것을 강조한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과의 계약은 은혜로 맺어진 것이라는 의미이다. 은혜를 받은 후에 하나님을 섬기는 법이 10계명으로 주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수천대의 축복과 3-4대의 저주에 관한 문제는 은혜의 우월성이 그의 백성에게 주어지 것이다.

 

저주론자들의 주장대로 말한다면 한번 악한 부모를 만난 자손들은 3-4대를 거치는 동안 또다시 3-4대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저주의 흐름은 사실상 계속된다는 말이다. 즉 당대의 저주가 2대를 거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2대로부터 3-4대까지는 또다른 연장선에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3-4대뿐만 아니라 수천대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은 부모와 상관없이 축복 속에 들어온 경우 저주론자들의 공식대로라면 해결할 길이 없다. 구약의 백성의 계약은 가족적인 의미가 있는데 이는 예수믿는 한 가족의 모형이며 그러면서 개인구원을 강조하고 있다. 에스겔 18:20을 보면 철저한 개인 구원을 말하고 있다. '이들은 아비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할 것이요, 아비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6. 그들의 주장은 적극적 사고방식을 기초로 한 대중 심리요법을 교회로 이끌어들인 번영신앙과 이단으로 침례 교단에서 규정된 바 있는 귀신론의 신학을 그들의 교리로 삼고 있다. 이윤호박사가 지은 '가계의 복과 저주 전쟁에서 승리하라'의 59Page에 보면 말씀을 불순종하는 사람에는 귀신 들림의 저주가 임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한국에서 한때 유행했던 귀신론의 신학에 근거한 이론이다. 낙태를 했거나, 자살을 시도했거나, 동성연애에 빠진자들이 악한 영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이는 귀신들린 사람들로 규정하고 있다.

 

이런 사상은 모든 불의의 세력을 귀신론으로 몰고가는 입장이다. 그러면서 귀신론을 저주론과 연관시키고 있다. 이미 언급했듯이 모든 불의는 하나님과 반대됨으로 악마의 역사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뜻가운데 있다. 저주와 귀신의 역사을 연관시키는 이론은 전혀 성경적이 아니다. 성경을 보면 귀신들린 자의 형편은 정신병자와 같은 모양이었다. 귀신을 나가게 함으로 나았다. 저주론자들은 저주라는 개념을 가계의 문제로 보고 있다. 악한 영들이 최소한 일정 기간동안 부모들로부터 자녀들에게 전래되고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나는 한 사람이 귀신들리면 그 가족들도 다 귀신이 들어야 한다는 개념으로 이해되어진다.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적극적 사고 방법에 기초한 저주론자들은 가계의 복을 차단하는 가계의 죄를 제거할 것을 주장하는데 성도들은 축복 받은 자들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신자들이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저주의 세력 가운데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죄를 제거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묻고 싶은 것은 인간의 힘으로 원죄를 제거할 수가 있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성경의 대답이다(롬7:12 이하). 적극적 사고방법을 기초한 저주론자들은 '성도는 본래 하나님의 축복을 받도록 돼있고 또 하나님은 그것을 원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저주를 물리쳐야 하며 그것이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잘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성도에게 축복을 주신다는 것이다.

 

이와같은 사상은 고난에 대한 섭리론을 전혀 고려하지 못하는 반쪽 복음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현세적 축복만이 참 복으로 이해되는 현실적 번영주의 신앙이라고 규정 지을 수 있다. 그렇다면 순교자들은 저주받은 자들인가? 그들은 가계의 저주가 흘러 내려와서 온갖 수난과 고문 끝에 죽어갔단 말인가? 또한 선지자들과 사도들은 저주를 받은자들인가? 오히려 성경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란이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5:35)라고 강조하고 있지 아니한가? 현세의 어려운 문제를 영적 통찰력을 가지지 아니하고 단편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길을 안내하는 눈먼자가 아닌가?

 

우리는 성경의 내용을 교리사적으로 신앙고백에 의해 탐구해보아야 한다. 2천년 교리사를 보면 한때 성령의 능력을 받았다고해서 세계교회를 삼킬 듯이 바람을 일으켰던 2세기의 두 여인들은 나중에 어떻게 되었는가? 50년도 채 가지 못해 안개처럼 사라지고 말았지 아니한가? 오늘날 귀신론이나 적극적 사고 방식도 과거 중세에 천사론을 연구했던 철학자들이 이미 그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우연이었던가? 시대가 변함에 따라 불가능은 없다는 주장하던 인간 영웅들과 사람은 무엇이든지 마음먹으면 된다는 18세기 인간 이성을 높이던 철학자들을 생각해 보았는가? 무심코 그런 비성경적인 사상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끌여들여 여과없이 받아들이고 그리고 더욱 심각한 것은 그것이 성경주의라고 확신하여 성도들을 유혹하는데 있다.

 

 

우리는 이제 한국교회가 왜 발전이 정체 상태에 접어들었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과거에는 교회 성장학도 없었고 갖가지 신학에 대한 학문도 없었던 때에 오직 성경, 오직 기도로 한국교회를 세계에 우뚝 서게 만들었지 아니한가? 교회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고 그것을 순교의 정신으로 지킬 때 가장 영광을 드러냈지 아니한가? 그리고 실제로 수많은 순교자들은 성경을 고백하는 교리에 의해 그들의 목숨을 분토처럼 여기고 주님을 Te Deum이라 부르며 죽어갔지 아니한가? 왜 이상한 교리들이 자꾸 한국교회를 침범하고 있는가? 참으로 이것이 저주가 이니고 무엇인가? 오직 성경으로, 오직 주님의 영광만을 위해 한국교회가 이 지구의 종말이 올 때까지 튼튼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 참고문헌 -

·이윤호박사 저, '가계의 복과 저주 전쟁에서 승리하라'

·Derek Prince, Blessings & Curses(Kent, Ingland, 1994)

·Peter Wagner, Confronting the Power

·Ed Murphy, The handbook for spiritual Warfa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