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의 예언과 방언, 과연 성경적인가?
팔머 로버트슨
오늘날에도 방언은 존재하는가?
현대 교회에 있어 '방언'의 문제는 매우 다양한 이견을 지속적으로 양산하는 진원지이다. 일부 사람들은 방언에 대한 열의가 대단하다. 다른 이들은 최근 방언 현상이 교회 가운데 사탄이 일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고 아주 확신한다. 복음주의 진영의 신자들 대부분은 오늘날의 방언 현상에 대해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전혀 모른다.
당신은 이런 다양한 의견들 가운데 어떤 판단을 내리겠는가? 당신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 '방언'이라 불리는 것이 일어나고 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당신은 그런 현상이 지니는 의미에 대해 어떤 식으로 건전한 결론을 내리겠는가?
성경을 연구함으로써 그런 결론을 얻을 수 있음은 물론이다. 다양한 사람들 가운데 일어나는 종교적 체험을 주의 깊게 살피는 것은 확실히 중요한 일이다. 다만 모든 종교적 체험은 결국에는 성경의 객관적 검증을 받아야 한다. 그리스도인 친구들에게 베풀 수 있는 가장 큰 호의는 그들이 경험한 체험을 성경으로 검증해 볼 것을 종용하는 것이다. 이는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의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하기 때문이다(잠27:17).
성경에 나타난 방언의 주체를 '신선한 표정'으로 주목하려는 시도는 이미 이 주제에 대한 유용하고 방대한 자료들이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회의 어린 시각으로 비춰질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을 해석하여 방언에 대해 재평가를 하기 위해서는 이런 노력은 불가피하다.
신약 성경은 마가복음의 마지막 장을 제외한 오직 두 책에서만 방언형상을 언급한다. 반면 구약 성경은 세 명의 저자를 통해 신약의 방언 현상을 예언한다. 종합해 보면, 방언에 존재하는 네 가지 측면이 신약과 구약을 통해 드러난다. 신․구약 성경은 모두 다음 과 같은 결론에 증거를 제공한다. 즉, 오늘날 교회 안에 나타난 방언은 구약의 예언이 예견하고 신약의 체험 속에서 실현된 방언과는 다른 것이라는 사실이다. 다음은 방언에 대한 네 가지 요소다.
1. 신약에서 방언은 계시적이었다.
2. 신약에서 방언은 외국어였다.
3. 신약에서 방언은 공적인 활용을 위한 것이었다.
4. 신약에서 방언은 구속사를 향한 급진적인 변화를 보여주는 징조였다.
성경적인 방언이 갖는 이런 특징들은 오늘날 일어나는 현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제공한다. 이제 이런 사항들을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자.
신약에서 방언은 계시적이었다.
성경 해석을 통해 신약의 예언이 계시적이었다는 결론이 도출된다면 다음 사실은 분명하다. 즉, 사람이 의도적으로 성경을 벗어나 계시가 지속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이상, 오늘날 나타나는 방언은 신약에서 말하는 방언과 같은 것으로 간주될 수 없다. 몇 가지 중요한 사항들이 이런 결론을 증거하는데, 그 가운데 첫 번째 사항은 고린도전서 14장과 나머지 신약성경에서 '비밀'이라는 말이 쓰인 용법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 2절에서 말한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비밀(뮈스테리온: musthvrion)이라는 말은 신약에서 아주 독특한 의미로 쓰이는데,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는 것에 대한 본래 개념을 담고 있다.
이미 지적한 바처럼, 신약에서 '비밀'은 한때 감추었다가 이제 드러나게 한 하나님의 구속하시는 방식에 대한 진리다. 그 본질에 있어 신약의 '비밀'은 계시적 현상이다. 이런 결론은 신약에서 '비밀'이라는 말이 쓰인 모든 용법에서 실제로 지지를 받는다.
'비밀'이란 말은 신약에서 대략 스물여덟 번 정도 등장한다. 성경에서 그 의미가 일관성 있게 유지되는 것은 다름 본문들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마태복음 13장 11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이 '비밀'은 더 이상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숨겨진 것이 아니다. 천국의 비밀은 감춰지기 보다 오히려 계시된 진리다.
바울은 로마서 11장 25절에서 설명한다.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스라엘에 대한 '신비'는 그 비밀에 담진 진리를 계시했으므로 더 이상 알 수 없는 대상이 아니다.
로마서 16장 25-26절에서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이제는 나타내신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신비의 계시를 따라 된 것이니." 바울은 복음의 '신비'가 이제는 계시되었기 때문에 확신을 가지고 전파할 수 있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시작하면서 말한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비밀)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바울이 선포한 것은 수수께끼가 아니었다. 바울은 이해가 필요한 무엇인가를 공개적으로 선포했다. 바울은 계속해서 같은 어조로 다음 사실을 지적한다. 즉,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감추었다가 이제 공개적으로 선포할 수 있기 때문에, 기독교 사역자들이 하나님의 지혜를 말한다는 것이다(고전2:7). 사람들은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청지기로서 기독교 사역자들을 대우해야 한다(고전4:1). 사역자들이 하나님의 비밀을 전하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비밀'을 이해한다.
바울은 고린도 전서 13장 2절에서 자신이 '모든 비밀을 알게 될'경우를 말하고 나서, 고린도 전서 15장 51절에서 선언한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고린도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 '비밀'은 하나님의 구속하시는 진리에 속한 요소이자, 이제 우리가 알게 된 것으로 등장한다.
이렇게 '비밀'을 이해하는 현상이 바울이 남긴 모든 서신에서 나타난다. 에베소서 1장 9절에서 바울은 말한다.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바울이 '비밀'을 알게 된 것은 바로 '계시'로 말미암는다(엡3:3).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이 자신이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은 사실을 '알기'원했다(엡3:4). 바울은 모두에게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나타내고자 했다(엡3:9). 그리스도 안에서 결혼이 지닌 '비밀은 크다.' 그런데 바울은 이제 비밀을 사람들에게 알려 준다. 에베소 성도들은 바울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도록" 간구해야 한다(엡6:19, 20).
골로새서 역시 '비밀'이라는 말을 똑 같은 의미로 다룬다. 바울은 골로새서 1장 25절에서 선포한다.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워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골1:25-26). 바울이 복음을 사람들이 알도록 전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 알게 하려"하셨기 때문이다(골1:27). 바울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비밀을 깨닫도록 노력했다(골2:2). 마지막으로 바울은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고 성도들에게 부탁한다(골4:3).
데살로니가 후서 2장 7절은 '비밀'이 이같이 사용된 예에서 벗어난 모습을 보여준다. 본 구절은 아직 풀지 않은 불법의 '비밀'을 언급한다. 바울은 디모데전서 3장 9절에서 집사는 반드시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한다고 설명한다. 바울은 디모데전서 3장 16절에서 경건의 '비밀'이 크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바울은 계속해서 이 비밀에 대해 설명한다. "그(하나님)는 육신으로 나타난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함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가운데 올려지셨느니라." 바울이 나타내시고자 한 요점은 '비밀'이 한 때 숨겨져 있었으나 이제 알려지게 된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요한 계시록에 보면, '일곱 별의 비밀'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일곱 개의 별은 일곱 개의 교회다(계1:20). 사도 요한은 "하나님이 그의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하나님의 그 비밀이 이루어지리라."고 계시한다(계10:7). 같은 방식으로 바벨론은 해석하는 천사가 '설명해 줄 비밀'이다(계17:5-7).
신약에서 '비밀'이라는 말이 스물여덟 번 사용됐다. 우리가 오늘 날 숙고하고 있는 고린도전서 14장을 잠시 제쳐두고 본다면, 나머지 스물일곱 번 사용된 경우들에서 '비밀'은 한 때 감추어져 있다가 이제 드러난 것으로 언급되었음을 분명하게 볼 수 있다. 기독교는 결코 비밀의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는 비밀 경전에 기초한 수많은 다른 종교와 대조를 이룬다. 기독교는 모든 것이 공명정대하게 드러나길 원한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숨기는 것이 없으시다. 하나님은 빛을 보내어 어둠을 내쫓듯이 같은 방식으로 세상에 진리를 공개적으로 나타내신다.
지금까지 살펴본 넓은 문맥에서 생각해보면, 고린도전서 14장 2절에 언급된 '비밀'에 대한 적절한 이해를 이끌어 낼 수 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비밀을 말함이라." 바울은 '비밀'이라고 말하면서 진리를 숨기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의 계시로 알게 된 진리를 사람들에게 전달한다. 방언은 계시를 전달하는 데 사용한 하나님의 도구였다. 한때 감추어졌으나 이제 드러나게 된 구속의 진리를 계시하는데 하나님이 사용한 수단이 바로 방언이었다. 고린도전서 14장 2절의 '비밀'을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본문의 남은 부분을 볼 때 얼핏 모순되어 보인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고전14:2). 알아듣는 자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방언으로 발설된 메시지가 계시적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성경 전체에 묘사된 '방언'이 외국어라고 한다면 본문의 설명은 이치에 맞게 된다. '방언'이 청중도 알아듣지 못하고 말하는 자에게도 낯선 '언어'라면, 우리는 본문이 말하는 현상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다. 성경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고전 14:2)라는 구절에서 볼 수 있듯이, 말하는 자는 계시의 도구로서 말하지만 계시에 사용된 언어는 통역이 없이는 이해가 안 된다. 이런 면에서 고린도 교회가 처한 상황은 처음 방언이 일어난 날 예루살렘이 처한 독특한 상황과는 대조를 보인다. 오순절 당시에는 사람들 가운데 세상에 퍼져 있는 다양한 언어로 말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듣는 이도 있었다. 예루살렘에 있던 사람들은 각자 자기 고향의 말로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들었다. 반면 고린도 교회에서는 모든 언어가 사용될 가능성이 없었다. 그 결과, 계시로 임한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해도 그것을 이해하는 자가 없었다. 말하는 자가 방언으로 '비밀'을 계시했으나, 방언에 익숙한 자가 없었으므로 계시를 이해하는 자도 없었다.
어느 경우든 "방언'과 관계한 '비밀'이라는 말은 방언이 본질상 계시적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나타내는 용법으로 사용됐다. 구속을 이뤄 가는 하나님의 방식이 '비밀'에 담겨 있는데, 그 비밀이 방언의 은사를 통해 새 언약에 속한 하나님의 백성에게 '계시'되었다. 방언이 지닌 계시적 특성은 바울의 부연 설명으로 더욱 확증된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고전14:4-5).
인용한 문구 마지막 구절에 따르면, 통역된 방언은 예언과 같은 것이 된다. 방언으로 전달된 메시지는 방언이 통역이 되면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예언이 된다. 구약과 신약에 나타난 성경의 증거가 지지하듯이 예언이 계시적인 은사이고 통역된 방언은 예언과 같은 것이 된다면, 방언 역시 계시적 은사의 하나로서 이해해야 한다. 구약과 신약에 나타난 성경의 증거가 지지하듯이 예언이 계시적 은사이고 통역된 방언은 예언과 같은 것이 된다면, 방언 역시 계시적 은사의 하나로서 이해해야 한다.
교회 생활에 있어 방언과 예언의 관계를 설명한 바울의 요점을 좀 더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변해야 한다. 즉, 말은 어떻게 덕을 세우는가? 정확히 말해서 예언이라는 말의 은사 안에 있던 무엇이 '덕을 세우는' 역할을 한 것인가? 교회의 덕을 세웠던 것이 선지자의 목소리가 일으킨 감동이었는가? 그것은 청중의 귀에 울린 물리적인 진동이었는가? 아니면, 어찌됐든 듣는 이들에게 덕을 세우는 효과를 냈던 것은 선지자 자신이 경험한 감정이었는가?
아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지극히 거룩한 믿음 가운데 세울 수 있던 것은 청각적인 감동 때문이 아니었다. 덕을 세우는 예언이 계시를 전달하고, 그 계시로 하나님의 진리가 임하는데, 성도들에게 덕을 세우는 것은 바로 그렇게 임한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는 것이었다. 이해할 수 있고 믿을 수 있는 것으로 진리를 전달했기 때문에 듣는 사람들이 믿음 가운데 뿌리를 내렸다.
유사한 방식으로, 방언을 통역해서 사람들이 계시로서 이해할 수 있게 되면, 반면 통역이 없는 상태에서 어떤 사람이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목격하는 것만으로는 관찰자에게 덕을 세우는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방언으로 발설된 메시지를 듣는 자들에게 통역하면, 방언을 말하던 사람과 마찬가지로 듣는 자들에게 통역하면, 방언을 말하던 사람과 마찬가지로 듣는 이들 가운데도 덕이 세워졌다. 통역한 방언은 억을 세우는 능력에 있어 예언과 같았기 때문이다. 한 번 통역했다면 '방언'으로 전달된 메시지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하나님의 음성이 되었따.
한 가지 더 깊이 생각해 볼 문제가 있는데, 이 역시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 즉, 방언을 말하는 자는 어떻게 방언을 통해 덕을 세우는 효과를 받았는가? 바울은 분명하게 진술한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고전14:4). 방언으로 말하는 행위 가운데 무엇이 덕을 세우는 원인이 되었는가? 방언하는 자의 덕을 세웠던 것이 방언 현상에 동반된 육체의 진동이었는가? 덕을 세우는 것이 체험을 포함한 감정이었는가? 예언과 마찬가지로 방언은 말의 은사다. 말의 은사는 깨달음을 전달함으로써 덕을 세우는 기능을 한다. 말의 은사를 활용해서 덕을 세우는 것은 입 안에서 우리는 물리적인 진동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비이성적인 감정의 동요로 발생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말의 은사를 통해 세워지는 덕은 화자가 자신이 말한 진리를 이해하고 믿을 때 일어난다. 그렇지 않고서는 화자에게 덕이 세워지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거나 설교하는 사람은 누구나 신령하게 덕을 세우는 일에 있어 이와 같은 기본 원리를 이해한다. 설교자는 단순히 설교에 대한 은사를 행사하는 것만으로 자신이 견실해지지 않음을 잘 안다. 설교자에게 덕이 세워지려면 반드시 자신이 말한 것을 이해하고 믿어야 한다.
만일 이 같은 원리가 사실이 아니라면, 교회의 덕이 세워지는 방식은 완전히 다른 개념이 될 수밖에 없다. 말하는 사람이 자신이 말하는 것을 이해하지 않아도, 성령이 말의 은사를 사용하는 것만으로 화자의 덕을 세울 수 있다면, 말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듣는 사람도 똑같은 결과를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방언으로 말한 사람이 그가 말한 것을 똑같이 이해하지 않았음에도 덕 가운데 세워질 수 있다면, 회중이 같은 방식으로 덕 가운데 세워지리라 기대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쿠에스리레스포유'와 같은 소리를 내면서 느끼는 감정이 화자의 덕을 세우는 능력을 가졌다면, 왜 청중의 귀에서 울리는 것을 통한 똑같은 감정이 덕을 세우는 효과를 내지 않았는가?
말하는 사람이 아무리 열정적일지라도, 메시지를 이해하지 않으면 청중을 조금도 덕 가운데 세울 수 없다. 바울은 이 점을 강조한다. 알아듣지 못하면 아무도 자기의 덕을 세우지 못한다(고전14:2). 말의 은사를 통해 덕을 세우는 것은 말을 이해하는 행위와 본질적으로 연결된다.
이와 같은 원리에 따르면, 방언을 통해 처음 화자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전달하고 다음으로 청자에게 전달했을 때 교회의 덕은 세워진다는 결론이 필연적으로 도출된다. 깨닫는 행위 없이 덕이 세워지는 일은 없다. 하나님이 방언을 말하는 자를 덕 가운데 서게 한 것은 하나님의 진리가 그에게 직접 임하여 계시적 체험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방언을 말하는 자가 경험한 체험은 계시적 체험으로서, 하나님은 체험을 통해 그 사람이 자기의 덕을 세우는 데 효과가 있는 지식을 주셨다.
이 시점에서 고린도 전서 14장 14절을 세심히 살펴보아야 한다. 이는 바울이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언급한 원리에 모순하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 맺지 못하리라." 이 진술은 마치 방언으로 기도하는 자는 자신이 말하는 바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듯 보인다. 자신의 비이성적인 '영' 자체가 방언으로 하나님께 기도할 때 아주 효과적인 것으로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또 방언하는 자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상태가 되는데, 이것은 방언하는 자가 스스로 방언으로 말한 바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와 같이 본문을 피상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인간의 '영'과 '마음'에 대한 그런 개념들이 신약 성경에서 나타난 것인 양, 그것들을 잘못된 이분법에 근거해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영(프뉴마, pneu'ma)'과 '마음(노우스, nou'")'을 그렇게 서로 극단적으로 분리할 수 없다. 영과 마음이 얼마나 긴밀하게 상호 작용하는지 그리스도의 공생애 가운데 나타나 한 사건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예수님을 대적하는 무리 가운데 나타난 한 사건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예수님을 대적하는 무리 가운데 일부가 '마음에 생각하기를'그가 신성 모독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막2:6). 예수님은 그들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곧 중심에 아셨다'. '안다'라는 말은 고린도 전서 14장 14절에서 볼 수 있듯이 '마음'을 나타내는 어근에서 파생한말이다. 반면 '영'이라는 말은 같은 절에서 발견할 수 있는 두 번째 말이다. 복음서에 다르면, 예수님은 '중심(spirit)'에 '이성적인 지식'을 가지셨는데, 이것은 '영'이 단지 인간의 감정적인 부분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인간의 '마음'과 '영'은 서로 교통한다. 인간의 '영'은 비이성적이고 순전히 감정적인 부분이며 반면 '마음(nous)'은 사유하는 능력이라고 언급하는 것은 성경이 인간에 대해 교훈하는 바에 모순하는 잘못된 이분법이다.
바울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고전 14:14)라고 말하면서 의미한 것은 자신의 영혼에서부터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것이다. '영으로' 이렇게 기도하는 것은 이성적인 깨달음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바울은 기도하면서 지성적인 깨달음으로 자신의 덕을 세웠다. 반면 자신의 생각을 조직적으로 나타내어 타인에게 전달하는 데 도구가 되는 '마음'은 '열매 맺지 못한'상태에 머물게 된다.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 회중 가운데 어느 누구도 바울과 더불어 덕 가운데 세워지지 않는다. 바울이 방언으로 말하는 내용을 이해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바울 자신에게는 충분히 훌륭하게 덕이 함양된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는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바울의 생각이 전달되지 않기 때문에 덕이 세워지지 않는다. 바울이 '혀'로 말하는 것을 이해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바울의 기도에 아무도 동참할 수 없다. 만일 성령의 영감을 받아 영으로 말하는 내용을 사람들이 아는 언어로 통역한다면, 그들이 역시 말하는 바울과 함께 덕이 함양될 수 있을 것이다.
14절을 이와 같이 이해하는 것은 바로 이어지는 절을 통해 강하게 확증할 수 있다. 바울은 방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에게 말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알지 못하는 처지에 있는 자가 네게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하리요 너는 감사를 잘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고전 14:16-17).
방언으로 말하는 사람이 자신이 한 말을 이해하지 않아도 감사를 '잘 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듣는 사람이 화자가 말하는 것을 전혀 깨닫지 않은 상태로 참여하여 마음으로 감사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방언으로 말하는 사람이 충분히 감사를 드렸기에 자신이 한 말을 이해했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이 말의 은사를 통해 이뤄지는 덕이라는 참된 양식에 더 일괄된다. 반면, 듣는 사람은 이해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도에 참여할 수 없었다.
이제까지 학자들의 추측은 다음과 같았다. 즉, 바울이 의도적으로 묘사한 말의 은사는 화자가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화자의 덕을 세우지만 청중의 덕은 세우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본문의 증거는 다르다. 비록 그 말이 전에 전혀 배우지 않은 언어로 화자에게 임했음에도, 화자는 감사를 잘 하는데, 이는 자신이 신령하게 영감받아 한 말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다만, 청중이 그렇게 말한 것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 가운데 거룩함의 '열매를 맺지 못한다.'
14절을 이렇게 이해하는 관점은 5절을 좀 더 숙고해 볼 때 확실해 진다. 바울은 말한다.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고전14:5). 바울은 이점을 매우 강조한다. 통역된 방언은 예언과 동등한 것이다. 그러면 예언에 두신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인가? 왜 이와 같은 계시 전달 방식을 만드셨는가?
하나님이 예언에 두신 의도는 오류 없이 무오하게 구절마다 영감을 준 말씀을 자신의 백성에게 전달하는데 있었다. 하나님은 사니의 백성이 진리를 안전하게 보유하길 원하셨기 때문에 말씀이 부족하게 전달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마찬가지로, 사람을 성령으로 감동하여 '혀'로 말씀을 전하게 하는 데 하나님이 본래 가지셨던 뜻은 구절마다 영감으로 된 오류 없고 무오한 말씀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다. 통역된 방언은 오직 그것이 계시적 은사이기 때문에 영감을 받은 예언과 똑 같은 것이 될 수 있었다. 사람은 방언으로 말함으로써 모든 부분에서 오류 없고 무오한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했다.
이것이 방언에 대해 하나님이 본래 가지셨던 뜻인데, 통역의 은사가 영감을 받는데 방언과 예언의 은사와 똑 같이 은사로서의 기능을 할 때에만, 그런 하나님의 뜻을 관철할 수 있었다. 성령의 직접적인 영감을 받은 통역만이 구절마다 영감을 받고(축자영감) 오류 없으며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 지닌 특성을 보유할 수 있었다. 성경을 헬라어에서 영어로 번역하려고 시도했던 사람은 하나님이 원래 말씀 가운데 있는 정확성과 권위를 절대적이고 완벽하게 유지하려 할 때 성령의 영감을 받은 은사까지 가질 필요가 없었다는 사실은 고린도전서 14장 28절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통역의 은사는 방언을 말하는 사람이 계시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보다 더 구체적인 정확성을 요구한다.
성경을 번역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직접적이고 오류 없이 번역 과정에 성령의 감동을 주셨다고 분명하게 확증하지 않는 이상, 자신이 번역한 것이 구절마아 성령의 영감을 받아 오류없고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처음 하나님이 주셨을 때와 똑 같은 것이라고 주장하지 못한다. 어쨌든 바울은 본문에서 통역된 방언은 예언과 같은 것이라면, 방언 역시 하나님이 교회를 위해 사용하신 계시의 한 형태라고 보아야 한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오늘날 사람들이 경험하는 방언을 신약 성경에 나타난 방언과 같은 것으로 간주할 수 없으며, 성경 외에 계시가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근거로도 삼을 수 없다. 이러한 결론이 미치는 영향은 상당히 광범위하며, 하나님이 임명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을 통해 교회를 이 시대까지 통틀어 교란하지 않고 유지하도록 하나님이 교회의 기초로 주신 계시의 완전함을 문제삼는 것에도 영향을 미친다.
방언은 외국어였다.
사도행전 2장 6절을 보면 이 점이 분명히 나타난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이 사건 이후 사도행전 전체를 통해 나타난 증거를 보면, 오순절 이후 교회가 이와 다른 성질의 방언을 경험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사도행전에 나타난 증거는 오순절에 일어난 것과 똑같은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계속 진행되었음을 보여준다. 사도행전 10장을 보면, 베드로가 방언으로 말하는 이방인이 세례 받는 것이 옳다고 선언하는데, 이는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기 때문이었다(행10:47). 베드로는 이 사실을 예루살렘 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행 11:15). 사람들이 가이사랴에서 성령을 체험한 사실은 오순절에 사도들에게 임했던 성령 세례와 조화를 이뤘다.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방언으로 말하는 은사가 전혀 배우지 않은 외국어로 말한 것이라면, 똑같은 설명을 가이사랴에 있는 이방인들이 체험한 방언에도 적용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에베소서에서 나타난 방언의 은사에도 똑 같은 설명을 적용할 수 있다(행19:7). 사람들이 에베소 교회에서 방언을 체험한 것이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고 나서 일어났음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참고. 행18:1-19). 에베소 교회에 나타난 방언을 특징짓는 세부적인 설명은 없지만, 에베소에서 일어난 현상을 묘사하기 위해 그전에 있었던 사건에서 사용한 것과 같은 똑같은 언어를 사용한 사실은 에베소에서 나타난 '방언'의 성질이 사도행전 전체를 통해 누가가 언급한 '방언'과 부합하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암시한다.
사도행전은 고린도 교호에서 일어난 방언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참고. 18:1-18). 다만 바울이 고린도 성도들에게 보낸 첫 번째 서신에 따르면, 방언이 나타난 현상은 분명 고린도 교회 생활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차지했다.
고린도 교회에서 발생한 방언 현상이 지닌 본질은 무엇이었을까? 고린도에서 완전히 상이한 현상이 일어난 것에 비하면 사도행전이 묘사하는 고린도 교회의 전과 후의 모습에서 한 종류의 '방언'만이 나타난 것은 다소 의아해 보인다. 게다가 사도행전은 발생한 것으로 여겨지는 상이점에 대해 어떤 설명도 하지 않는다.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 모두 똑같은 용어를 사용한다. 사도행전 2장 4절은 "다른 언어"를 말하고, 고린도전서 14장 21절은 비슷하게 "다른 방언"을 언급한다. 두 본문이 사용한 헬라어는 거의 똑같은 것으로서, 각각 '다른 언어'로 번역할 수 있다. 더욱이 고린도 14장은 분명하게 외국어를 언급하는 구약 본문을 이용하여 고린도에서 일어난 현상을 설명한다(고전 14:21, 참고. 사28:11,12; 신28:49). 결과적으로, 바울이 엄격하게 적합하지 않은 구약 본문을 적용하고 있거나, 아니면 고린도전서 14장의 방언이 인용한 구약 본문이 예견한 외국어이거나, 둘 중 하나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좀 더 나아가 고린도전서 14장의 방언은 통역이 가능한데, 이 사실은 방언이 외국어였음을 암시한다. 설령 고린도전서에 나타난 그런 '언어들'이 '천사의 말'이었다고 결론을 내린다 해도, 그 방언들은 여전히 인간의 언어로 통역될 수 있는 외국어였다.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에 나타난 신약 시대의 방언이 외국어였다는 결론은 누적된 증거가 강력하게 뒷받침한다. 이런 결론은 근거가 확실한 신약 시대 경험에서 오늘날 방언으로 말하는 행위 대부분은 처음부터 제외해 버린다. 오늘날에 일어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신약 성경이 묘사하는 예배 체험에 속한 것이 아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최근 광범위하게 퍼진 한 견해는 그 시작 동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야기한 다소 예상하지 못한 결과 때문에 반드시 배척되어야 한다. 이 독특한 관점은 신약 성경이 묘사한 방언을 교회가 공적인 용도로 사용했다고 확신하면서 논리를 펴기 시작한다. 게다가 오늘날 나타나는 방언은 신약 성경이 묘사한 방언 현상과는 다른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결국에, 오늘날 발생하는 방언은 신약성경에서 볼 수 있는 방언의 성질이 아님에도 현대 교회에 주어진 성령의 은사라고 말한다. 신약의 방언과 다른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인정하지만,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이 사는 삶 속에서 독특한 역살을 감당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성령이 무섭게 흘러가는 현대인의 삶 때문에 이와 같은 은사를 만드시고, 이를 통해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현대 그리스도인이 정서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위안을 찾도록 하신다.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오늘날 사람들이 세상에 살면서 느끼는 긴장감에 해법이 될지 모른다.
우리는 이런 판단을 성경을 주해해서 얻을 수 없는데, 왜냐하면 성경이 취한 입장은 신약의 방언이 오늘날의 '방언'과 같지 않다고 확증하기 때문이다. 그 대신, 방언에서 발생 가능한 영향을 심리학적으로 관찰한 것을 근거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공적으로 모인 집회는 가장 극적인 현상에 노출되어 있다고 한다. 현대 사회가 겪는 특수한 감정적 스트레스를 하나님이 해결하신다고 하고, 그런 하나님의 방식에 대한 가정에 근거하여, 오늘날 방언은 예배가운데 합법적인 요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고후 11:28)으로 겪은 긴장감에서 정서적인 위로가 필요 없었다고 생각해야할까? 마르틴 루터는 현대적 방언의 은사라고 여겨지는 것으로부터 '심리적인 위안'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고 우리는 결론을 내려야 하는가? 왕들과 통치자들로부터 끊임없이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가운데, 루터는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이 처한 상황보다 스트레스가 적은 상태에 있었을까?
많은 활동이 심리적인 안정을 줄 수 있다. 외식하기, 비디오 보기, 골프치기 등은 마음을 새롭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것들을 성령의 '은사'로 간주하지 말아야 한다. 신령한 은사는 설영이 특별하게 경영하신 결과인데, 이것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 된 지체들이 서로 양분을 주고 섬긴다. 현대의 방언 현상이 신약의 방언과 본질은 다르지만 오늘날 교회를 위해 주신 성령의 은사라고 말하는 것은 체험을 중심으로 한 거의 모든 현상에 길을 터 주는 일이 된다.
1세기 당시 방언은 외국어였기 때문에, 외국어로 보이지 않은 이상, 오늘날 방언은 신약 성경이 보증하지 않는 현상으로 간주해야 한다. 이런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성경의 증거와 훨씬 부합해 보인다.
신약에서 방언은 사적인 용도가 아닌 공적인 활용을 위한 것이었다.
성령의 모든 은사는 그리스도의 교회에 유익을 주기 위해 주어졌다. 신약에서 '은사'는 한 개인에게 주어지고, 이로써 그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복을 공급한다. 사람은 성령의 '은사'를 통해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있따. 은사가 개인적 목적이 아닌 그리스도의 몸을 덕 가운데 세우기 위해 주어졌다는 사실은 은사가 지닌 전체 개념에 기본적인 것이다. 바울은 말한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4-7)
바울이 교회가 지닌 이미지를 몸으로 묘사하면서 마음에 두었던 것이 바로 이런 깨달음이었다. 몸의 각 지체는 직분을 받아 나머지 다른 지체에게 도움을 준다. 눈은 몸이 넘어지지 않도록 지켜준다. 입은 몸에게 영양분을 공급한다. 귀는 몸의 다른 지체를 대신해서 듣는다. 다양한 은사들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몸에 있는 지체들이 서로를 섬길 수 있게 된다.
신령한 은사가 갖는 공적인 성질을 염두에 두면서, 고린도전서 14장 18-19절을 좀 더 면밀하게 살펴보자. 바울은 말한다.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얼핏 보면 바울이 사적인 방언과 공적인 방언을 대조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바울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지 않은가?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사적으로)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공적으로)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여기서 바울은 방언에서 나온 사적인 말과 예언으로 한 공적인 말이 대비되는 것을 강조하는 듯 보이는데, 이는 바울이 '교회에서'라는 구를 예언으로 '깨달은 말'과 연결해서 사용했기 때문이다.
다만 해석자는 원래 성경 본문에 있지 않은 말이나 개념을 소개할 때 매우 조심해야 한다. 사실상 원어 성경에서 18절에 나타난 어순은 바울이 본문에서 의도한 본질적 대로를 매우 분명하게 보여준다. 분문은 사적인 말하기와 공적인 말하기를 대조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바울은 그리스도의 왕국을 보편적으로 확장하는 일 가운데 자신이 체험한 방언의 경험을 고린도 교회 안에 방언에 대한 큰 열정을 보이는 이들의 실태와 대조하고 있다. 바울은 말한다.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이 말을 하면서 바울이 채택한 어순은 그가 강조하는 바를 명확히 나타낸다. "너희 모든 사람들에 비해 나는 방언을 더 말 한다'(18절). 즉, 방언을 촉진하는 데 열의를 가진 고린도 교회 성도들과 바울에 대한 대조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 모든 성도들보다 더 방언으로 말한다고 확언한 것은 어쩌면 그들을 놀라게 했을 것이다.
다름 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대조하는 바를 설명한다.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해서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19절). 이것이 당시 바울이 했던 대조다. 본문은 교회 안에서 들리는 사적인 방언과 예언에 대한 대조가 아니다. 오히려 바울이 대조하는 대상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 가운데 방언을 조장하는 이들과 관련된 방언과 전체 교회에 관련된 방언이다. 바울은 말한다. "여러분에 대해 내가 갖고 있는 증거는 분명하다. 이 사실을 인정하라. 방언으로 말하는 것에 대해 내가 마치 그 문제 에 대해 모르는 것처럼 말하지 말라. 왜냐하면 나는 여러분 모두보다 방언을 더 말하기 때문이다. 나는 방언에 대해 직접적으로 알고 있다. 다만 교회에 대하여, 나는 교회의 덕을 세우는 언어로 말하기를 더 원한다. 사실상 내가 여러분 모두보다 더 방언을 말하지만, 내가 가진 관심사는 교회의 덕을 세우는 데 있다."
이것이 18절과 19절에 나타난 대조다. 사적인 방언과 공적인 방언을 대조하는 언급은 없다. 이는 신약의 방언이 사적인 용도로 사용되기 위해 주어진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성령이 나누어주는 모든 은사들과 마찬가지로, 방언은 전체 교회의 유익을 위해 주어졌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오늘날 나타나는 절대 다수의 방언 현상은 신약의 방언과 다르다는 것이 애초부터 분명해 진다. 사적인 방언은 신약의 방언이 아니다. 방언이 교회를 위한 은사라면, 방언을 반드시 교회의 유익을 위해 공개해야 한다.
방언이 '사적인' 은사라는 관념은 특정한 상황에 적용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복음 사역에 대한 부르심을 자신이 느꼈음을 확신다고 가정해 보자. 교회는 그 사람이 가진 은사를 교회가 검증하길 원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 사람은 스스로 판단하여 자신이 설교의 은사를 가졌다고 주장하면, 교회를 그 은사를 검증한다. 그가 자신에게 치리하는 은사가 있다고 말하면, 교회는 그 은사를 시험한다.
그러나 만일 복음 사역을 위한 이런 후보자가 자신이 방언의 은사도 가졌다고 선언하면 어떻게 되는가? 교회는 그 은사도 검증하는가? 아니면 방언은 검증할 수 없는 '사적인'은사라고 결론을 내려야 하는가? 그런 상황은 정말 이상하지 않겠는가? 어떤 사람이 자신이 몸의 유익을 위한 은사를 가졌지만 그 은사를 검증하지 못한다고 결론을 내린다. 교회는 성령이 주는 다른 은사들을 모두 검증해야 한다. 그런데 은사에 대한 범주 안에는 형제들의 검증을 받을 수 없는 은사도 있다. 교회 안에서 이런 상황이 발생하면 정말 당황스러울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또 다른 한 구절을 세밀히 분석하여 교회 안에서 '사적인' 은사들이 발생할 개연성에 대해 알아봐야 한다. 왜냐하면 고린도전서 14장 28절이 만일 방언으로 한 말이 지닌 의미를 알려 줄 "통역하는 자"가 없다면, 방언을 말하는 사람은 교회 안에서 침묵해야 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해야 한다."고 진술하기 때문이다. 바울이 이렇게 진술한 것은 교회에서 공적인 기능을 하지 않는 사적인 은사를 인정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한 측면에서만 보면, 본 구절은 방언의 은사를 사적으로 소유하는 것을 인정하는 듯 보인다. 통역하는 자가 없다면 방언을 말하는 사람은 '자기와 하나님께 말해야 한다.'
하지만 좀 더 살펴보면, 본 구절은 이 같은 관점을 지지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본문이 담고 있는 전체 취지가 교호에서 작용하는 다양한 은사들을 질서 있게 통제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방언으로 말하고, 누군가는 반드시 통역해야 한다(27절). 유사한 방식으로,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해야 한다(29절). 전체 문맥은 성도들이 교회 인에서 은사를 질서 있게 활용하는 문제를 다룬다. 매우 세심하게 논리를 펴 가는 본문 상황에서 바울은 통역하는 자가 없다면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는 자가 없는 이상 자신을 자제하지만, 동시에 그는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자신 안에서 말한다.
문제는 방언의 은사가 사적으로 작용하는지 아니면 공적으로 작용하는 자에 있지 않다. 오히려 문제는 어떤 때에 방언의 은사가 교회 안에서 작용하는가에 있고, 이에 대한 해답은 오직 통역하는 자가 있을 때에만 방언이 질서 있게 교회 안에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31절에서 때가 되면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다."라고 설명한 것을 보면, 똑 같은 원식을 방언에도 적용함을 가정할 수 있다. 통역하는 자가 있기만 하면, 방언으로 한 말은 사람들에게 전달될 수 있다. 다만 한 편으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다른 선지자처럼 모임에서 인내해야 한다. 이는 예언하는 자가 방언하는 자의 영을 제재하기 때문이다.
어느 경우든, 분문의 문맥은 은사가 수행하는 공적인 기능을 가정한다. 말의 은사로서 방언과 예언은 전체 공동체를 위한 것이지 단순히 개인이 사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다. 어떤 사람이 개인적인 체험을 통해 '방언'을 사적으로 활용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다. 그는 이성적인 과정을 거치지 않고 기도 가운데 소리를 냄으로 긴장감에서 큰 위안을 얻었다고 증언할지 모른다. 그가 사용한 '기도언어'는 그로 하여금 오늘날의 삶을 맞닥뜨려 헤쳐 나아도록 돕기 위해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은사'다.
그러나 결국, 성경이 체험을 판단해야 하며, 체험이 성경을 판단해서는 안된다. 기도를 하면서 내는 탄식은 종종 그런 절실한 감정을 나타내기 때문에 이성적인 표현을 나타내는 데 어려움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납득할 만한 성경 해석적 논지가 그런 체험을 증명할 수 없다면 신약에 나타난 방언과 동일시 해서는 안된다.
신약에서 방언은 징조였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일하시는 데 취하신 절차의 방향에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는데, 하나님은 이런 변화를 예견한 특정 예언들이 성취되었음을 방언이라는 징조를 통해 나타내셨다.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전적으로 예기하지 않은 일로 놀라게 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하나님은 백성이 그분이 하는 일을 이해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신다. 우리는 하나님이 세상에서 일하시는 방식을 보여 주는 이런 기본적인 원리를 신약 시대에 나타난 방언의 은사에도 적용할 수 있다. 예언과 성취, 준비와 실현은 함께 작용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덕 가운데 세우고 계몽한다.
일리노이 주 시카고 외각에 위치한 교회의 한 장로는 취미로 곡예비행을 즐긴다. 비행할 준비가 됐다면 곡예 비행사와 함께 비행하는 것은 무척 재미있는 일이다.
"날아 볼까요?"
"그럼요, 어서 날아 봅시다! 단, 예기하지 않은 비행으로 놀라게 하지는 마세요."
"그러죠, 그럼 공중제비를 작게 돌아보죠. 준비하세요. 당신은 'G' 팩터라는 중력이 당기는 힘을 느낄 겁니다. 얼굴 골격 윤곽선을 중심으로 살이 앞으로 쏠릴 겁니다. 그걸 '중력' 요인이라고 하죠."
그 다음 조장사가 '헤머헤드'를 예고한다. 이 비행에서 비행기 앞은 하늘을 향한다. 중력이 엔진의 힘을 이기는 순간까지 비행기는 위로 치솟는다. 엔진이 멈추기 시작하면 비행기는 비스듬히 낙하한다. 당신은 아래로 떨어질 때 엔진이 다시 움직이길 바랄 것이다. 이것이 곡예비행이다. 여러 가지 비행술을 적절하게 준비한 다면 문제될 게 없다.
하나님은 훨씬 합리적인 방식으로 구속사에서 일어날 일에 자신의 백성을 준비시키신다. 그분은 자신의 백성을 깜짝 놀라게 하지 않으신다. 방언의 형상도 오순절에 급작스럽게 완전히 생소한 것으로 소개하지 않으셨다. 구약 예언이 다가올 방언 현상을 위해 이미 준비 작업을 했다.
우리는 베드로가 오순절에 선지자 요엘의 예언을 인용한 사실을 주목해 보았다(행2:16-21). 열두 사도들이 배운 적이 없는 언어로 말하기 시작하자, 베드로는 요엘의 예언이 성취되었다고 말한다. 요엘은 하나님이 마지막 날에 하나님 자신의 영을 모든 육체에 부으실 것이라고 예언함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예비시켰다. 베드로는 아들, 딸들이 방언으로 말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것이 요엘이 말했던 내용인가?
아니. 요엘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베드로가 말한 것은 무엇인가? 베드로는 아들, 딸들이 예언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오순절은 방언이 나타난 위대한 놀로 분명한 특징을 보여 준다.
베드로가 성경을 왜곡한 것일까? 베드로 자신이 듣고 싶었던 것을 말하기 위해 요엘의 예언을 억지로 해석한 것일까?
아니다. 베드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다만 베드로는 요엘의 예언을 '방언'에 적용하여 방언이 지닌 본질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토대를 제공한다. 방언은 예언의 한 부분으로 간주해야 한다. 따라서 요엘은 마지막 날에 있을 예언을 예견하면서 방언 현상에 대한 예비지식을 전했다. 베드로가 오순절에 요엘의 예언을 적용했기 때문에 방언이 예언의 한 형태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4장 21절에서 이사야의 말을 인용한 것은 방언이 지닌 기본적인 성질을 이해하는 데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바울이 인용한 구약 본문은 사실상 '다른 방언'을 언급한다.
구약 성경은 '방언'을 정확히 세 번 명시적으로 언급했다. 구약 성경의 서로 다른 책에서 세 명의 저자들이 방언을 분명하게 예언한다. 구약 본문은 각각의 경우마다 방언을 이스라엘에 대한 언약적 저주를 나타내는 징조로 지목한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 20-22절에서 방언을 예언하는 세 개의 본문 가운데 하나를 인용한다.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전14:20). 고린도 성도들은 은사를 활용하는데 아이처럼 행동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이 은사를 장난감처럼 사용했다. 다른 사람이 방언으로 한 말을 이해하는지는 관심 밖이었다.
바울은 말한다. "아이가 되지 말라." 두 살 된 아이는 음식을 손으로 움켜잡아 짓이겨 손가락에 묻은 것을 먹을 수 있다. 시간이 되면 그는 아이처럼 행동하던 것을 멈춰야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사를 아이처럼 사용할지 모른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방언을 어린아이처럼 사용하는 것을 멈추라고 촉구한다. 바울은 구약 성경이 '다른 방언'에 대해 말하는 것을 근거로 훈계한다.
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방언을 말하는 자외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그들이 여전히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고전14:21)
바울은 이사야 28장 본문을 인용하여 구속사의 문맥 속에서 방언을 해석한다. 바울은 이사야 본문에 나타난 정황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설명한다. 이사야 선지자는 묻는다. "그들이 이르기를 그가 누구에게 지식을 가르치며 누구에게도 도를 전하여 깨닫게 하려는가"(시28:9상). 이사야는 바로 자신이 낸 해답으로 말한다. "젖 떨어져 품을 떠난 자들에게 하려는가"(사28:9하).
바울이 분명하게 관찰한 대로 고린도 성도들은 영적인 은사들을 활용하는데 아이처럼 행동했는데, 이사야 당시 하나님의 백성은 이런 현상을 이미 예견했다. 이사야 선지자는 당시 유아 상태에 있는 백성에게 훈계를 전달하는 데 하나님이 취한 기본적인 방식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대저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되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는구나 하는도다(사28:10).
하나님은 백성이 아이 같은 상태여서 아이 대하듯 말씀하셔야 한다. '거리에서 뛰지 말라. 냅킨을 무릎에 두라. 가서 잠자리를 펴라.'
당시 이사야는 이스라엘 백성이 저지른 어리석음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을 선포했다. "그러므로 더듬는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그가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사28:11).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이 여러분의 모국어로 분명히 말씀하신 것을 듣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외국어로 말씀하실 것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여러분은 그분의 말씀을 아기가 어른들이 하는 말을 듣듯이 듣게 된다. 여러분이 아이처럼 행동하려 한다면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아이처럼 말씀하신다.
아이가 과자와 우유를 가지고 바닥에 앉아 있다. 과자를 먹고 우유를 바닥에 붓는다. 엄마가 와서 아이에게 말하기 시작한다. 아기는 무슨 말을 들을까? 아이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듣는다. 어른이 쓰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아이는 엄마가 하는 말을 재잘거리는 소리로 듣는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아기는 심판의 말을 듣는다. 이사야는 외국인들이 사용하는 '방언'이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음을 나타낼 것이라고 말한다. 회개하지 않은 백성은 외국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땅을 침략할 때 그것이 하나의 징조로서 하나님이 이방인의 군대를 통해 그들을 심판하심을 인식해야 한다. '알지 못하는 말을 하는 바벨론'의 군사는 최초로 '바벨탑'에 언어의 혼잡을 가져왔던 심판이 다시 임했다는 사실을 이스라엘에게 보여준다.
하나님의 백성을 심판하는 징조가 외국어라는 사실을 말한 선지자는 기원전 8세기에 살던 이사야가 처음은 아니었다. 훨씬 거슬러 올라가 모세가 살던 시대를 살펴보면, 외국어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 사실을 나타낸다. 성경에서 가장 무서운 본문 가운데 하나는 불순종한 이스라엘에게 내려질 언약에 속한 저주를 설명한다. 다음은 언약을 어긴 자에게 반드시 임할 저주 가운데 하나이다.
곧 여호와께서 멀리 땅 끝에서 한 민족을 독수리가 날아오는 것 같이 너를 치러 오게 하시리니 이는 네가 그 언어를 알지 못하는 민족이요(신28:49)
모세 당시 이런 예언적 문맥 속에서 방언이 지닌 의미는 분명하다. 즉, 방언은 이스라엘에 임했던 심판에 대한 징조였다. 언약적 저주를 담은 징후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지 않을 때 반드시 이행되어야 한다. 이와 같은 메시지가 이사야 이후 150년이 지난 예레미야의 시대에 한 번 더 등장한다. 모세에서 이사야 그리고 예레미야까지 구약 예언에 나타난 방언의 의미는 똑같다.
예레미야는 바벨론이 팔레스타인을 정복한 시대에 살았다. 예레미야는 자신이 살던 시대에는 반드시 임할 심판에 대해 예언한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집이여 보라 내가 한 나라를 먼 곳에서 너희에게로 오게 하리니 곧 강하고 오랜 민족이라 그 나라 말을 네가 알지 못하며 그 말을 네가 깨닫지 못하느니라(렘5:15)
여기서 방언은 불순종한 국가에 내려질 언약적 심판에 대한 징후로서 똑같은 역할을 한다. '알지 못할 말을 하는 바벨론'이 이상한 방언으로 말하며 이스라엘을 침략할 때, 하나님의 언약 백성을 자신들에게 심판이 임한 사실을 알게 된다.
이렇게 성경은 방언이 지닌 의미를 단일하게 증거 한다. 기원전 15세기, 8세기, 그리고 6세기에 선포된 예언들 모두 똑같은 사실을 말한다. 외국어가 이스라엘에 들끓으면,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다는 신호다.
방언을 설명하는 구체적 예언들은 구약이 처한 정황을 훨씬 잘 묘사하는데, 이런 구약의 문맥에서 보면, 바울이 이사야 본문을 인용하여 설명한 것은 좀 더 이해하기가 쉽낟. 바울은 말한다. "방언은 표적이다"(고전14:22). 방언은 표적이며, 표적은 본질상 종결로 간주할 수 없다. 표적(신호)은 다른 뭔가를 나타낸다. 신호는 지표로 주목할 가치가 있는 다른 것을 밝혀준다. 신호는 눈앞 도로에서 방향이 바뀌는 지점을 가리키기도 한다. 곡선 도로를 나타내는 신호는 다른 방향으로 운전 하도록 알려 준다. 이런 경우처럼, 방언은 구속사 가운데 하나의 신호로 작용하여 하나님이 행하신 변화를 나타낸다.
하나님이 새 언약이 도래하는 시점에서 방언을 도임하여 변화를 꾀하고자 하신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이제 단일한 민족에게 하나의 언어로 말씀하지 않겠다는 것을 나타내셨다. 하나님은 적어도 모세 이후로 한 민족에게 하나의 언어로만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오순절 방언의 은사를 통해 많은 민족에게 다양한 언어로 말씀하시겠다는 뜻을 나타내신다. 하나님은 세상 모든 민족에게 존재하는 모든 언어로 말씀하신다.
따라서 방언은 하나님이 세상에서 역사하시는 방향에 극적인 변화가 일어났음을 보여주는 이정표 역할을 한다. 다른 한편으로 방언은 이스라엘에 대한 특징적인 심판을 나타낸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면서 심판을 언급하신다.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마21:43).
이스라엘 백성이 예루살렘 거리에서 바벨론 사람들이 말하는 외국어를 들었을 때, 오래전 예언들이 성취되었음을 경험했다. 백성은 하나님이 분명히 하신 말씀을 너무나 끈질기게 오랫동안 배척했다.
오순절 일어난 방언은 같은 방식으로 이스라엘에 대한 언약적 저주를 나타내는 신호였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세상 다른 민족과 차이를 두고 더 이상 특별하게 말씀하지 않으신다. 동시에 오순절 방언은 이스라엘을 포함한 세상 민족에게 하나님이 베푸시는 위대한 복에 대한 징표가 된다. 방언은 언약 안에 있는 하나님의 복이 세상 모든 민족에게 이른다는 신호였다. 비록 하나님이 왕국을 유대인에게서 취하셨지만, 또한 자비와 은혜로 이방인들 가운데 믿는 자들을 왕국에 접붙이신다.
우리는 이와 같은 이유로 방언을 구속사의 매우 특별한 시점에서 극적인 징조로 간주해야 한다. 장언은 진정 세상을 위한 복음으로 가는 과도기를 특징지었다. 그렇게 때문에 방언은 구속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징조의 원래 성질은 한시적이고 제한적이다. 도로에 커브를 나타내는 교통 표지판은 운전자가 방향을 바꾸면 더 이상 필요 없다. 운전자가 그 신호를 붙잡지 않기 때문에 계속 보지도 않는다. 한 번 방향이 전해지면, 표지판의 역할을 끝난다.
한때 세상은 기독교가 유대인의 종교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기독교는 유대인의 메시아와 열두 명의 유대인 사도들과 함께 시작했다. 하나님은 기독교의 근간이 되는 시대에 사도들을 통해 지표를 주셨는데, 그 지표를 통해 어느 나라 누구든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메시야 왕국에 속한 복에 이스라엘과 똑 같이 참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나타내셨다. 하나님은 다양한 언어로 말씀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듣는다. 모든 사람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역시 그리스도의 왕국에 초청됐음을 각자의 언어로 깨닫는 기회를 얻었다.
방언은 기독교가 지닌 보편적 성질을 극적으로 묘사한다. 하나님은 한 국민에게만 제한된 분이 아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놀라운 일들이 만국 언어로 울려 퍼진다. 방언은 역사 방향에 있어서 극적인 전환점을 나타내는 징조였다. 기독교는 분명 유대교에서 유래 했지만, 그럼에도 '유대인'만의 배타적인 종교가 아니다.
이제 기독교가 지닌 보편적인 특성을 나타내는 데 징조가 한 번쯤은 필요했다는 사실은 분명해졌다. 오늘날 누가 기독교는 '유대인'의 종교라고 하는 위험한 발상을 하겠는가? 과도기를 표시하는 데 필요했던 징조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방언의 은사를 통해 한 언어로 세상에 말씀하셨던 것에서 이제 모든 언어로 만국 백성에게 말하심을 분명하게 나타내셨다.
방언은 징조지만 이제 필요 없다. 사실상 방언이 존재했던 시기에도 방언은 계시의 한 양식으로 역할을 했다. 이는 통역된 방언이 예언과 똑같기 때문이다. 방언은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사람이 바르게 이해하면 하나님의 교회가 덕 가운데 세워질 수 있다. 다만 이제 교회는 교회의 보편적인 특징을 확립하는데 더 이상 표적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방언을 통해 공급될지 모르는 새로운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계시 역시 필요로 하지 않는다. 성경은 예언된 말씀의 완전한 성취를 보존하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예언적 메시지는 불필요하다.
교회는 의사 예언주의(pseudo-prophetism)나 의사방언(pseudo-tongues)이 필요 없다. 교회는 하나님이 그분의 비밀을 충만함 가운데 계시하셨고 분명하게 선포한 사실에서 벗어날 필요가 없다. 오늘날 교회와 세상에게 필요한 하나는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이 충실하게 선포되는 것이다. 이보다 더 필요한 것은 없다.
바울은 구약에서 예언된 방언 현상을 계속 설명하면서 지금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는 예언적 메시지를 분명하게 선포하는 것이 왜 계속해서 필요한지 말한다.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고전14:22). 장언은 불신앙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분명하게 나타낸다. 만일 하나님이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침략한 것과 같은 철저한 심판을 옛 언약에 속한 백성에게 내리셨다면, 그분은 새 언약의 은혜로운 메시지를 듣고 배척한 모든 사람들에게 훨씬 중대하고 최종적인 심판을 내리실 것이 분명하다. 한 언어로 하나의 민족에게 말하셨던 하나님이 방언을 통해 극적으로 모든 민족에게 다양한 언어로 자신의 뜻을 드러내셨을 때, 그와 같은 새 언약의 심판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셨다.
새 언약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은 하나님의 의의 심판을 상징적으로 전하는 것으로 할 수 없다. 복음은 사람을 회개로 인도하기 위해 의도된 말씀 안에서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것으로 이뤄져야 한다. 바울은 계속 말한다. 기독교 공동체는 하나님이 불신자에게 심판의 징조로 주신 방언 현상에 안주하여 만족하지 말아야 한다. 불신자가 자신이 죄인이라고 확신해야 한다면, 공동체의 대표자는 반드시 방언이 아닌 예언으로 말해야 한다(고전14:24). 그러면 불신자의 마음에 있던 은밀한 것들이 드러나게 되고 엎드려 하나님을 경배하여 공동체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인정하게 된다(고전14:25). 궁극적으로 불신에서 믿음으로 인도하는 것은 방언이 아니라 예언이다(고전14:22하).
이런 이유로 최종적이고 정경에 기록된 예언은 오늘 날에도 교회의 생명을 유지하는 실제적인 역학을 수행한다. 그리스도께서 영광으로 재림하기 전까지 성경에 기록된 "더 확실한 예언"은 죄인을 정죄하고 회심하게 하는 하나님의 도구로서 교회를 섬긴다(벧후1:19). 예언은 살아 있고 강력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혼과 영을 찔러 쪼개는 좌우에 날선 검이며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한다(히4:12).
결 론
하나님이 세상에서 행한 다른 일들처럼, 방언은 구속사에서 올바른 위치에 있을 때 그것이 의미를 명확히 드러낸다. 오순절 사도들의 교회에 일어난, 장벽이 무너진 체험은 모든 언어로 복음을 선포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독특한 역사적 상황에서 방언이 전 세계에 복음이 퍼지는 과도기를 나타내는 징조로 나타날 때, 방언은 모든 사람을 위한 복음에 가장 위대한 영광을 돌린다. 방언이 징조로서 역할을 했던 반면, 정경의 예언은 그보다 완벽한 역할을 수행한다. 따라서 교회가 시대마다 예언적 성경의 메시지를 세상 모든 사람에게 성령의 능력으로 선포할 때, 정경의 예언이 변함없는 우선순위를 차지해야 한다.
저자:O. Palmer Robertson
벨하벤 대학과 웨스트민스터 신학교(B.D.)를 졸업했으며, 버지니아 유니언 신학교에서 신학석사(Th.M)와 신학박사(Th.D.) 학위를 취득했다. 로버트슨은 20년 동안 개혁 신학교에서 성경 신학 교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구약 신학 교수, 커버넌트 신학교에서 교수로 봉직했으며, 메릴랜드 주 하야트빌에 있는 월리스 기념 장로교회의 목사로 섬겼다. 현재는 우간다 말라위에 위치한 아프리카 성경 대학의 총장이다. 저서로는 '계약 신학과 그리스도'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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