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룡과 3·1 만세운동
정성구 명예교수 2018 (전 총신대·대신대 총장)
한국칼빈주의 연구원 C-STORY 자료
기미년(1919) 3월 1일에 시작된 만세운동은 일본의 철권통치에 저항한 민족자존을 세계만방에 선포한 거사였다. 이는 그냥 삼일운동이 아니라 일제에 저항한 한민족의 독립운동이었다. 3월 1일부터 두 달간의 전국적인 만세운동 즉, 일제에 대한 항쟁은 무려 1500회에 이르렀고 참가인원은 200만명이나 되었다. 삼일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일본의 무자비한 총칼에 맞서다가 7500여명이 사망했고, 부상자도 16,000명, 체포된 사람도 46,000이었다고 한다.
이 사건은 아직도 한민족이 죽지 않고 살아 있음을 만천하에 공포한 것이 된다. 내년이면 3·1만세운동 100주년이 되고, 금년은 박형룡 박사 서거 40주년이 된다. 이런 의미 있는 해에 박형룡이 3·1운동 전후한 그의 활동을 살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본다.
일반적으로 박형룡 하면 생각나는 것은 정통신학자, 보수주의자로서 정치 참여나 국가의 문제에 대해서 무심한 분으로 알려져 있다. 더구나 박형룡의 청년시절 특히 기미년 전후한 그의 활동은 별로 알려진바 없다. 그러나 8년 전에 필자는 「朴亨竜 博⼠ 回顧錄」을 편집하면서 그의 육필 회고록을 접한바 있다. 그 내용 중에서 3·1운동 전후한 그의 활약상을 요약하고 정리했다.(정성구 편, 박형룡 박사 회고록: 총신대 출판부, 2011)
⓵ 박형룡, 3·1 만세운동에 참가하다.
1919년 3월 1일 서울과 평양을 중심으로 전국각지에서 봉기된 독립만세운동이 있었다. 이에 놀란 일본군대와 경찰은 시위대원을 무차별 학살했고 체포하였다. 평양에서도 3월 1일에 대한독립선언식과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그런데 평양에서는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되었고, 장로교측은 장대현 숭덕학교 교정에서 일어났으며, 감리교측은 남산현 교회당에서 거행되었다. 당시 장로교 측의 지도인물은 서문밖교회 김선두 목사가 주동이 되었고, 산정현교회는 강규찬 목사가 이끌었다. 그때 박형룡 청년의 나이는 22세였다. 그때 박형룡은 숭실전문학교 학생으로 3·1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여 대한독립만세를 불렀으나 지도적 역할은 못했다고 한다.
그것은 당시 박형룡 청년의 소극적인 성격도 있었지만 당대의 기독교계의 지도자는 김선두 목사와 강규찬 목사였기 때문이다. 두 분은 3·1만세운동의 쌍끌이로서 기독교인뿐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존경과 신임을 받는 분들이었으므로 3·1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했다.
김선두 목사는 숭실중학, 숭실전문학교와 평양신학교를 1913년에 졸업하고, 1918년에 조선예수교 장로회 제7회 총회장이 되었다. 그는 숭실중학교, 숭실대학교, 평양신학교에 성경 강사이기도 했다. 그는 3·1운동이 일어나자 앞장서서 민중을 규합하고 일제 항거에 맞섰다. 그 후 1938년 일본경찰이 신사참배 강요로 교회를 압박해 오자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당시 일본의 와사다대학 법대생인 김두영을 통역자로 앞세워 일본 궁내부대신, 일본육군대장, 국회의원 등을 만나서 신사참배의 부당성을 알리고, 신사참배 강요 중단을 일본 요로에 호소했으나, 평양으로 돌아오는 중에 열차에서 체포되었다. 그 후 석방되어 만주로 망명해서 만주봉천신학원에서 박형룡, 박윤선을 도와 신학 교육에 전념했다.
당시 또 다른 민족지도자 강규찬 목사는 본래는 한학자로서 한시 전문가인데 1908년에 신성중학교에서 백락준과 박형룡을 가르치기도 했다. 1918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산정현교회 목사로서 3·1운동에 앞장서서 일하다가 옥고를 치룬다. 당시 김선두 목사와 강규찬 목사가 지도하는 3·1운동 대열에 박형룡 청년은 당시로는 단순 가담자로 만세를 불렀다. 그러나 일제는 박형룡을 여러 번 체포하여 경찰서에 유치시켰고, 한번은 평양감옥에서 1주간 구류되었다가 나왔다. 그 때 상황을 살펴보면 숭실대학의 모우리 선교사(E. M. Mowry)는 일본경찰이 체포하려는 숭실대 학생 몇 사람을 자기 집에 숨겨준 협의로 재판을 받아 징역 6개월에 처했으나 집행유예로 복역은 면했다. 당시 모우리 교수는 숭실대 음악 교수로서 장대현교회 찬양대를 최초로 만든 분이었다.
⓶ 박형룡이 숭실대 순회 전도대에 앞장서 일제에 항거하다.
3·1만세운동은 두 달 동안 거대한 쓰나미처럼 전국을 휩쓸었고, 이에 일제는 군인과 경찰을 풀어 무자비하게 애국자들을 살해하고 체포했다. 4월말이 되자 3·1운동은 수면 아래로 내려가고 표면적으로는 평온을 찾았다. 일제는 총칼로는 한민족을 억압하는 것이 힘든 줄 알고 정책을 바꾸어, 이른바 문화를 통한 내선 일체를 꾀하게 되었다.
바로 그즈음 숭실전문학교 학생들은 묘한 대안을 내었다. 즉, 그것은 지방순회전도단을 만들어 전국을 돌면서 복음을 전하고 민족 의식을 깨우자는 운동이 서서이 일기 시작했다. 여기에 박형룡이 앞장서고 아이디어맨이 되었다. 그래서 전도단은 박형룡을 설교자로 세웠다. 3·1운동을 통해 2만명의 애국동포와 다수의 목사, 장로, 성도들이 옥중에서 고난당하고 있는 이때야 말로 회개와 신앙의 복음을 큰 소리로 외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당시 숭실전문학교 전도회 연합회 주동으로 부흥전도대가 조직되었는데, 그 조직을 보면 다음과 갚다.전도대상: 김형재 장로(숭중 선생) 모사: 박형룡, 우호익, 송근수(숭대생), 음대생 2인
(숭중 김인걸 지휘자, 여대생 수인 포함) 등 대강 10여명이 되었다. 전도단은 학기 중에 평양시내와 평양근방의 교회들에게 수시로 전도 집회를 인도하고, 민족의 수난과 처참한 상황 중에도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올 것을 눈물로 호소했다. 한편 멀리 있는 지방 교회는 겨울방학을 이용해서 순회 집회를 한곳은 평남의 진남포, 당천, 군삼우리, 선천 등지, 평북의 의주군 비현, 신의주 산정 유초등지의 교회였다. 부흥전도단이 가는 곳곳마다 대성황이었고 은혜가 넘쳤다고 한다.
당시 부흥전도단의 수석강사는 박형룡이었고, 대원들이 출동하기 전에 철저히 회개와 기도가 있었다. 그리고 성령의 능력을 받아 담대히 복음을 증거하고 잠자는 민중을 깨우는 일을 했다. 1920년 당시는 목회자도 많지 못하던 시절 당대의 숭실대학생들은 모든 사람이 우러러 보던 때인지라, 숭실전도부흥단의 활동과 박형룡의 외침은 신·불신간에 감동 그 자체였다. 부흥전도집회 중에 박형룡이 주로 설교자로 나섰다. 당시 설교의 중요 제목은 「하나님의 칼(겔 33:1-9)」, 「진보하자(빌 3:13-14 )」, 「스데반의 죽음(행7:54-8:2)」 등이었다.
그 설교를 하면서 박형룡은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였고, 그것은 우리가 일제에서 고난당하는 것은 죄에 대한 징계이므로 모두들 즉각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가자는 요지로 설교하자 청중들은 함께 오열하며 울었다고 한다. 박형룡이 이끄는 숭실전도 부흥단은 가는 곳곳마다 결신자들이 많았고, 성도들은 후한 헌금을 드려 전도대원들을 격려 고무했었다.
3·1운동이후에 민심이 깨어나고 민족의식 고취되어 자유와 해방 진보의 소망으로 불 붙었고, 3·1운동으로 투옥되거나 망명하여 가족과 함께 고난당하는 자들이 전국에 수없이 많았기에 공중집회에 동원이 많았고 영적 공감대가 쉬웠다고 한다. 당시 어떤 선교사의 말처럼 조선인의 3·1운동 1년간의 사상적 진보는 당시 50년의 진보와 같다는 말을 할 정도였다. 숭실대 부흥전도단은 영남과 호남 순회 집회도 준비하고 있었다. 평양 장대현교회에서는 전도단을 위한 여행비를 헌금했다. 부흥전도단은 대구 신정교회에서 이틀간 집회를 했고 안강과 포항에서도 강연회를 했으며 부산 영주교회에서 박형룡의 설교는 놀라운 반응이 있었다. 그 설교를 들은 일본 형사는 박형룡의 설교가 민족정신을 고취하여 보안법에 위반되지만, 타지역에서 온 손님이므로 묵과 할테니 앞으로 조심하라는 경고를 주었다. 그 후 마산 문창교회 집회 중에는 전도대 후원금으로 여기저기서 금 은 패물과 시계를 헌금하는 이들이 많았다.
특히 진주교회에서 17세 소년 계정식의 독창이 많은 청중들에게 눈물을 흘리게 했다고 한다. 그 후 전도대는 삼천포를 거쳐 순천으로 가서 목포 양동교회에서 집회를 했는데 거기서 박형룡의 설교 「하나님의 칼」 이 보안법에 걸렸다. 박형룡의 설교가 민중을 깨우는 애국강연으로 이해한 목포경찰서는 그를 목포 감옥으로 끌고갔다.
⓷ 박형룡의 목포감옥 10개월
박형룡의 목포 양동교회 설교가 일본경찰의 비위를 건드려, 그는 광주감옥 목포 분감에 갇혔다. 박형룡은 준비실에서 주의를 받고 모자, 보선, 신발, 소지품을 떼어놓고 옷고름마저 떼어 놓은 후 쇠고랑을 채운 체 독방에 갇힌 신세가 되었다. 그 때 박형룡이 그의 회고록에 쓴 시 한 편이 있는데 그 때의 심정을 잘 말해 주고 있다.
1920년 4월9일
유달산에 해기우러 석양이 된 때목포부 연지동 20번지의 높은 담 철창속에 드러왔고나 성명은 변경하여 하꾸욘쥬고(140호)기호는 낮아져서 오마에르다 간수도 노호령에 떨고 있으니 영오중에 이 신세 가련하고나.
라고 썼다. 박형룡은 감옥에서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고 콩 섞은 밥 한 덩이, 된장 채소국을 먹었다. 그러나 얼마 후 목포교회로부터 사식이 들어와 그나마 건강이 유지되었다. 그러나 박형룡의 감옥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박형룡은 미결수로서 자기의 피소사건을 몰라 깊은 고민에 빠졌다. 간수장이 점호하고 죄인들을 꿇어앉히게 하여 감시 감독했다. 박형룡의 죄명은 보안법 위반자로 명패에 기입하여 감방문에 붙었다. 얼마 후 3·1만세 부른 장년 죄수들과 한 방에서 생활했다.
하루는 간수가 박형룡의 뺨을 때렸다. 박형룡은 미결수로 두 달 동안 감방에서 고통 당하면서 어서 학업을 계속 해서 주님의 증인의 사역을 감당해야 하는데, 허송세월하는 듯해서 답답해 하였다. 6월3일 박형룡은 간수에게 끌려 나가 머리에는 집주저리를 쓰고 손에 수갑을 차고 캄캄한 마차에 올라타고 목포법원(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 가서 재판을 받았다. 일본 검사는 소장에서, 박형룡이 배일사상 고취, 조선독립정신의 선동을 목적한 것이 아니냐고 논고했다. 하지만 박형룡은 아주 온화하게 옛날 이스라엘 선지자가 자기 백성이 당한 참상을 보고 죄를 책망하고 패망을 경고한 정신과 태도를 모방하여 우리 백성에게 반성회개를 촉구한 것이고, 세계 모든 죄인에게 복음을 전하여 구원을 얻게 하는 목적이라고 조용하고 차분히 말했다.
목포교회 성도들이 방청석에 앉아 경청하고 어느 분이 귀뜸 하기를 일본어 성경을 앞에 갖다놓았는데, 성경을 펴들고 장절을 찾아 가면서 변론하라고 했다. 그러나 검사는 박형룡을 고소하면서 배일사상, 독립사상 고취를 여러 곳에 순회 강연하면서 불필요한 사상을 선전하여 부녀자들의 금 은 패물을 기증 받은 것은 비열한 행동이라는 등, 백면서생으로서 과감한 언동을 했다는 등 징역 1년 6개월 구형한다고 했다. 그러나 5일후에 판사는 징역 8개월을 언도했다. 박형룡은 항소를 할 수 있었으나 그리되면 옥고만 연장될 뿐이라는 주위의 말을 듣고 목포감옥의 징역죄수가 되었다. 그러니까 6월11일에서 이듬해(1921년) 2월11일에야 만기 출소할 수 있었다.
박형룡은 하루 세끼 콩밥을 먹고 바나마 모자를 곁는 잡역을 했다. 박형룡은 140호 독방이었는데 중죄수라기 보다는 고등교육을 받은 자이니 잡 죄수와 함께 있으면 사상감화가 큰 우려가 있다 해서 독방에 갇히게 된다. 옥중에서도 박형룡은 「National Reader」 4권, 5권을 영화사전을 보며 자습하고 암송했다. 박형룡의 회고록에 의하면 목포철장 10개월에 학문적으로 얻은 소득은 영어책 세 권을 모두 암송한 것이라 했다. 콩밥생활 8개월에 얼굴은 창백해졌으나 고난 중에 기도로 살아계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었다. 10개월 옥중 생활의 체험 사실과 소감과 소희를 노래로 지었으나 분실됐음이 안타깝다고 했다. 박형룡은 1921년 2월 11일 복역 만기되어 출소했다. 박형룡이 평양역에 도착하자 김현재 장로를 위시하여 숭실대 학우, 교우, 교계 유지들이 나와 환영했다.
박형룡은 3·1운동이후, 신학생도 목사도 아니면서 숭실대학교 학생으로 복음을 통한 회개운동, 일제에 저항하여 나라세우기를 외치다가 10개월의 영오의 생활을 했다. 박형룡 박사 서거 40주년 되는 해에 우리가 알고 있었던 그의 조용한 교의학 강의와는 다르게 민족해방운동의 선두에 섰던 대학생으로서의 박형룡의 모습을 되새겨 보았다. 보수신학 또는 개혁주의 신학은 교회와 세상을 이분법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개혁주의신학은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는 자임을 알아야 한다.
한 가지 첨언하는 것은 1944년 만주신학원 때, 박윤선 교수는 채플시간에 「환난을 당한 자 이리오게」란 찬송을 부를 때에 일본제국의 끄나풀인 일본인 교수 국지는 그를 헌병대에 고발하여 말할 수 없는 심적 고통을 겪었다. 일본 헌병대는 박형룡 박사와 박윤선 박사를 싸잡아 <민족주의자>로 비판했다. 3·1운동 99주년을 맞으면서 박형룡의 애국운동을 다시 생각한다.
http://www.johncalvin.co.kr/boad/bd_news/1/egolist.asp?bd=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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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hisola.tistory.com 기독교 자료 (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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