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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 강해

Sola. 2023. 11. 15. 06:00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 강해 (The Scotch Confession A.D. 1560)

 

 

(1)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 역사적 배경

스코틀랜드 개혁교회는 장로교의 역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후대에 영향을 끼친 그 신학적 정신이 매우 엄밀하고 바른 정신을 확립했으며, 장로교 정치의 기틀을 마련해 주기도 했기 때문이다. 특히 스코틀랜드 개혁교회의 후손들은 16-17세기를 넘어오면서 유럽 대륙의 전지역 중에서 가장 엄밀한 성경의 진리 정신을 오랜 시간 동안 간직해 왔기 때문에 그 가치가 매우 높은 것이다.

 

즉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도 스코틀랜드 신학자들이 깊은 영향을 끼쳤으며, 또한 이 정신은 1729년의 미국장로교의 총회 이후에도 계속해서 엄밀하게 신앙고백서를 채택해 가려고 하는 정신을 가장 많이 제시한 부류로서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 중요성이 매우 큰 것이다.

 

스코틀랜드 개혁교회는 1567년에 이르서야 비로서 국회의 합법적인 인정을 받았는데, 이 때는 이미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가 나온지 7년이 지난 후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일련의 프로테스탄트 귀족들과 신자들이 1557년 12월 3일 에딘버러에서 모여 “계약서”에 서명을 하고 독자적인 조직을 형성한 후 왕권에 맞서 “전체 그리스도의 회중과 거기에 속한 한 사람 한 사람”을 죽이지 말라고 강력하게 항거했을 때부터 이미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정치적인 배경으로는 스코틀랜드 왕국은 전통적으로 프랑스의 지원을 받으면서 영국에 대적하여 왔다. 그러나 16세기의 스코틀랜드는 영국과의 화친을 주장하는 사람이 승리하였다. 그리하여 1502년경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4세(James Ⅳ)는 영국의 헨리 7세(Henry Ⅶ)의 딸인 마가렛(Margaret Tudor)과 결혼하였다. 그후 헨리8세(Henry Ⅷ)는 그의 딸 메리(Mary)를 제임스 4세(James Ⅳ)의 아들인 제임스5세와 결혼시켜 스코틀랜드와 평화로운 관계를 맺으려 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의 공론은 프랑스와의 전통적인 관계로 돌아감으로 제임스 5세(James V)는 프랑스의 메리(Mary of Guise)와 결혼하였다. 그리하여 두 나라는 전적으로 대립하는 관계에 놓였으며, 스코틀랜드는 보다 카톨릭적인 프랑스의 영향 하에 있게 되었으며, 영국은 헨리 8세(Henry Ⅷ) 이후 종교개혁에 돌입하였다.

 

이즈음에 개신교가 스코틀랜드에 들어왔는데, 이 개신교는 이미 이 나라에 들어와 자리잡은 롤라드파(Lollars)와 후스파(Hussites)와 주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때에 독일에서 공부한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루터와 다른 개혁자들의 작품들을 수입하기도 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당국은 이를 단호히 저지하여 1528년부터 순교자들이 속출하게 되었으나 오히려 개신교는 급속히 확산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1542년 제임스 5세(James V)가 죽고 그의 딸 메리 스튜어트가 왕위에 오르자, 헨리8세(Henry Ⅷ)는 그의 아들 에드워드(Edward)를 메리(Mary)와 결혼시키려 하였으나 스코틀랜드의 프랑스 지지파들이 메리(Mary)를 프랑스로 유학을 보내어 수학케하고 프랑스 왕자와 결혼하도록 하였다. 이처럼 스코틀랜드가 카톨릭을 표방하는 프랑스로 기울어져 있으면서 계속 개신교들을 박해하였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개신교의 음모자들의 무리가 추기경을 살해하고 앤드류 성을 점령하였다. 이들 개신교 혁명 세력은 그 곳을 점령하여 신앙의 요새로 삼았으며 정부군의 힘은 여기까지 미치지 못하여 비교적 안전한 자리를 확보하기도 했다.

 

이처럼 정치적, 종교적 혼란 속에서 스코틀랜드 개혁교회는 기이즈의 메리(Mary of Guise) 여왕이 죽고 프랑스 군대가 철수하게 되자 이런 기회를 틈타서 영국에서 메리 여왕이 도착하기 전에 1560년 8월 1일 에딘버러에서 모여서 의회를 갖게 되었다. 이 모임은 스코틀랜드 개혁교회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모임으로 평가 받고 있을 정도로 매우 중요한 모임이었다.

 

이들은 교회 문제와 관련해서 교황제도를 추방하고 예배와 권징의 순수성을 회복하며, 경건한 목사를 후원하기 위한 교회의 수입을 마련하며, 학문의 장려하고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방식을 수립하자고 하는 청원서를 제출하게 되었던 것이다. 바로 이런 청원서에 대한 첫 번째 대안으로서 제시된 것이 개혁교회의 목사들로 하여금 이런 정신을 대변할 수 있는 신앙고백서를 제정할 것을 건의했던 것이다.

 

이런 요구에 의해서 죤 녹스(J. Knox)와 그의 동료 다섯 명에 의해서 작성되게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어렵고 힘든 정치적인 배경 속에서 만들어지게 되었던 본 신앙고백서는 1560년 8월 18일에 “무오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교리”라는 인정을 받을 정도로 매우 훌륭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정치적인 어려움으로 인해서 1567년에 가서야 당국에 의해서 공식적으로 인정되기도 하였다. 당국은 “복음을 설교하는 목사들과 본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에 따라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사람들만이 스코틀랜드 안에서 유일하고 참되며 거룩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선포할 정도로 본 신앙고백서가 차지하게 된 비중은 매우 큰 것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의 객관적인 신앙고백의 기준에 따라서 신앙을 고백하게 될 때만 성도로서 인정이 되고 또한 교회의 정식회원이 되는 역사를 또 만나게 된다. 이런 정신은 이미 고대 신조에서 엿볼 수 있었던 것처럼 스코틀랜드 신앙고백를 채택하고 받아들였던 스코틀랜드의 성도들도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신조의 가치와 성격이었기 때문인 것이다. 그만큼 신조가 개혁교회 안에 차지하고 있었던 권위는 매우 높은 것이었다.

 

그리고 1572년에 가서는 모든 목사들이 이 고백서에 서명하도록 하였으며, 이 때부터 1647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채택되기 전까지 스코틀랜드의 개혁교회의 중요한 교리적 표준 역할을 해 왔던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의 채택은 미사제도와 교황의 사법권 행사를 강력하게 배격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그리고 개혁교회를 배척하고 로마 카톨릭을 지지하면서 만들어진 모든 기존 법령들을 파기하는 운동을 야기시키기도 했다. 이처럼 본 신앙고백서의 채택으로 인해서 스코틀랜드 개혁교회는 성경의 정신에 입각한 순수한 신앙과 교회를 회복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에서 객관적인 신앙고백을 채택하고 받아들이게 될 때 어떤 결과가 주어지게 되는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교회 내의 부패와 죄악이 물러가는 일들이 일어난 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조의 역사가 우리에게 던져 주고 있는 귀중한 교훈인 것이다. 이처럼 교회 안에서 신조의 바른 채택과 교육이 시작되자 당시 1000년의 세력을 누려 온 로마 카톨릭의 부패된 신앙의 내용들이 제거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역사를 통해서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도 여러 가지로 부패되고 변질되어 있는 것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교회 안에서 신조의 바른 채택과 교육이 있어야 함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의 가치는 영국의 사절로 참석했던 란돌프(Randolph)의 말을 통해서 더욱 빛나기도 한다. “나는 지금까지 이처럼 중대한 문제를 들어본 적이 없었고, ---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믿음을 지키다가 피를 흘렸다. 내가 본 사람 중 매우 위엄이 있고 경건한 사람이었던 고(故)린드세이 경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많은 세월을 살아왔다. 나는 우리들 중에 가장 늙은 사람이다. 나는 이제 많은 귀족들과 사람들이 이토록 값진 것을 만들어 놓은 오늘을 보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시므온처럼 이렇게 말하겠다’”

 

 

 

(2)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 교리적 독특성

 

① 서문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의 교리적 특징은 우선 서문과 마지막 글에 잘 나타나고 있다. 특히 이 글에는 당시 개혁교회에서 신앙고백서를 어떻게 이해하고 또한 교회에서 사용했는지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기도 한다. 본문은 다음과 같이 소개되고 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우리는 우리가 고백해오면서 수치와 위협을 받아오던 교리의 모든 것들을 만 천하에 공포하려고 오랫동안 갈망해 왔었습니다. -- 우리는 끝날까지 이 신앙고백에 머물러 있기를 단호하게 천명한다.

 

오 주여! 일어나소서. 당신의 원수로 하여금 당황케 하소서. 당신의 거룩한 이름을 미워하는 저들로 하여금 당신 앞에서 떠나가게 하소서. 당신의 종들에게 힘을 주셔서 당신의 말씀을 담대히 말하게 하소서. 그리고 모든 민족들이 당신에 대한 참된 지식을 확실히 터득케 하소서. 아멘

본 글을 살펴보게 되면 본 신앙고백서를 고백하는 자들로 하여금 순교의 각오를 갖도록 분명한 신앙의 정립을 요구하고 있는 아주 강경한 자세를 엿볼 수 있다. 즉 당시 스코틀랜드 개혁교회에 있어서 신앙고백서라고 하는 것은 교회의 존패의 위기 앞에서 교회를 지켜 나가는 큰 방벽과 같은 것이었다. 이들은 로마 카톨릭을 지지하는 정치적, 종교적 분위기 속에서 자신들의 신앙을 바르게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신앙고백서를 표명했던 것이다.

 

이처럼 신앙고백서를 통해서 성경의 바른 의미를 회복하게 될 때 교회의 순수성이 회복되고 참된 신앙이 교회 안에 자리잡게 되어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돌리 수 있음을 이들은 분명히 인식하고 이 신앙고백서를 바르게 확립하는 것에 모든 노력을 기울인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신앙고백서의 실천적인 성격은 당시 에드워드 어빙의(Edward Irving) 말에 더욱 잘 묘사되고 있다.

 

1560년 스코틀랜드 의회에서 인준을 받은 이 25개 항목들은 그 당시의 스코틀랜드를 하나로 연합시켜 교황주의에 맞서던 사람들을 하나의 단결된 세력으로 규합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후 전국이 고난과 고통을 당했을 때에도 역시 백성들을 하나로 결합시켜 주었다. ---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는 모든 환난과 싸움터에서 교회의 깃발로서 들려졌다. --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는 25개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가장 정직하고 곧으며, 남자다운 문체로 기록되었으되 불평이나 아첨이 없고, 논리적 정확성과 학문적 수준에서도 뒤떨어지지 않는다. 이것은 마치 온 종일 진리를 전파한 후 피곤에 지친 사람이 밤에 조용히 앉아 자기가 가르친 내용을 생각해 보며 마음에서 새 힘을 되찾는 것과 같았다.

본 글에서도 보면 신조의 가치와 그 성격을 이해할 수 있다. 즉 성도들이 가장 큰 핍박과 고난을 받을 때 이 신조는 성도들에게 위로와 새로운 힘을 제공해 주는 강력한 무기가 되었고 또한 성도들을 하나로 묶어 주는 강력한 끈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처럼 신조의 채택과 그 교육이 성도들이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세상을 향해 저항 할 수 있는 최고의 무기가 됨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즉 신조가 저항의 무기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성도들은 세상 사람들처럼 폭력을 행사하여 자신들의 입장을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성도들은 세상의 일에 대하여 무관심과 회피주의로 도피하는 자들도 아닌 것이다. 오히려 성도들은 세상과 싸워 가는 자임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싸워가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이런 신앙의 성격을 이해하지 못하다 보니 오늘날 성도들에게 있어서 한편으로 교회만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고립된 모습을 보이게 되고, 또한 한편으로는 너무 사회운동만 일으키는 세속화된 모습을 보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 장로교회의 역사를 살펴보면 성도의 삶은 오늘날 우리처럼 교회에만 고립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사회운동만 관심 갖는 세속화된 모습도 아님을 알 수 있다. 즉 참된 신앙을 바르게 간직하고 이 신앙을 통하여 세상에 빛을 비추고, 진리를 드러냄으로 세상의 죄악을 깨뜨리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저항하는 자의 삶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세상과 저항하기 위해서 신조의 채택과 교육이 성도에게 있어서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었던 것이다. 이제 이런 정신은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교회를 지켜가시기 위해서 세우신 것임을 다음의 성경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고후10:4)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강력한 무기) (고후10:5)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엡6:11)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엡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엡6: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엡6: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엡6:15)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엡6: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엡6: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본 말씀을 살펴보면 위와 같은 정신을 잘 이해할 수 있다. 즉 고린도후서의 말씀을 먼저 보면 우리의 싸움 자체가 세상의 육신적인 사람을 향한 싸움이 아니라 그보다 더 본질적인 사탄과의 싸움임을 지적해 주고 있다. 그래서 싸움의 방식도 분명히 달라야 함을 언급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사탄과 싸울 수 있는 유일한 무기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이 무기에 성격을 10:5에서 밝혀 주고 있다. 즉 “모든 이론을 파하며,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라는 말씀을 보면 무기는 이론과 사상을 깨뜨리고 제거해서 하나님의 참된 진리를 세우는 그런 내용임을 알 수 있다. 즉 이론과 사상을 깨뜨릴 수 있는 것은 칼로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를 보다 명확하게 드러내고 세워가는 객관적인 신앙고백의 채택과 교육을 통해서 성경을 세워가는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에베소서에서도 보면 싸움의 성격을 설명하면서 성도가 갖추어야 할 무기의 성격은 “진리”의 내용을 우리의 온 몸에 둘러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직접적인 칼과 같은 무기도 “말씀”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닫는 것은 우리의 온 몸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두른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에 입가해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하나님의 말씀에 둘려지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성경의 내용을 바르게 이해고 고백하며 그것을 드러내야만 하는데 그와 같은 일은 앞서서도 설명했지만 개혁교회 안에서는 늘 성경을 그와 같은 방식으로 배울 수 있는 유일한 형식은 오직 객관적인 신앙고백적 기준을 고백하고 채택해서 그것을 부지런히 교육하고 배워야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결국 신조의 채택과 교육이 성도에게 있어서 최선의 저항무기가 됨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본 신앙고백서가 개혁교회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는 것은 도르트나 웨스트민스터 총회 당시에 참석한 사람들의 신학적 입장 차이 때문에 신학적이 깊이가 달라서 많은 주제들을 좀더 확고한 입장 쪽으로 끌어올리지 못하고 최소한의 결과로서 결정을 본 것에 반해서 본 신앙고백서는 그런 양보된 입장이 없이 당시 스코틀랜드의 신학적인 깊이를 그대로 반영하고 표명했다는 것에 큰 의의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 스코틀랜드 개혁교회의 후손들은 이후의 장로교의 논쟁의 역사 때마다 엄밀하게 성경의 바른 입장을 고집하는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 두드러지게 나타나곤 했던 것을 보게 된다. 즉 후대에 비(非)개혁주의적인 신학적 사상이 교회 안에 들어와 타협하려고 할 때마다 가장 마지막까지 반대하며 철저하게 타협하지 않고 성경의 순수한 정신을 지키려고 했던 것이다.

 

위와 같은 강한 개혁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본 신앙고백은 신론으로 시작하여 교회론, 성례론, 국가론으로 끝나는데 영국, 스위스, 프랑스, 네덜란드에서 채택된 개혁교회의 신앙을 요약하고 있기도 하면서 전체적인 성격은 칼빈주의적인 것이 두드러지며, 예언자적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으며, 투쟁적이고 전투적이며, 수사학적인 정확성보다 설교적 열정을 밑에 깔고 있다. 즉 간단 명료하면서도 단순하게 개혁교회의 입장을 잘 드러내고 있기도 한 것을 알 수 있다.

 

 

② 제 1 장

본 신앙고백서는 칼빈의 기독교 강요와도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즉 전체 25장이 성부, 성자, 성령, 교회와 국가 부분으로 나누어 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우선은 1장의 독특성을 지적할 수 있다. 즉 본 신앙고백서는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지혜, 선, 의가 지정한 목적을 지향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함이다”라고 고백하면서 우주 만물의 존재의 본질적인 목적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밝히면서 그 시작을 하고 있다. 즉 모든 만물의 본질적인 존재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이런 정신은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1문의 정신과도 상통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미 녹스가 이런 정신을 개혁신앙의 가장 중요한 신앙의 원리로 제시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제네바에서 철저하게 칼빈과 그 제자들로부터 개혁신앙의 핵심적인 내용들을 분명하게 정립했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처럼 삼위일체 하나님을 선포하면서 ‘오직’ 이 한 하나님을 예배하며, 하나님만을 신뢰하여 섬기며, 하나님만을 의존해야 할 것을 말하면서, 세상 모든 가치들을 심판하고 초월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절대성과 유일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섭리하시며, 통치하시는데 이모든 것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에 있다라고 하는 명확한 지적은 칼빈주의적인 것으로 신적 위엄과 영광, 그리고 신적 주권을 철저하게 강조하려고 하는 정신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신앙의 정신은 마지막 장이 25장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시며 영원한 하나님으로 영원토록 계신다. 성자와 성령과 더불어 하나님께 모든 영예와 모든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 지어다. 아멘”

 

 

③ 교회론

 

본 신앙고백서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교회론을 들 수 있겠다. 당시 본 신앙고백서와 함께 본격적인 스코틀랜드 개혁교회가 출범하게 된 역사적인 배경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본 고백서에는 교회론적인 고백과 정립이 세밀하게 제시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a. 5장: 교회의 지속과 증대 및 보존에 관하여

 

먼저 2장에서는 “교회의 통일성”을 제시해 주고 있다. 즉 “아담으로부터 그리스도 예수가 육신을 입고 오실 때까지 모든 시대를 통하여 하나님의 그의 교회를 보존하셨고, 교육하셨으며, 증대케 하셨고, 귀히 여기셨으며 단장시키셨고 죽음에서 생명에로 이끌어 주셨음을 우리는 확실히 믿는다”라고 고백하면서 구약과 신약의 백성이 하나님의 교회 안에 구분되어 있지 않고 통일적으로 한 백성임을 지적해 주고 있다.

 

 

b. 16장: 교회에 관하여

 

16장에서는 개혁교회의 교회론에 대한 핵심적인 본질이 다음과 같이 정확하게 표명되고 있다.

 

우리는 한 하나님, 즉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을 믿는 것처럼 한 교회가 처음부터 있었고, 현재에도 있으며,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 한 교회란 하나님의 의하여 선택된 사람들의 무리요, 집단인바, 이들은 교회의 유일한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신앙으로 하나님을 올바로 예배하며 영접한다. --- 이 교회를 떠나서는 생명도 없고 영원한 복락도 없다. --- 아버지께서 그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에게 주신 자들 이외에는 아무도 이 구원에 참여 할 수 없을 것인즉, 적당한 때에 이들은 그리스도 예수에게 나아 그의 가르침을 인정하고 그를 믿고 구원을 얻는다. --- 이 교회는 하나님만이 아시는 자들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는 불가시적이다. 이 하나님만이 그가 선택하신 사람들이 누군지 아신다. 이 선택받은 사람들이란 이미 세상을 떠난 성도들, 즉 승리적 교회, 아직 살아 있으면서 죄와 사단에 맞서 싸우는 성도들 및 지금 이후로 살아 있을 성도들을 말한다.

본 조항을 살펴보게 되면 먼저 교회란 “하나님의 선택한 백성들”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이처럼 하나님의 선택에서 교회의 본질을 찾는 것은 철저하게 개혁신학의 교회론과 상통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선택에 의해서 성도 각 사람에게 “구원의 서정”도 제시됨을 고백하고 있다. 즉 구원의 서정이 선택론과 분리되어 있는 비(非)개혁적 신학정신이 아니라 철저하게 구원의 서정도 선택론 안에서 시작하는 것으로 제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즉 이 말은 성도가 거룩함으로 살아가는 모든 과정과 그 원인은 성도가 열심히 노력하고 공로를 많이 쌓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선택해 주신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게 거룩함으로 자라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선택하신 백성들이 거룩함으로 자라 갈 수 있도록 이미 모든 은혜를 값없이 베풀고 계시기 때문에 그 은혜를 받아서 우리가 자라가는 것이지 우리의 노력과 공로가 원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내용이 왜 중요한가 하면 오늘날 한국교회에서는 우리가 열심히 하고 노력하는데 따라서 축복도 받고 은사도 받는다고 가르치면서 단지 인간의 열심과 노력이 모든 축복과 선물을 받는 기준인 것처럼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성도들의 신앙이 극도로 교만해 지고, 또한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도 자신의 생각대로 일이 되어지지 않으면 하나님을 향해 악한 불만을 갖게 되기 때문에 위와 같은 신앙적 가르침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즉 인본주의로 빠지는 것을 막고 성도의 신앙이 신본주의적 마음을 갖게 해 주는 것이다. 이처럼 여기서 제시되고 있는 구원의 전 과정이 조건이냐, 또는 선택론의 열매냐 하는 것은 도르트 신조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와서는 더욱 명확하게 제시되고 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개혁신학의 입장임을 알 수 있다.

 

 

c. 18장: 참 교회와 거짓된 교회를 구별하게 하는 표시와 누가 교리의 판단자인 가 대하여

사탄은 처음부터 그의 악독한 회당을 하나님의 교회라고 지칭해 왔으며, 잔인 무도한 살인자들로 하여금 참 교회와 그 회원들을 핍박하고, 괴롭히고, 못살게 굴도록 종용해 왔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분명하고 완전한 표시를 척도로 하여 참 교회와 더러운 회당을 반드시 구별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거짓 교회를 참 교회로 받아들임으로 저주를 자초하게 되는 것이다. -- 참 교회의 표시는 세 가지다.

 

첫 번째 표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참된 설교이다. 하나님은 그의 말씀 안에서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셨기 때문이다. 즉, 이 계시는 예언자들과 사도들의 글에 선포되어 있다. 두 번째 표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세례와 성찬을 바르게 수행하는 것이다. 이 세례와 성찬은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우리의 마음속에 인치며 확증하는 것이다. 세 번째 표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교회의 치리(권징)를 바르게 행사하는 것이다. 이 권징을 통하여 교회는 악을 억제하고 덕을 키운다. 따라서 이러한 세 표시들이 보이며 어느 때든지 지속하고 있는 곳에는 숫자에 관계없이, 틀림없이 그리스도의 참 교회가 존립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그의 약속에 따라 이 참 교회와 함께 계시며 동행하신다.

본 장에서는 먼저 거짓된 교회에 대한 철저한 평가로 시작되고 있다. 이것은 다분히 당시의 주 세력이었던 로마 카톨릭을 대상으로 제시한 것이다. 이미 본 장 속에서 “흠과 티가 없는 그리스도의 신부인 참 교회와 불결한 매춘부와 같은 거짓 교회를 구별케 하는 표시란 오랜 전통이나 남용된 명칭이나 베드로를 이어 내려오는 사도적 계승이나 어떤 특정 지역이나 타교파의 과오를 고집하는 다수의 사람들도 아니다” 라고 지적하면서 로마 카톨릭의 이단적인 교회관에 대해서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특히 “불결한 매춘부” 라는 표현은 이런 정신의 절정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표현은 이미 앞에서도 보았듯이 신조의 채택으로 이단과 거짓교사들을 어떻게 정죄하고 분리시켜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는 중요한 정신인 것이다. 여기서도 여전히 “저주문”의 성격이 담겨 있는 것이다. 이미 앞 부분에서 언급한 결론 부분의 “당신의 원수로 하여금 당황케 하소서. 당신의 거룩한 이름을 미워하는 저들로 하여금 당신 앞에서 떠나가게 하소서” 라는 표현도 강한 저주문적인 정신이 깃들여 있는 것이다. 또한 더욱 강경한 표현이 20장에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기도 한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새로운 신앙의 항목들을 날조해 내거나 어떤 결정들을 내린다면, 우리는 이것들을 “마귀들의 교리”라고 정죄 할 것이다”

 

다음으로는 참된 교회의 표지로서, 말씀의 바른 설교와, 성례의 올바른 집행과 권징의 바른 시행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 큰 특징이다. 이미 말씀과 성례는 칼빈 때부터 철저하게 제시되어 왔지만 본 고백서에서는 “권징”에 대한 부분도 명확하게 정립을 해 놓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후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의 정치에 대한 중요한 신학적 밑거름을 마련해 주기도 하는 중요한 고백인 것이다. 이 외에도 25장에서 교회에 거저 주시는 은혜들에 관하여서는 “이 세 표지를 지닌 교회 안에 있는 모든 개개인이 그리스도 예수의 택하심을 받은 지체는 아닌 것이다. 많은 잡초와 가라지가 옥수수 밭에 덧뿌려져서 그 가운데서 무성하게 자라나며, 버림받은 자들이 택함을 받은 자들의 교제 안에서 발견될 수 있으며”라고 지적하면서 교회론에 있어서 불가시적 교회와 가시적 교회의 중요한 구조를 깊이 제시하기도 한다.

 

 

d. 20장 총회와 그 힘과 권위 및 총회의 소집의 이유에 관하여

합법적인 대 공의회에서 선의의 사람들이 과거에 결정한 것을 우리는 무모하게 정죄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대 공의회들의 이름으로 선언된 바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이 공의회들 가운데에 어떤 공의회들은 인간이기 때문에 틀림없이 잘못을 범했고, 매우 중대하고 중요한 일에 있어서도 그러하다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공의회의 결정이 하나님의 명백한 말씀에 의해서 확인되는 한 존중하고 수용한다. 그러나 만약에 공의회의 이름을 빌려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새로운 신앙의 항목들을 날조해 내거나 어떤 결정들을 내린다면, 우리는 이것들을 마귀들의 교리라고 정죄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우리의 영혼들을 한 하나님의 음성으로부터 이탈시켜서 사람들의 교리들과 가르침을 따르게 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공의회 다운 공의회의 소집 이유는 이단들을 논박하거나 신앙의 공적인 고백서를 작성하여 후세 사람들에게 주는데 있다. 이 때 표준은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의 권위이지 다수에 의해서 오류를 범할 수 없다고 하는 어떤 의견이나 특권도 아니다.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집인 교회 안에서 모든 것이 적당하게 행해져야 하고 질서 있게 처리되어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좋은 행정과 직제를 만들어 운영하는 것이다.

본 항목에 보게 되면 장로교의 정치 원리가 잘 제시되고 있는 것도 특징이지만(두 번째 이유), 더욱 큰 특징은 총회 소집에 대한 정신을 명확히 하므로 인해서 당시 스코틀랜드 개혁교회가 어떤 정신에 의해서 신앙고백서를 만들고 또한 사용하고 지켜 갔는지를 알 수 있다.

 

먼저 본 장에서는 객관적인 신앙고백의 기준이 어떤 근거에 의해서 권위를 갖게 되는 것인지와 신조의 철저한 내용을 지키고 간직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를 알 수 있는 중요한 내용을 던져 주고 있다. 먼저 신앙고백서라는 것은 성경 보다 더 높은 권위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기준을 두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다. 즉 “우리는 공의회의 결정이 하나님의 명백한 말씀에 의해서 확인되는 한 존중하고 수용한다”, “이 때 표준은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의 권위이지” 라고 고백하듯이 철저하게 성경의 참된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서 신앙고백서는 사용되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개혁교회에서 신조를 채택하고 높은 권위를 두었던 것은 그것이 성경보다 더 높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성경을 섬기고, 보호하며, 더욱 드러내기 위한 목적으로 주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신조를 배우면 성경을 무시하게 된다고 주장하면서 교회 안에서 신조를 채택하고 배우는 것을 거부하는 행위들은 인정될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신조를 바르게 채택하고 배우게 될 때 성경을 가장 깊이 존경하고 간직하게 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신조의 권위란 이처럼 성경을 세우고 섬기는데서 오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객관적인 기준으로서 즉 우리의 신앙과 삶에 있어서 제 2 의 기준으로서의 권위를 갖게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신조을 보존하고 지켜가는 것에 대한 중요한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공의회의 결정이 하나님의 명백한 말씀에 의해서 확인되는 한 존중하고 수용한다. 그러나 만약에 공의회의 이름을 빌려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새로운 신앙의 항목들을 날조해 내거나 어떤 결정들을 내린다면, 우리는 이것들을 “마귀들의 교리”라고 정죄 할 것이다”라는 표현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신조는 성경처럼 절대적으로 완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신조를 항상 수정, 보완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즉 신조를 성경처럼 절대적인 권위로 이해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신조를 개인의 생각이나 시대의 형편에 맞게 아무렇게나 마구 수정해도 좋다는 것은 아니다. 즉 신조를 수정하려고 할 때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으로 더욱 분명하고 정확하게 돌아가려고 할 때만 수정할 수 있다는 것임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이처럼 그 수정정신도 시대의 변천이나 문화의 요구에 따른 수정이 아니라 보다 더 엄밀한 성경의 참된 의미를 드러내고자 할 때 수정하는 것임을 밝힘으로서 후대의 미국장로교회에서 논쟁되어지는 문화적 요구에 의한 수정정신이 얼마나 잘못되고 위험한 것인지를 여기서도 명확히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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