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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유럽, 종교개혁 전야에 살았던 유아 및 어린이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Sola. 2024. 1. 31. 06:00

 

중세 유럽, 종교개혁 전야에 살았던 유아 및 어린이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강윤석 강도사

 

 

(생략) 어린이의 중요성, 어린이가 얼마나 고귀한 가치를 지닌 존재인지 하나님의 말씀을 준비하면서 느낀 점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중세 유럽은 로마 천주교회가 지배하던 시대였다. 모든 정치와 문화나 예술은 모두 로마 천주교회의 지배하에 있었고, 그 어떤 것도 천주교회의 영향 밖에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당시로서는 로마 천주교회의 지배를 거부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런 시대적인 상황은 당연히 로마 천주교회의 수장인 교황과 그 밑의 사제들의 권위를 매우 막강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철저한 계급 사회였던 중세 유럽에서 사제는 가장 최상의 계급이었다. 그 어떤 귀족도, 심지어는 일국의 왕이라 할지라도 로마 천주교회를 쉽게 대항하지 못하였다. 그런 배경 하에서 태어나서 자란 중세의 어린아이들이 로마 천주교회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중세 유럽에서 신학과 법학은 최고의 학문이었다. 신학과 법학과 같은 인문학을 제외한 모든 학문은 학문으로서 인정을 받지 못한 시대였다. 이공계? 이공계와 관련된 학문은 18세기 후반, 19세기에나 들어서면서부터 각광을 받게 된다. 이공계에 속한 천문학을 예로 들어본다면 “지구는 네모같이 생겼고, 우주의 중심이 지구이다.”라고 생각했던 그 시기에 천문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곧 로마 천주교회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행위였고, 따라서 그들이 운영하는 종교 재판소에 끌려가 죽임을 당하는 것과 바로 연결되었다. 결국 자녀의 출세길이 보장되는 것은 법관이 되든지 사제가 되든지 거의 둘 중 하나였다. 따라서 당시 어느 정도 가문의 위치가 되는 가정의 부모들은 자신의 자녀들이 사제나 법관이 되길 원하였다. 그래서 그러한 가정의 부모들은 자신의 자녀들을 로마 천주교회가 운영하는 학교에서 교육을 시켰는데 그 교육의 질이나 양이 실로 장난이 아니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러한 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하는 나이가 불과 네 살이나 다섯 살 밖에 안 된 어린 유아들이었다는 것이다.

 

아침부터 밤 9시가 넘는 시간까지 아이들은 공부에 열중해야만 했다. 이들 학교는 라틴어와 주요 고전을 가르쳤는데, 특히 라틴어를 중시여겼다. 당시의 라틴어 학교는 매우 권위적인 엄한 규율, 암기식 학습, 철저한 체벌과 감시 하에 이루어졌다. 이런 딱딱하고 엄격한 분위기를 네 다섯 살 밖에 안된 어린 유아들이 어떻게 견디어 냈을까? 지금의 시대에서 생각해 본다면 전혀 상상이 안 가는 일이다.

 

그럼 주말은 집에서 쉬었느냐? 결코 아니다. 유아들이나 어린이들은 주말에는 천주교회의 성가합창 수업에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주일에는 규칙적으로 교회에서 봉사를 수행하면서 미사라는 우상숭배를 거행하는 사제들의 수족이 되어 일하는 신세가 될 수 밖에 없었다.

 

부모의 사랑을 받고 한참 뛰놀고 또 뛰놀아도 부족할 시기에 이 세상에 태어난지 불과 5년도 채 안 된 수많은 유럽의 유아 및 어린이들은 로마 천주교회를 지탱하는 희생물이 되기 위해 원하든 원치않든지 간에 그런 피나는 공부와 수행을 해 나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스위스의 위대한 종교개혁자인 하인리히 불링거(1504-1575)도 역시 5살이 채 되기도 전에 초등 라틴어 학교에 입학하였다. 이 곳에서 불링거는 라틴어로 읽고, 쓰며, 말하는 것을 배웠다. 그 당시 어린 불링거의 목표는 단 하나, 바로 천주교회의 사제가 되는 것이었다.

 

불링거 뿐만 아니라 종교개혁의 위대한 불을 지핀 독일의 유명한 마르틴 루터(1483-1546)나 영국 종교개혁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토마스 빌리(1495-1531), 근대 유럽 천문학의 빛을 비추었던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 영국 문학의 아버지 윌리엄 셰익스피어(1564-1619), 근대 과학의 불을 지핀 영국의 위대한 과학자 아이작 뉴턴(1642-1727) 모두 다섯 살이 채 되기도 전부터 라틴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성경을 너무나 사랑하여 성경을 번역했다는 죄목으로 로마 천주교회에 의해 화형을 당해 순교한 위대한 종교개혁자 윌리엄 틴데일은 자신의 유년 시절을 회고하며 아래와 같은 말을 남겼다.

“나의 유아 및 유년 시절은 라틴어로 시작하여 라틴어로 끝났다.”

 

라틴어가 어떤 언어인가? 한국에 있는 대부분의 신학대학원에서는 라틴어를 과목으로 개설하고 학생들은 수업을 듣게 되는데, 신대원에서 배우는 라틴어는 고작 개요 정도 밖에 안되는 수준이다. 그런데, 그 정도의 라틴어 수업도 너무 어렵고 딱딱하여 따라가는 것이 너무나 힘들고 결코 만만치 않다. 그런데 고작 네다섯 살, 여섯 살 밖에 안 된 유아들이 말도 제대로 못하는데 엄격한 환경 속에서 이런 라틴어를 배워 나가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더군다나 그 당시는 지금처럼 인쇄술이 발달한 것도 아니어서 그저 가르치는 교사의 말을 받아 적으면서 공부를 했어야 하는데 그 어려움은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극심했을 것이다.

 

그냥 공부만 하고 시간이 지나가면 그나마 다행이다. 라틴어든지 헬라어, 그리스어와 같은 고전어를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면 교사들은 어린 유아들을 체벌하고 밤늦은 시간까지 학교에 남게 해서 철저히 교육을 시켰다.

 

본인은 중학교 1학년 때의 그 무시무시했던 영어 선생님과 수업을 잊지 못한다. 매주 영어 수업이 있을 때마다 쪽지 시험을 보는데 틀리는 개수대로 밥주걱으로 목을 맞게 되는데 그 아픔이 얼마나 극심하고 소름끼치는지 밥주걱으로 목을 맞아 보지 않은 사람은 그 아픔을 도무지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중학생도 이러는 하물며 아직 아기와 같은 그런 유아들은 그 혹독한 상황을 어떻게 견뎌 내었는지 지금도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신분이 낮은 평민의 가정에서 태어난 유아나 우리 나라 조선 시대 때 가장 최하위의 계급이라고 할 수 있는 천민에 해당되는 농노의 자녀로 태어난 유아들의 형편은 과연 어떠했을까? 그런 지위에 있던 가정의 아이들은 배움의 기회가 턱없이 부족했고, 대체적으로 집안도 가난하였다. 그러면 그 아이들은 학교를 안 가기 때문에 자유로운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을까? 결코 아니다. 그런 가정에서 태어난 유아들은 다섯 살 때부터 봉건제도를 유지했던 영주의 종으로 하루 종일 일하고 주말에는 성당에 가서 사제들이 먹다 남은 포도주와 빵을 담은 그릇을 닦고 성당을 청소하는 데 온종일을 힘겹게 보내었던 것이다. 즉, 높은 가문에서 태어난 아이들이나 낮은 가문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모두 쉴 수 없이 그 어리고 어린 유아의 시절 및 유년의 시절을 보낸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 중세 유럽의 어린이들은 어린이로서의 대접을 거의 받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다. 정말 어른처럼 대우받고 거의 어린 아이 때만이 가질 수 있는 꿈많고 순수하고 뛰놀고 장난치는 그러한 모습은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어린이를 향한 존중감과 사랑은 그야말로 암흑과 같은 시대였다. 그만큼 로마 천주교회의 힘은 강력했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그런데, 드디어 그 어둡고 무거웠던 중세의 암흑기에 서광과 같은 빛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하니 그 빛은 다름 아닌 종교개혁!!!!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부터 유럽 전역의 분위기는 반전이 된다.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고 지나가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종교개혁의 가장 큰 공헌 중의 하나가 바로 유아 및 어린이들의 권익을 회복하고 신장시켜 주었다는 점이다. 종교개혁은 아무리 갓 태어난 아기라 할지라도 모두가 동등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고귀한 가치를 지닌 존재이며 인간으로서의 참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성경적 가치관을 회복시켰다.

 

종교개혁자들은 그 첫 번째 단계로 아이들이 알아듣지도 못하는 그 어려운 라틴어를 외우면서 우상 앞에 나가 미사를 드리게 하는 로마교회의 악습이 전혀 성경적이지 못한 것임을 선언한 후, 어린이뿐만 아니라 신분이 낮은 계층의 사람들도 누구나 자기 나라의 말로 하나님께 예배다운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 위해 성경을 각 나라의 말로 번역하게 된다. 불링거나 토마스 빌리, 윌리엄 틴데일, 루터와 같은 인물이 이런 귀한 사명을 위해 헌신했던 인물들이다. 불링거는 성경을 스위스어로, 토마스 빌리와 윌리엄 틴데일은 성경을 영어로, 루터는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면서 그렇게 번역되어진 성경은 전 유럽으로 확산되어 보급되었다.

 

다음으로 종교개혁자들의 큰 공헌은 유아들도 어릴 때부터 부모의 사랑을 받고 부모의 품에서 함께 예배를 드리게 만든 것이다. 즉, 가정예배가 시작된 것이다. 로마 천주교회는 부모로부터 아이들이 받아야 될 사랑을 받지 못하게 만들고, 결국은 정서적으로도 인격적으로도 매우 부족한 사람들로 성장하게 만드는 치명적 실수를 범했다. 그러한 잘못된 악습을 깨기 위해 종교개혁자들은 어린 유아들부터 인성교육을 제대로 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람의 본의를 훼손시키지 않는 것임을 인식하고 가정에서부터 하나님을 아는 바른 지식을 함양하게 하였던 것이다. 가정 예배를 통하여 어린이는 성경말씀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갖게 되고 동시에 자기들을 낳아주시고 길러주시는 부모의 은혜를 깨닫게 되고,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는 법을 배우며, 더 나아가 가족의 중요성을 깨우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길렀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종교개혁자들은 교육이라는 것이 가정에서만 머무는 것으로 한정시키지 않았다. 루터와 같은 인물은 김나지움(Gymnasium- 독일에 있는 고등교육기관)이 모든 이들, 즉 신분에 관계없이 모두가 성경을 연구하고 배울 수 있는 학습의 장으로 회복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어디 신학뿐만이 아니라 자라나는 아이들이 자신의 소질에 맞게 교육을 받게 하고, 역사, 정치, 인문학, 예술과 같은 모든 학문을 배울 수 있도록 장을 연 것이다. 이런 김나지움과 같은 교육기관들이 전유럽으로 확산되어서 모든 어린이들은 평등하게 교육을 제공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종교개혁자들은 이런 교육기관에서 모두가 일방적인 체제로서의 교육을 실시한 것이 아니라 연령별로 체계적인 교육을 할 수 있도록 교육 시스템을 구상하기 시작하였다. 이역시 종교개혁이 아니었다면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오늘날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와 같은 교육 기관이 생겨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종교개혁의 역사가 아니었다면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종교개혁자들은 일반은총 가운데 역사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인정하였다. 그래서, 어린이나 유아들로 하여금 자연과 사회 속에서 자유롭게 행복한 삶을 영위하고 즐거워할 수 있도록 그 지경을 넓혀 갔다. 즉, 모든 세상의 자연이 학습의 장이 되었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무궁무진한 영광과 은혜를 발견할 수 있도록 하였다. 아이들은 이제 단순히 수도원이나 학교에만 틀어 박혀 공부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유롭게 부모의 손을 잡고 산으로 들로 강으로 나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훗날 종교개혁자들의 후신이라 할 수 있는 청교도들은 이러한 일반은총의 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건전한 운동을 장려하기 시작했는데 오늘날 우리 주변에 널리 알려지고 행해지는 모든 운동들은 이런 신앙의 선배들에 의해 시작된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의 공헌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제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말하고 이 두서없는 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종교개혁자들에게 있어서 신앙교육은 마치 생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종교개혁자들에게 있어서 이 생명과 같은 신앙교육을 한다는 것은 정말 사명 중 최대의 사명이었다. 결국 그들은 그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몇 백년에 걸친 놀라운 성과를 이루게 된다. 실로 삼위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을 주님의 도우심으로 완수해 나가기 시작한다.

 

위대한 종교개혁자 존 칼빈(1509-1564)은 1541년, 스트라스부르그에서 제네바로 돌아와 어린 아이들이 성경의 전체 핵심을 제대로 배우기 위해 교회교육을 위한 문답식의 교재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저 유명한 제네바 요리문답(Geneva Catechism)이다. 이 제네바 요리문답은 집에서도 부모가 유아들에게 성경의 핵심교리를 쉽고 재밌게 가르칠 수 있도록 그 짜임새가 아주 체계적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 매우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알아듣지도 못하는 라틴어로만 교육을 했다가 이제는 자신들의 나라의 말로 그것도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추어서 교육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이었는지.... 오늘날은 그러한 신앙고백서가 너무 흔해서 신앙고백서의 진정성이라든지 가치가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알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당시 중세 유럽에서는 이러한 신앙고백서가 등장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천지를 울리는 개벽과 같은 역사였다.

 

이러한 신앙고백서의 등장은 이후 종교개혁기에 찬란하게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어디 제네바 요리문답뿐이던가?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서, 제 1 스위스 신앙고백서, 프랑스 신앙고백서, 루터파 일치신조,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 벨직 신앙고백서, 제 1 헬베틱 신앙고백서,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등등.... 더 이상 진술하려고 하면 손가락이 아파서 여기서 생략한다.

 

이러한 신앙고백서는 모두 성경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신앙 생활을 했던 당시 유럽의 많은 개신교 신자들에게 핵사이다와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 더군다나 위에 언급했던 제네바 요리문답의 등장은 자신의 사랑스러운 자녀들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을 쉽고 체계적으로 가르칠 수 잇는 방향성을 제시해 주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아이들을 최고의 신앙고백서를 이 땅 가운데 탄생하게 하신 것이다. 그것은 바로 바로 바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1643-1648)!!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은 유아와 어린이의 신앙고백을 위해 작성된 것이다. 부모가 하나님에 대해 자녀들에게 소개하고 자녀는 그 말을 잘 귀담아 들을 수 있는 형식의 내용으로 짜임새있게 구성되어 있다.

집에서는 부모와 자녀가, 학교에서는 선생님과 제자들이 기쁨과 은혜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배우는 그 모습을 생각해 보라. 중세 천주교회의 무시무시한 암흑과 같은 고통 속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던 일들이다. 어른 뿐만 아니라 어린이들도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게 되었고, 진정한 자유의 기쁨을 체험하게 된 것이다.

 

“나리 나리 개나리 입에 따서 물고요. 병아리떼 뿅뿅뿅 봄나들이 갑니다.”

요즘 길을 가다 보니 이런 애틋한 동요를 부르며 친구들과 손을 잡고 선생님의 뒷꽁무니를 졸졸 좇아 오는 유치원 아가들의 모습을 보며 너무나 귀엽다는 생각이 든다. 너무나 오랜만에 듣는 정다운 동요이다. 아이를 위해서 헌신하고 계시는 유치원, 어린이집 선생님들이 참으로 존경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단지 어린이날이 되고 어린이 주일이 되기 때문에 자기의 자녀들만 소중히 여길 것이 아니라 우리 학부모들도 자신의 사랑스런 천사와 같은 유아를 위해 헌신하고 계시는 어린이집, 유치원 선생님들께 감사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시길 간절히 소망한다.

 

 

출처: 강윤석 강도사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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