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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스위스 신앙고백서 간략 소개

Sola. 2023. 12. 6. 06:00

제 2 스위스 신앙고백 (1566년 - Second Helvetic Confession)

 

칼빈아카데미

 

 

종교 개혁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당시 스위스의 경우, 각 도시들은 쯔빙글리가 루터보다 1년 앞선 1516년도부터 선포하기 시작한 개혁적 메시지에 따라 1529년 초부터는 본격적인 개혁을 시도하고 있었습니다. 프로테스탄트들은 미사와 의식과 수녀원 제도들을 폐지하고, 각종 성상들을 깨트려버렸으며, 온갖 그림으로 치장되어져 있는 성당 벽들을 하얀 색으로 칠해버렸습니다. 당시 쯔빙글리는 몇 가지 악기를 손수 연주할 수 있을 정도로 음악을 좋아했지만, 성당의 오르간들도 치워버리면서, 예배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쯔빙글리는 교회 생활 전반에 걸쳐 성경으로써 검토하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오르간, 성상, 그림, 축제, 성자의 날, 가두 행렬 등등의 중세의 행습들을 폐지시켜 나갔습니다. 또한 쯔빙글리와 개혁자들은 1524년에 신약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보급하였고, 1526년에도 이르러서는 루터의 독일어 번역본이 보급되기 시작하였으며, 1530년에는 쯔빙글리의 팀에서 성경 전체를 일반인의 언어로 번역 출판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까닭에 이제 일반 군중들도 쉽게 성경을 소유하고 읽을 수 있었고, 쮸리휘 곳곳에는 주말 성경공부 단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로마 교회가 그 동안 얼마나 잘못된 것들을 가르쳤던가가 여실히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따라서 교회 개혁 운동은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부작용도 일어났으니, 저마다 깨달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일어나 천 가지 만 가지의 신앙들을 주장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즉 쯔빙글리의 개혁이 미흡하다고 보면서 좀더 진보적인 개혁을 주장하는 재세례파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급기야 1534년에는 오늘날 '뮌스터 시의 재난'으로 알려진 비극적인 사건까지 발생하게 됩니다. (이는 신앙고백에 근거하지 아니한 신앙의 자유가 초래한 비극으로서 오늘날 한국적인 상황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습니다.)

 

이런 까닭에 개혁 교회는 믿는 바의 도리를 확정하고 통일해야 할 필요성을 더더욱 느끼게 됩니다. 이러한 때에 슬프게도 쯔빙글리가 개혁교 쮸리히와 카톨릭 자치 주 카펠(Kappel)의 전투시 종군 목사로 참여했다가 아들과 함께 전사하게 됩니다. 따라서 같은 해인 1531년 12월 9일에는 하인리히 불링거(Hienrich Bullinger)가 그의 뒤를 이어 쮸리히의 수석 목사가 됩니다. 그는 이때부터 쯔빙글리의 뒤를 이어 본격적으로 44년 동안 이곳을 무대로 개혁 운동을 이끌게 되었습니다. 때마침 로마 교황 바오로 3세가 1537년에 교회 공의회를 소집할 계획이라는 소식을 듣게 되는데, 이에 따라 그에 대항하여 스위스 각 도시 시장들의 추천을 받은 신학자들이 1536년 1월 30일 모임을 갖고, 28개 장으로 구성된 스위스 교회들 전체가 사용할 신앙고백을 작성하게 됩니다. 이것을 훗날 30년 후에 작성되는 제 2 헬베틱 신앙고백과 구별하기 위하여, 헬베틱은 라틴어로 스위스라는 뜻인데, 제 1 헬베틱 신앙고백이라고 합니다.

 

불링거는 초기에 루터의 저서, 멜랑히톤의 '신학요의'등을 읽으면서 개신교 사상을 접했습니다. 1549년에는 칼빈과 함께 '취리히 일치 신조'라는 것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로서 쯔빙글리 파와 칼빈파가 연합하게 되었습니다. 불링거는 교회론에 관한 작품을 많이 저술하였습니다. 교회의 외적 표시는 말씀과 성례라고 하였으며, 그러면서 재세례는 부정하였고, 인효론을 부정하였습니다. 교회의 '내적 표지'는 성령의 교제, 신실한 신앙, 그리스도의 자선이라고 하였습니다. 교회의 권위는 말씀의 권위이며 사도적 계승은 서품에 의해서 계승되는 것이 아니라 사도들의 가르침과 삶을 계승함으로 해서 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교회의 무기는 칼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점에서 카톨릭 교회의 교권과 속권의 일치를 비판하였습니다.

 

제 1 스위스 신앙고백 작업에서 막중한 역할을 한 불링거는 좀더 나은 신앙고백의 필요성을 느낀 나머지 무려 3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칼빈과의 협력 속에서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게 됩니다. 이 작업이 한창 진행되던 중인 1564년에 쮸리히 전역에 흑사병이 돌아 아내와 세 자녀가 죽고 불링거 역시 병에 걸려 드러눕게 되었습니다. 불링거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면서 연구에 박차를 가한 후, 자신이 죽으면 쮸리히 시장에게 보내달라는 유언장과 함께 라틴어로 작성한 신앙고백서를 남겨두었습니다. 그러던 중 불링거가 잠시 건강을 회복하게 되었는데 1566년 5월 그는 급박한 도움을 요청하는 프레데릭의 편지를 받게 됩니다. 프레데릭은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작성하여 보급시킨 데 대한 모함을 받아 황제로부터 출두 명령을 받게 되자, 자신이 어떤 식으로 신앙을 진술하면 좋을 것인가에 대한 자문을 받기 위하여 불링거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것입니다. 이에 따라 불링거는 때마침 작성해 두었던 문서를 보내주게 됩니다. 이것을 받아 본 프레데릭은 대단히 만족해 하면서, 독일어와 라틴어로 출판하였고, 따라서 불링거의 문서는 공식적으로 교회 앞에 공개되게 되었습니다.

 

이후 좀더 나은 신앙고백의 필요성에 직면한 스위스 교회는 각 지역 대표들이 참석한 교회 회의를 개최하게 되었는데, 이때 불링거가 작성한 신앙고백에다 약간의 손질을 한 후, 1566년 3월 12일 공식적인 제 2 스위스 신앙고백으로 공표하게 됩니다. 이 제 2 스위스 신앙고백은 20,000 단어 30개 장으로 구성된 문서로서 개혁파 신앙의 핵심을 명쾌하게 드러내줍니다. 1-16장으로 구성된 첫번째 부분에서는 교리적인 문제를 취급하고, 둘째 부분인 17-30장에서는 실제적인 적용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불링거는 당시 개혁 교회권에서 대단히 뛰어난 신학자였습니다. 그는 요한계시록을 제외한 전체 성경에 대한 주석을 1532-1546년 사이에 집핍하였으며, 또한 데카데스(Decades)라는 50개의 교리 설교를 묶은 그의 설교집은 한때 영국 개혁교회 목사들의 필독서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불링거가 작성한 이 두 번째 스위스 신앙고백은 16세기 중반기 중 수립된 개혁신학의 본질적인 진술을 대표하는 문서로서 국제적으로 널리 보급되기 시작하여 네덜란드어, 영어, 폴란드어, 이탈리아어, 헝가리어, 터키어, 그리고 아랍어 등등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제 2 스위스 신앙고백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