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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직 신앙고백 해설

Sola. 2023. 11. 18. 06:00

 

벨직 신앙고백 해설 (The Belgic Confession A.D. 1561)

 

 

장관섭 목사

 

 

(1)벨직 신앙고백의 역사적 배경

 

이 신앙고백은 남부 네델란드(화란)의 벨기에 지역에서 Guido de Bres에 의해서 작성된 것이다. 특히 화란은 1618년에 도르트 총회를 개최하는 중요한 개혁교회의 요충지었기 때문에 더욱 관심을 끌고 있다. 이런 세계적인 개혁교회의 총회가 집행 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이 지역의 교회들이 사도적이고 어거스틴적이며 또한 칼빈주의적인 개혁신앙을 뿌리깊게 받아들이고 정립했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1561년에 이미 이 화란에서는 개혁교회에서 공적으로 인정받게 된 본 신앙고백서를 작성할 정도로 깊은 신학적 내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또한 16-17세기를 거치면서 유럽의 혼란한 정치, 종교적인 배경 속에서 많은 개혁신학자들이 화란으로 이주해 오면서 화란은 보다 더 철저한 개혁신앙을 정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먼저 정치적인 배경으로는 찰스 5세가 공적으로 이단(개혁교회)을 처형하는 칙령을 발표하고 대대적으로 개혁교회의 성도들을 핍박하기 시작한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이미 1523년에 어거스틴파의 수도승이었던 헨리 보에스(Henry Voes)와 요한 에쉬(John Esch)는 브리쉘에서 말뚝에 묶여 화형을 당하는 순교의 역사가 화란에 있었다. 이들은 죽어 가면서도 “사도신경”과 “Te Deum”을 부르며 죽어 갔던 역사는 개혁교회에 있어서 신앙고백서를 채택하고 지켜간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정신인지를 깨닫게 한다.

 

이런 핍박의 역사는 스페인의 필립 2세에 와서는 더욱 심해져서 그 절정을 이루기도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이런 핍박 속에서 화란의 많은 개혁교회들이 독립교회를 세우는 열매들을 낳게 하였다.

이와 같은 순교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본 신앙고백서는 아드리안드 사라비아(Adrien de Saravia)와 모데투스(Modetus)와 윙켄(G. Wingen)의 도움을 받아서 가이오 드 브레스(Guido de Bres)가 프랑스어로 작성한 것인데, 후에 엔트웝의 왈룬(Walloon)과 보르쥬(Bourges)의 프렌시스 쥬니우스(Francis Junius)에 의해서 좀더 분명한 칼빈주의적 정신이 포함된 형태로 완성되었다.

 

이렇게 작성된 본 신앙고백서는 개혁신앙에 매우 비관적인 필립 2세에게 보내졌다. 이것을 필립 2세에게 보낸 이유로는 당시의 개혁교회의 성도들이 필립 2세의 핍박 정책에 항거하는 중요한 저항의 방식이기도 했던 것을 엿볼 수 있다. 즉 이들은 그가 이것을 읽고 관용 정책을 베풀어줄 것을 기대함과 동시에 거절될 때에는 참되고 바른 신앙정신이 무엇인지를 순교를 각오하고서라도 보여주고자 한 강한 저항 정신의 표출이었던 것이다.

 

이들이 이렇게 저항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시 개혁교회의 신자들이 반역 행위를 하고 있다고 비난을 받고 있었으며, 그래서 10만명 이상이 달하는 자들이 죽임을 당하였으며, 또 앞으로도 더욱 극심한 핍박이 예상되고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이런 표현을 통해서 합법적인 것이라면 정부의 모든 명령에 묵묵히 복종하지만 그렇지 않고 참된 신앙의 정신을 파괴시키는 도전이라면 “이 신앙고백에 표현된 바의 진리를 거부당하느니 보다는 차라리 등에 채찍을 받고, 혀를 짤리며, 입에 재갈이 물리며, 온 몸이 불구덩이에 던져지는 편이 더 낫다”고 할 정도로 이 신앙고백을 통한 저항 정신을 매우 분명히 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개혁교회에서 신앙고백서의 채택에 대한 정신 중에 매우 중요한 정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저항의 원리로서 신앙고백을 표명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즉 일반 사람들처럼 무력이나 폭력으로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참된 진리인 말씀의 순수성을 지키고 드러내기 위해서 이런 신앙을 파괴하는 것에 강력하게 저항하고자 했으며, 또한 이때 저항하는 방식으로 신앙고백을 표명하고 드러내었던 것이다.

 

결국 이런 정신은 개혁신학에 있어서 성경관에 중요한 핵심적 내용이기도 한 것이다. 즉 이미 사도바울이 우리가 싸우는 것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오직 참된 병기로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한 것이 있다(고후10:4)고 지적하면서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지적했던 것처럼 성도에게 있어서 이 땅에서 핍박과 고난을 당할 때 이 땅의 방식대로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드러내는 방식을 제시했던 것이다.

 

이처럼 교회가 신앙적으로 위협을 받고 도전을 받을 때마다 자신의 신앙을 어떻게 고백하고 표명하는가가 중요한 개혁신학의 저항의 원리로 제시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본질적인 내용을 알지 못하고 오늘날 교회가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하고 또한 자신의 신앙고백을 어떻게 표명해야 할지도 모르고 오히려 이렇게 중요한 신앙의 원리로 제시되고 있는 신조의 채택을 버리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인 것이다.

 

특히 우리는 이런 저항의 방식으로서 신조가 채택이 되면서 신조의 신앙적 표명 때문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신조의 역사를 함께 만나게 된다. 즉 신조의 표명을 위해서 순교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왔던 것처럼 신조의 채택이란 것은 성경의 참된 의미를 확정하고 또한 제시하는 최고의 표현이었기 때문에 개혁주의자들은 이 신조의 순수한 표명에 대해서 위협을 받으면 순교를 통해서라도 그 순수한 정신을 세우고자 했던 것이다. 바로 이런 신조의 채택 정신이 역사적 개혁신앙의 순수성임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은 이처럼 엄밀하고 순수한 역사적 개혁신앙을 너무 과격하다고 하거나 또는 “신조 우상주의”라고 치부하면서 신조를 채택하더라도 너무 엄밀하게 채택하지 말고 많은 사람들이 참석할 수 있도록 완화시키고 또한 느슨한 채택을 장로교 안에서 제시하고 있는데, 이들의 이런 정신은 역사적 개혁교회의 순수한 정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다만 인본주의적인 정신에 의해서 성경보다는 인간의 화합을 더욱 중요시하는 정신을 제시하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본 신앙고백의 가치는 개혁주의 교회 안에서도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본 신앙고백서는 1566년의 엔트웹 회의와 1568년 베셀 회의에서 공식적으로 채택이 되고 보다더 공적으로 채택이 된 것은 1571년 엠덴 총회와 전국 도르트 총회(1574), 미델부르그 총회(1581)과 1618-1619년에 있었던 도르트회의에서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과 함께 개혁교회 중요한 신앙고백으로 채택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특히 도르트 총회에서는 이 신앙고백서를 개혁교회의 규범 교리의 하나로서 채택하였고, 모든 교회의 책임자는 반드시 이에 서명하도록 규정하였다. 이렇게 됨으로 본 신앙고백서는 개혁교회에서 중요한 신앙고백서로 자리를 잡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1584년에는 로마교회의 광신자에 의해 암살을 당한 윌리암 오렌지(William Orange)공은 자신의 둘째 아들과 투쟁을 벌이면서 성경과 함께 벨직 신앙고백서와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영적인 안내자와 위로자로 삼고 원수들의 공격을 맞서 나가기도 했다. 이처럼 하나님 이외에는 아무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칼빈주의 사상은 스페인의 정치적, 종교적 독재와 맞서 승리를 얻게 하는 중요한 정신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처럼 본 신앙고백서는 화란의 교회와 정치, 사회의 모든 부분에 걸쳐서 깊은 영향력을 끼쳤던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고백서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한 가지 매우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미 신조의 채택과 표명이 성경의 참된 의미를 드러내고 지키는 것으로서의 표현이었기에 이것을 포기하고 타협하는 것은 곳 성경의 참된 진리를 포기하고 타협하는 것으로 이해했기에 목숨을 걸고 순교할 수 있었음을 보았다. 그런데 이것과 함께 벨직 신앙고백서의 역사를 통해서 발견하게 되는 오렌지공이 자신의 아들과 신앙적인 표명의 차이 때문에 부자지간의 인연을 정리하는 엄격한 신앙의 정신을 보게 되는 것이다.

 

특히 그가 마지막까지 투쟁하면서 그의 힘의 원천과 위로로 삼았던 것은 성경과 함께 본 신앙고백서였음을 보면서 우리는 객관적인 신앙고백의 기준을 어떻게 고백하고 드러내는가에 따라서 때로는 가족과도 분리하면서 까지도 이 신앙적 가르침과 그 정신을 지켜가야 하는 것이 성경과 신앙고백서의 역사임을 알 수 있다. 그만큼 신조를 채택하고 표명하는 것은 포기할 수 없는 신앙적 내용임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신앙에 대한 엄밀한 정신은 이미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제시해 주고 있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잘 드러나고 있다.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여기에서는 우리는 인본주의가 결코 끼어들 수 없는 거룩한 신본주의적 신앙의 영광을 보게 된다.

 

그리고 본 신앙고백서도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과 함께 알미니안주의 자들에 의해서 강력한 도전을 받으면서 1618년 도르트 회의 당시에 수정을 강력하게 요구받았다. 왜냐하면 본문에는 철저한 개혁교회의 신앙 정신이 잘 제시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알미니안주의 입장에서는 여러 가지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도르트 총회에서는 오히려 이 벨직 신앙고백서를 더욱 높이 평가하고 프랑스, 라틴어, 화란어 개정판을 출판하게 되었다.

 

 

(2) 벨직 신앙고백의 교리적 특징.

 

먼저 본 신앙고백서의 구조는 프랑스 신앙고백서와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라고 하겠다. 몇몇 중요한 부분들을 요약하면서 교리적인 특징들을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① 성경론.

성경론에 대한 내용은 2장, 3장, 4장, 5장, 6장, 7장까지 많은 분량을 할애해서 제시되고 있다. 마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장 1-10절 까지의 내용이 요약되어 있는 것과 같음을 알 수 있다. 이 중에서 특히 7장에 “유일한 신앙의 규범으로서의 성경의 충족성”이란 제목으로 제시되고 있는 성경론에 대한 깊은 신학적 이해는 개혁교회의 성경론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뜻을 충분히 내포하고 있으며, 인간이 구원을 얻기에 필요한 모든 것을 충분히 그 속에서 지시하고 있음을 믿는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예배의 모든 태도가 그 속에 다 기록되어 있으므로, 심지어 사도 바울이 말한 바와 같이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 할지라도 성경 외의 것을 가르치는 것은 누구를 막론하고 합당한 일이 아니다. 이 책의 말씀 외에 무엇을 더하거나 제하여 버린다는 것이 금지되어 있음은 모든 면에서 성경의 말씀이 완전하고 충분한 것임을 명백히 보여주는 것이다.

 

본 고백서에서는 인간에게 있어서 구원과 신앙의 삶에 있어서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만이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또한 그 정도에 있어서도 완전한 충분성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즉 말씀이 신자의 구원과 삶의 규범으로서 충분함을 분명히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정신에 기초해서 개혁신앙의 성경론은 성경 이외에 그 어떤 것도 함께 할 수 없음을 분명하게 못박고 있는 것이다.

 

특히 후반부에서는 인간의 형태에서 만들어진 그 어느 것도 신앙과 삶의 규범으로서 허락되어지지 않음을 밝히고 있는 것은 아주 깊은 신학적 이해인 것이다. 이러한 자세는 성경을 단순히 율법주의적인 태도로 적용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이것은 오직 하나님만을 인간의 구원과 삶을 다스리시는 최고의 주권자로 고백하는 자세인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정신이 7장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왜냐하면 진리는 그 모든 것 위에 존재하기 때문이요, 성경은 모든 인간이 거짓되고 무가치한 존재임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불변하는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지 않는 그 어떤 영이라도 배격한다”.

 

결국 이런 정신에 의해서 칼빈에게서도 보았던 것처럼 그 하나님께서 말씀하여 주신 성경만을 통하여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삶을 살아가려고 하는 것이 개혁신앙의 참된 신앙의 정신임을 알 수 있다. 그래야만 그 영광이 인간에게 돌아오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만 되돌아가기 때문인 것이다.

 

 

② 신론(삼위일체론)

신론에 대한 부분은 1장, 8장, 9장, 10장, 11장 등에서 제시되고 있다. 본 장들에서 삼위일체에 대한 이해는 사변적인 사색이 아니라 철저하게 성경신앙의 정신에 머물러서 이해해야 하는 방식임을 못박고 있다. 즉 8장에서도 “우리는 진리되신 하나님 말씀에 따라서 -- 성부, 성자, 성령을 믿는다”라고 고백하고 있으며, 9장에서는 좀더 구체적으로 “이 모든 것을 볼 때에 신적인 본질에 있어서 한 분이신 세 인격이 계심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또한 이 가르침이 모든 인간의 이해를 넘어선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우리는 이것을 믿으며, 장차 이 온전한 가르침을 깨닫고 하늘 나라에서 이로 인해 즐거워할 것을 믿는 바이다”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교리적인 정립도 단지 자신의 시대에 국한되어서 정립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 개혁교회가 늘 그렇게 해왔듯이 철저하게 이런 교리적인 정립은 사도적인 전통을 따라서 제시된 것임을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삼위일체에 관한 가르침은 사도 시대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참된 교회의 가르침에 의하여 늘 확증되었고 주장되어 왔으며 이는 유대교나 이슬람교 또한 마르키온파, 마니교, 프락세아스, 사벨리우스, 사모사테누스, 아리우스 등 정통 교부들에 의하여 거짓 기독교로 또는 이단들이라고 정죄 받은 자들의 주장과는 다른 것이다. 따라서 이런 점에서 볼 때, 우리는 기꺼이 세 신경, 즉 사도 신경, 니케아 신경, 아타나시우스 신경을 받아들이는 바이며, 이것은 고대 교부들에 의하여 확증된 바와 일치하는 것이다.

 

이런 고백을 통해서 우리는 역사적 개혁교회는 항상 사도적인 전통에 서 있는 교회이며, 또한 사도적 전통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을 표현할 때도 자신이 원하는 대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고대 교회에서부터 존중되고 또한 우리의 신앙을 명확하게 고백하고 제시한 신조 채택의 정신을 따라서 자신의 입장을 표현하고 지켜가는 것이 참된 개혁교회의 신앙 정신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즉 이런 정신은 이미 앞선 칼케돈 신조의 설명에서도 언급한 바 있었다.

 

이처럼 교회의 전통이라는 것은 인간의 어떤 문화나 관습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변치 않는 성경에 대한 객관적인 신앙고백을 어떻게 고백하고 표현하고 또한 채택하는 것에 있는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이 고대의 신조의 객관적 신앙고백 기준에 기초를 두고 바른 신앙고백을 표명할 때 우리는 그런 신앙과 교회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바른 신앙이며 교회로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처럼 이런 교회의 역사성을 무시하고 자신이 이해하고 깨달은 대로 성경을 자의적으로 이해하고 적용하는 것은 분명히 정죄되어야 할 행위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③ 교회론

교회론에 대한 것은 27장, 28장, 29장, 30장, 31장, 32장, 33장, 34장, 35장 등과 같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여기서는 교회의 본질과 행정직무, 그리고 교회의 직제로서 목사, 장로, 집사의 직분이 제시되고 있는데 이 중에서 29장의 내용이 좀더 주의를 요하는 내용이 제시되고 있다. 즉 “참 교회의 특징 및 거짓 교회와의 차이점”을 제시하면서 교회의 표지로서 말씀과 성례와 권징이 제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내용은 위에서 소개되었던 비슷한 년도의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와도 동일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우리는 마땅히 성실하고 주의 깊게 참 하나님의 교회가 무엇인가를 말씀을 통해 알아야만 한다고 믿는 바인데, 그 이유는 이 세상에 모든 이단도 스스로 교회라는 이름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 여기에서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스스로 교회라고 부르는 온갖 이단들로부터 참 교회의 하나됨이 반드시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참 교회임을 알 수 있는 몇 가지 사실은 다음과 같다. 만일 복음의 순수한 교리가 전파되고, 그리스도에 의해 세워진 성례가 순수하게 이행되며, 교회의 가르침으로 인해 죄를 징벌하는 일이 일어난다면 이는 참 교회에 속하는 것이다.

 

본 항목을 통해서 우리는 역사적 개혁교회의 정체성을 더욱 분명하게 이해 할 수 있다. 즉 비(非)개혁교회를 향한 개혁교회의 정신이 얼마나 철저하고 확고한 가를 엿볼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우리가 더욱 주의 깊게 살펴야 하는 것은 이 세상에 이단들도 자신들을 교회라고 칭하고 있기 때문에 개혁교회의 정체성은 성경의 참된 신앙을 통해서 더욱 명확하게 타협이나 양보없이 드러나야 함을 강력하게 표명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의 계속되는 내용에는 이런 내용이 더욱 깊이 제시되고 있다.

 

거짓 교회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과 권위보다는 그들 스스로의 능력과 권위를 내세우면서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르고자 하지 않는 교회이다. 또한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말씀대로 성례를 시행치 않고 그들 스스로의 생각에 맡긴 채 말씀에서 무언가를 더하는데,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보다는 사람에게 더 의존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거룩하게 사는 자를 핍박하며, 그들의 죄와 욕심과 우상 숭배를 책망하는 자를 핍박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유형의 교회는 쉽게 알 수 있고 구별할 수 있다.

 

여기서도 우리는 신앙고백서의 역사와 관련하여 중요한 내용을 배울 수 있다. 그것은 “그들 스스로의 능력과 권위를 내세우면서, 그들 스스로의 생각에 맡긴 채 말씀에서 무언가를 더하는데”라는 표현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즉 객관적인 신앙고백을 거부하고, 무시하는 자들은 늘 하나같이 말한다. ‘신조주의는 성경을 무시하고 버리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신조를 공부하는 것보다는 성경을 더 많이 배우는 것이 낫다’. 그러나 이 말에 함정이 있다고 이미 앞에서 소개한 바 있었다. 즉 성경의 내용을 각각의 개인이 보는 사람에 따라서 다 다르게 이해하고 적용하기 때문에 절대적인 기준의 역할을 성경은 결국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신앙의 특성을 선조들은 성경을 통해서 배우고 깨달았기 때문에 객관적인 신앙고백 기준에 의하지 않고 사사로운 개인적 의견으로 성경을 곡해하고 적용하는 행위에 대해서 철저하게 금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이 개인적인 성경곡해는 전형적인 이단과 거짓 교사들이 주장하는 형태임을 위와 같이 드러내 준 것이다. 즉 스스로의 생각과 권위와 능력을 내세워 바른 의미의 성경에다 무엇인가를 더하거나 빼는 행위는 성경을 파괴하는 행위라고 지적해 준 것이다.

 

그리고 이와 함께 또다른 특징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거룩하게 사는 자를 핍박하며, 그들의 죄와 욕심과 우상 숭배를 책망하는 자를 핍박하는 것이다” 라는 고백을 통해서 알 수 있는데 그것은 객관적인 신앙고백을 따라서 신앙을 고백하고 교회를 세워 가는 성도들은 항상 이와 같은 방식으로 신앙하지 않는 자들에 의해서 늘 핍박받고 고난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의 역사라는 것이다. 그래서 때로는 목숨을 잃는 경우도 허다했던 것을 보게 된다. 즉 우리는 로마 카톨릭과 루터교와 이단자들에 의해서 순교를 당한 교회의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런 정신은 오늘날도 동일한 것을 보게 된다. 즉 오늘날 교회에서 신조를 엄밀하게 채택하고 교육하려고 했을 때 어떤 대접을 받는가를 확인해 보면 알 수 있다. 일전에 부교역자로 사역하던 교회에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청년회에서 가르치고자 했을 때 담임목사에 얼마나 많은 꾸준한 압박을 받았는지를 생각해 보면 우리 한국교회의 형편이 어떤지를 더욱 깨닫게 된다. 이런 형편은 저자뿐만 아니라 어느 교회에서도 대체적으로 신앙고백서를 주일학교나 학생회나 청년회 때 가르친다고 한다면 많은 눈총과 억압과 고난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참으로 놀라울 뿐인 것이다. 과거에는 교회 안에서 목숨처럼 지켜왔던 내용을 오늘날 그것을 가르친다고 해서 핍박을 받아야 하는 현실이 참담할 뿐인 것이다. 그러나 좌절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런 고난과 어려움은 우리 자신만 겪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선조들도 그렇게 살아갔기 때문인 것이다. 즉 이런 신앙의 형편은 객관적인 신앙고백을 채택하고 표명하는 성도에게 있어서는 누구다 다 겪어야 하는 삶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더욱 위로가 되는 것은 이런 삶을 하나님께서 성도가 이 땅에서 우리의 신앙을 지켜가고 또한 자라가게 하는 하나의 방편으로 정해 주셨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핍박과 고난이 주어진다 해도 두려워하거나 외면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삶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삶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즉 이처럼 우리의 동료처럼 보이는 자들이 우리를 핍박하는 모습은 성경에서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해 주고 있기 때문에 힘을 내어 이 외롭고 힘든 고난의 길을 더욱 힘차게 달려가야 할 것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시55:12) 나를 책망한 자가 원수가 아니라 원수일진대 내가 참았으리라 나를 대하여 자기를 높이는 자가 나를 미워하는 자가 아니라 미워하는 자일진대 내가 그를 피하여 숨었으리라 (시55:13) 그가 곧 너로다 나의 동류, 나의 동무요 나의 가까운 친우로다

 

(마5: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마5: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요16:2)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 (요16:3) 저희가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이처럼 역사적 개혁교회는 늘 비(非)개혁교회로부터 따돌림과 핍박과 고통을 받아 왔음을 제시해 주고 있다. 이런 역사적인 형편은 단지 화란 지역뿐만 아니라 역사적 개혁교회는 초대교회 이후부터 늘 이런 형편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오늘날도 여전히 참된 역사적 개혁교회의 정신을 되찾으려고 하며, 또한 그 정신을 지켜 가려고 할 때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격게 되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이 있다고 해서 개혁교회는 선조들로 내려온 참된 성경신앙의 정신을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이 개혁신앙을 지켜 가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서라도 이 진리를 지켜 왔던 것을 보게 된다. 이런 신앙 정신은 철저한 칼빈주의적 신앙 정신인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미 칼빈은 이런 개혁신앙의 정신을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와 하나님을 위하여 열심히 끈질기게 일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양면의 전쟁을 위하여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 -- 하나님의 종들은 죽음의 두려움에 대하여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하며, 용맹을 견지해야 한다. 비록 죽어야만 하고 목을 매달아야 할지라도 그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필요하다면 목을 내놓고 자신들의 피로써 [그 교리]를 수호하여야 한다. 한편 하나님의 종들은 신중해야 한다. 왜냐하면 진리의 적들은 종종 아첨하면서 침입해 들어오기 때문이다. 내가 알기로는 이런 방향으로 들어오는 침입이 더 위험하다.

 

 

④ 국가관

마지막으로 본 신앙고백서에서 제시되고 있는 국가관을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당시 필립 2세가 공식적으로 개혁교회를 핍박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화란 지역은 매우 큰 어려움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다. 먼저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왕과 군주와 행정 장관을 세우셨음을 믿는데, 이는 세상이 특정한 법과 정책에 의해 다스려짐으로 인간의 방종이 제어되고 만사가 선한 질서와 순서에 따라 움직여지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들의 직무는 국가의 안녕에 관심을 갖고 이를 보호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왕국을 이루어 나가도록 하는 것이므로 이 신성한 직무를 잘 지켜나가야 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어디서나 복음의 말씀이 전해지도록 옹호해야 하는데, 이럼으로써 주께서 말씀 가운데에 명하신 대로 누구나 하나님을 높이고 경배하게 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형편과 자격 또는 조건이 어떠하든지 간에 국가를 다스려 나가는 자들에게 순종하는 것은 주어진 의무이다. 세금을 내며 하나님의 말씀에 그릇되지 않는 모든 일에 있어서 그들을 높이고 존경하며 순종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보게 되면 개혁교회의 국가관이 잘 드러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우선 왕의 출처를 인간에게서 찾지 않고 하나님에게서 찾는 것이 그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폐하시는 것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국가의 질서에 순종하고 의무를 다하는 것을 “하나님을 경배”하는 행위로 인식하도록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가장 핍박과 고통의 시기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그릇되지 않을 때에는 절대적으로 국가의 질서에 순종해야 하는 것이 성도의 의무임을 명확히 하므로 어거스틴과 칼빈에 이어지는 영역 주권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개혁신앙의 정신에 위배되는 재세례파를 “여기에서 우리는 권세자요 통치자들을 배격하고 공의를 무시하며 재산의 공유를 내세워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세우신 선한 질서와 순서를 깨뜨리는 재세례파와 그 외의 거짓을 선동하는 자들을 철저히 배격하는 바이다”라고 비평하면서 단호히 거부하고 있는 것이 그 주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맞춤법 일부 교정 및 생략: Sola)

http://biblechurch.net/_chboard/bbs/board.php?bo_table=m2_4&wr_id=227077&sfl=&stx=&sst=wr_datetime&sod=asc&sop=and&page=1

 

 

 

<벨직 신앙고백서 (네덜란드 신앙고백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