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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례에 대한 3가지 입장 (정통은 영적임재설을 따르고 있음)

Sola. 2024. 3. 26. 06:00

 

 

성례에 대한 3가지 입장

 

손재호 목사 / 창원한결교회 (2013.8.26)

 

 

소요리문답 91문부터 97문까지는 성례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서론 격으로 성례에 대한 전체 개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성례란 무엇입니까? 성례(聖禮)란 성찬의 “성”자와 세례의 “례”자의 줄임 말이 아닙니다(물론 한자로는 같지만). 성례란 거룩한 규례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정하신 거룩한 규례는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곧 세례와 성찬입니다. 이 성례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습니다.

 

 

우선 로마 가톨릭의 입장부터 살펴봅시다. 로마가톨릭은 은혜의 방도에 대해서 우리와 완전히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은혜의 방도는 바로 교회입니다. 즉 교회에 잘 붙어 있어야만 구원의 은혜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도 교회가 구원의 은혜를 받는 데 있어서 중요한 방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은혜의 방도가 될 수 있는 이유는 가장 중요한 은혜의 방도인 하나님의 말씀을 교회가 담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서 은혜의 주된 방도는 말씀인 것이지, 결코 교회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월한 은혜의 방도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반면에 로마가톨릭은 교회를 가장 주된 은혜의 방도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말씀은 그저 구원의 은혜를 받기 위해 예비적으로 준비하는 보조적인 수단일 뿐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말씀보다도 성례가 교회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은혜의 방도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의 성례에 대한 입장은 다음의 세 가지 점에서 우리와 차이가 납니다.

 

 

 

1) 우선 우리는 성례를 세례와 성찬, 두 가지 밖에 없다고 말하지만, 그들은 여기에 견진성사, 고해성사, 서품성사, 혼례성사, 종부성사 등 5가지를 추가해서 7성례를 주장합니다.

 

 

2) 또한 그들은 성례가, 성례 중에서 특별히 세례가 구원받는 데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즉 회개하고 믿어도 세례를 받지 못하면 구원받지 못한다고 믿기 때문에 누군가가 임종하는 순간에는 긴급 상황을 감안해서 사제가 아니더라도 세례를 베풀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것을 대세(代洗)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볼 때, 참 믿음이 있는 자는 세례를 받지 않더라도 구원 받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 (통상적으로) 절대적으로 필요한 은혜의 방도는 성례가 아니라 말씀입니다.

 

 

3) 그들은 성례를 올바르게 행한다면 반드시 구원의 은혜의 효과를 나타낸다고 주장합니다. 즉 그 성례 의식을 통해서 구원의 은혜가 기계적으로 사람들에게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그들은 성례 의식 또는 요소 자체에 마술적인 능력이 있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세례를 행할 물에 주교가 축성(축복기도)을 하게 되면 그 물은 신자의 죄를 정말로 씻어내는 신비로운 물이 된다고 합니다. 또한 성찬의 떡에 축성하면 그 떡은 정말 예수님의 몸이 되어서, 그것을 먹는 자는 실제로 물리적으로 예수님의 몸을 먹는 것이 되어 구원의 은혜를 얻게 된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을 우리가 화체설(化體說, transubstantiation)이라고 말하는데요, 이러한 관점이 어떻게 성립될 수 있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찬을 제정하실 때 하신 말씀, 떡을 떼시면서 “이것은 내 몸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이 떡이 어떻게 예수님의 몸인가 하는 것을 깊이 있게 생각하지 않고, 그냥 성찬식을 행했습니다. 그러나 점차로 이것이 어떻게 예수님의 몸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 고민하고 논쟁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을 아주 탁월하게 해결한 사람이 13세기의 토마스 아퀴나스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성경적으로 해결한 것은 아니지만, 정말 반론의 여지가 없게끔 깔끔하게 결론지었습니다. 그것이 결국 화체설인데, 토마스 아퀴나스 이후부터는 (종교개혁 전까지) 모든 사람들이 성찬에 대해서 다 이렇게(화체설)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토마스 아퀴나스의 주장이 무엇인지 배워보겠습니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다 틀린 이야기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잘 공부한 사람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수님 전의 사람이죠(BC 4세기). 아리스토텔레스는 성경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철학적으로 깊이 있게 생각을 잘해서 하나님은 한분이고 선한 분이고, 영이시고, 인격적인 분이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 말을 들으면 꼭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말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성경도 모르는 사람이 그렇게 말했다는 것이 굉장히 신기한 일인데, 물론 그가 말한 하나님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같다 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참 놀라운 통찰력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사상을 토마스 아퀴나스가 상당부분 받아들였고 특히 성찬을 설명함에 있어서 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차용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두 가지로 구성요소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하나는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물질적이고 물리적인 것으로서, 그것을 질료(mater)라고 불렀습니다. 예를 들어서 빵을 생각할 때, 그 빵 안에 있는 밀가루 성분, 우유, 계란, 그리고 여러 가지 재료의 분자구조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러한 것들이 다 빵의 질료를 이룹니다. 빵의 질료는 눈으로 보이고, 만져지고, 빵맛이 나게 하는 물리적인 요소를 말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이 빵의 질료만 보고 질료만 생각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거기다가 하나 더 보탭니다. 즉 “그것을 그것 되게 하는 것”, 즉 “빵을 빵 되게 하는 것”이라는 본질(또는 본체, 형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본질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그 사물의 구성요소입니다. 그래서 빵이라고 할 땐, 이 빵에는 질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빵을 빵되게 하는 것이라는 본질도 함께 있는 것입니다. 빵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질료와 본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생각은 사실 매우 혁명적인 이야기입니다. 그의 주장은 그의 스승인 플라톤을 정면으로 반대하는 것이었습니다.

 

 

플라톤은 본질은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다 이데아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다 이데아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것도 모르고 그림자에 불과한 이 세상에 몰두하면서 이 세상에 죽고 못사는 식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물질적인 것에 현혹되지 말고 이데아에 있는 영적인 본질을 깨달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이러한 플라톤의 입장에서 보면 이 빵의 본질은 다 하늘(이데아)에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많은 종류의 빵이 있어도 그것을 빵 되게 함이라고 하는 빵의 본질은 하나뿐인데, 그것이 하늘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을 다 지상으로 끌어내리는 것입니다. 본질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사물 안에, 그 질료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이라는 그림에 보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나오는데, 플라톤은 하늘을 가리키고 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땅을 손가락질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다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입니다.

 

 

누가 맞습니까? 둘 다 틀린 이야기입니다. 그냥 자기들끼리 철학적으로 말장난 하는 것이죠. 어쨌든 중요한 것은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차용해서 성찬의 개념을 설명했다는 것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견해를 들어보십시오. 우리가 성찬식을 행할 때 떡과 포도주는 각각 질료와 본질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찬을 행하기 전에 그 떡을 축성을 하게 되면 그 떡의 본질이 예수님의 살의 본질로 변화되어집니다. 물론 떡의 질료는 떡의 질료 그대로 있기 때문에 모양이나, 촉감이나, 맛은 일반 다른 떡과 다를바 없습니다. 축성했다고 해서 떡이 살맛이 나는 게 아닙니다. 포도주가 피 맛이 나는 게 아닙니다. 일반적인 떡과 포도주와 동일합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그것을 그것 되게 하는 본질이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의 본체가 바뀌었다고 해서 화체설(transubstantiation)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축성한 빵은 더 이상 일발적인 빵이 아니라 예수님의 몸이 됩니다. 축성한 포도주도 일반적인 포도주가 아니라 예수님의 피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합니다.

 

 

1) 만일 성찬을 행하기 위해서 떡을 떼다가 부스러기가 떨어지면, 그리고 그것을 쥐가 와서 먹게 되면, 쥐가 예수님의 몸을 먹게 되는 것입니다. 부스러기가 절대로 떨어지면 안 되는 것이죠. 그래서 로마가톨릭은 부스러기가 없게 하기 위해서 웨이퍼(wafer, 웨하스)라는 밀떡 조각을 만들어서 성찬식을 행합니다. 한 떡에서 떼어야 하는데, 미리 떼어서 나눠주는 것이죠. 오늘날 장로교회가 이것을 많이 따라하는데, 사실 성찬식은 하나의 떡을 갖다 놓고서 그것을 각자가 손으로 떼어서 먹도록 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일 년에 한번만 성찬에 참여하도록 합니다. 자기들끼리 그냥 그렇게 정한 것입니다.

 

 

2) 똑같은 일은 포도주에서도 발생합니다. 예를 들어서 포도주를 따르다가 그것을 땅에다가 흘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니면 그것을 엎지르거나 쏟아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큰일 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손상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포도주는 아예 평신도한테는 안주고, 신부가 대표로 혼자서 다 마십니다. 평신도는 오직 성찬식 때 떡만 먹습니다. 그 떡을 성체라고 말하고, 먹는 것을 영성체(성체를 영접한다는 의미)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성찬식은 영성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떡이 예수님의 실제 몸이기 때문에 그 몸 안에는 예수님의 피가 포함되어 있다는 논리를 펼칩니다. 떡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만의 논리일 뿐 전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3) 뿐만 아니라 떡의 본질이 예수님의 몸이니깐, 그 떡을 받는데, 그냥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무릎을 꿇고 받고, 씹어서는 안 되며 녹여 먹어야 합니다. 성찬하고 남은 것은 주님의 몸이니깐 잘 보관해야 합니다. 성체 보관함에 넣어서 썩지 않도록 잘 보관합니다. 미사 때 사람들이 성당에 들어가기 전에 예수님 십자가 상 앞에서 절하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 그것은 그 동상에다 절하는 것이 아니라, 그 동상 뒤에 있는 성체 보관함에다가 절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성체 보관함에는 예수님의 몸이 들어있기 때문이죠. 그리고 부활절이 되면, 성체 보관함을 열고 그것을 들고 동네 한 바퀴를 돕니다. 종교적인 동네는 그 행사를 성대하게 치룹니다. 그것이 지나갈 때 모든 동네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그 앞에 절합니다. 이것은 성찬의 요소 자체를 숭배하는 우상숭배가 됩니다.

 

 

 

참 문제가 많죠. 그래서 종교개혁 하면서 종교개혁자들이 이것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우리 선배들이 기본적으로 문제제기 했던 것은 이것이 우상숭배라는 것입니다. 질료 안에 본질이 있다는 생각 때문에, 결과적으로 그 떡과 포도주 자체를 숭배하게 된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떡과 포도주 앞에서 무릎 꿇는 것을 없앴습니다. 이참에 아예 예배 가운데서 무릎 꿇는 것을 없앴습니다. 옛날에는 기도할 때마다 무릎을 꿇었는데, 칼빈은 예배 시간에 무릎 꿇는 것을 다 없애고, 대신에 영혼의 무릎을 꿇어야 함을 주장했습니다. 우리가 예배시간에 목사님이 우리의 영혼의 무릎을 꿇어서 예배드린다는 말씀을 하시는데, 바로 여기서 기원하는 것입니다.

 

 

특히 우상숭배와 관련해서 종교개혁자들은 이러한 성찬식뿐만 아니라, 그들의 미사에 대해서도 강력하게 비판했습니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80문은 미사를 ‘가공할만한 우상숭배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최근에 미국의 CRC 교단에서 이 부분을 삭제 했습니다. 천주교와 화해하기 위해서인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 미사가 우상숭배일까요? 미사란 무엇입니까? 미사란 구약의 백성들이 제사의 형식으로 예배를 드렸던 것처럼 동일하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예배 때마다 재현하는 방식으로, 곧 제사의 형식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매 미사 때마다 그리스도께서 속죄의 희생제물이 되시는 것이고, 신부는 제사장이 되며, 단상은 제단이 되고, 이 제물을 드리는 의식이 제사가 되어서, 이 제사를 통해 날마다 새로운 죄의 용서와 새로운 의를 획득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야기시킵니다.

 

 

1)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이 아닌 또 다른 제사장을 말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모독하는 것이 됩니다.

 

 

2) 그리고 미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을 멸시하는 행위가 됩니다.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미사에는 또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수난을 은폐하며 매장하는 힘이 있다고 말했다. 제단을 쌓으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즉시 타도된다는 것은 아주 확실하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영원히 성결하게 하시고 우리를 위해서 희생 제물로 바치셨다면(히 9:12) 이 희생의 힘과 효력이 무한히 계속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율법 하에서 희생 제물이 되는 소나 송아지 이상의 존경을 그리스도에 대해서 느끼지 않을 것이다. 소나 송아지의 희생의 효력과 힘이 약했다는 것은 그것이 자주 반복되었다는 사실이 증명한다.”

 

 

 

그러면서 다음의 구절을 인용하면서 그리스도의 구속의 죽음은 단 한번으로 족하며, 그 효력은 완전하고 영원하다고 말합니다.

 

(12)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히 9:12)

 

(26)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히 9:26)

 

(10)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 10:10)

 

 

 

따라서 매주 미사를 드리는 것이 그리스도의 희생의 죽음을 생생하게 재현하기 때문에 더욱 은혜가 클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상 그들은 그 죽음의 힘과 효력을 무시하고 무력화 하는 것입니다. 미사는 그리스도께서 단 한번 참으로 죽으셨고,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완전하고 충족한 구원을 이룬다는 것을 잊게 만듭니다.

 

 

3) 또한 이 미사를 드리는 가운데서 예수님은 다시 십자가에서 죽으시며 하나님께 바쳐집니다. 그것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로 끌어내리는 예수님을 모독하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4) 그리고 2000년 전의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현재 계속 드려지는 미사라고 하는 제사를 통해서 죄사함을 받는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그분의 죽으심을 기억하고 기념하고 회상해야 할 필요는 있지만, 그분이 다시 죽으시는 제사를 드릴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사는 가공할만한 우상숭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로마가톨릭의 미사에 대해서 자세히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인데, 그때 보다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종교개혁자들은 공통적으로 은혜의 방도에 대한 로마 가톨릭의 입장을 비판했습니다. 교회나 성례가 주된 은혜의 방도가 아니라 말씀이 은혜의 주된 방도라는 것입니다. 즉 성례는 말씀을 떠나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성례는 사실상 가시적인 말씀에 지나지 않는다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성경으로’를 외치며, 말씀 중심의 교회를 회복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이렇게 성례를 숭배하는 것과 교회와 성례가 주된 은혜의 방도라는 것, 그리고 미사가 우상숭배라는 것에 대해서 공통적인 주장을 종교개혁자들은 펼쳤습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일은 성례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점에서는 종교개혁가인 루터와 쯔빙글리와 칼빈 사이에 일치를 보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루터파와 쯔빙글리파가 서로 합치기 위해 모였을 때, 결국 성례론이 달라서 갈라섰습니다. 칼빈은 이 두 파를 중재를 하기 위해 힘썼지만, 별로 효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입장차가 있는 살펴보겠습니다.

 

일단 루터는 기본적으로 화체설을 따르고 있습니다. 로마가톨릭처럼 그것을 숭배하거나 말씀보다 중요하게 생각하지는 않지만, 화체설 자체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는 떡의 본질이 예수님의 몸의 본질로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떡의 본질에 예수님의 몸이라는 본질이 ‘+’된다고 주장합니다. 즉 떡에는 떡의 본질과 예수님의 몸이라고 하는 본질이 함께 공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재설이라고 말합니다. 루터는 예수님께서 물리적으로 그 떡 안에 계신다는 점에서 로마가톨릭과 의견을 같이한 것입니다.

 

 

반면에 쯔빙글리는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 “이것은 나의 몸이다”하는 말을 그저 상징적인 표현(significant)이라고 받아들입니다. “이것은 나의 몸을 의미하고 상징하는 것이다”라는 말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즉 떡은 예수님의 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떡은 단순히 우리를 위해 찢기신 예수님의 몸을 표현하고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찬식은 예수님의 죽음을 상징하고 기념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상징설, 기념설이라고 합니다. 물론 이 이야기가 틀린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러나 성찬식은 단순히 예수님의 죽음을 상징만 하는 것일까요? 오늘날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와 비슷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많이 있어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것은 진짜 예수님의 몸이 아니라 단순히 상징이다, 주님의 살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 부류가 바로 구세군입니다. 구세군 교회는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의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날마다 우리가 주님의 죽으심을 기억하고 그 은혜 안에 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구세군 교회는 아예 세례 성찬식이 없습니다.

 

 

그래도 쯔빙글리는 예수님께서 행해라고 했기 때문에 비록 그것이 의식이고 상징적인 것일 뿐이지만 행하기는 행합니다. 그러나 구세군은 아예 안 행하는 것입니다. 물론 구세군은 말씀을 중시하기 때문에 구원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성례를 통해 은혜 받을 수 있는 기회들을 상실하는 영적인 손실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쯔빙글리는 상징설을 주장했기 때문에, 세례와 성찬식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고, 따라서 성찬식도 일 년에 4번 정도하는 것으로 만족해하였습니다. 물론 성찬의 횟수는 교회가 결정해서 하는 것입니다만, 원칙적으로는 매주 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때에는 모일 때마다 떡을 뗐다고 했습니다. 칼빈도 매주하는 것이 원칙이며, 매주 성찬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반대파에 부딪혀서 결실을 맺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성찬을 매주 행하는 것으로 언젠가는 회복되어야 하지만, 그러나 전제 되어야 할 것은 충분한 교육이 되어야 하고, 교회가 어느 정도 성숙되었을 때에 매주 성찬으로 회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칼빈은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이것이 결국 우리의 입장인데, 칼빈은 예수님께서 비록 떡을 가리켜 “이것이 내 몸이다”라고 말씀하셨더라도, 예수님께서 물리적으로는 우리와 함께 계실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분은 물리적으로는 하늘에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찬식을 행할 때, 영적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물론 주님은 우리와 언제나 늘 함께 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 안에 늘 계시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이것을 잘 못 느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상태가 좋을 때는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는 것 같은데, 내가 상태가 좀 좋지 않을 때는 주님께서 저 멀리 계신 것처럼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순전히 자기 느낌일 뿐입니다. 주님께서 한번이라도 우리를 떠나셔서 멀리 계신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자기 혼자 왔다갔다, 가까워졌다가 멀어졌다가 하는 것이지, 주님께서는 단 한 번도 우리를 떠나신 적이 없습니다.

 

 

이것을 느끼기 위해서 우리는 날마다 기도에 힘써야 하고, 특별히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예배시간을 마련해 주신 것입니다. 늘 우리와 함께 하시지만, 예배 때는 좀 더 찐하게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 가운데 주님께서 함께하신다는 것을 안 잊어버리도록 우리 마음에 그 은혜와 사랑을 새겨주시는 의식을 딱 마련해주셨는데, 그것이 성찬식입니다. 성찬식 때에 가장 찐하게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그것이 무엇과 같으냐 하면, 부부가 각각 따로 생활해도 그 두 사람이 서로가 한 몸이고 하나임을 느끼지만, 부부관계를 맺을 때, 육체적으로 하나가 될 때, 그 두 사람은 서로가 정말 한 몸이라는 것을 더욱 확연하게 느끼는 것과 같습니다. 성찬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가 주님과 한 몸으로 연합되어 있다는 것을 생생하게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잊지 않도록 생생하게 우리 마음에 새겨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찬에 정말 바르게 참여하는 사람은 성찬을 한 후에는 항상 자신이 주님과 함께 있고, 주님 앞에 있음을 안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상당한 진보를 이루는 것입니다. 때때로 그것을 잊어버렸다가도 성찬을 하고나면 다시금 제대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찬을 하나마나 그 삶의 변화가 없다면 그것은 성찬을 제대로 참여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칼빈의 입장은 성찬을 행할 때, 루터나 로마가톨릭처럼 물리적으로 우리에게 임하시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영적임재설이라고 말합니다. 즉 성례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쯔빙글리의 주장처럼 상징이나 표현인 것만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그 의식을 통해서 은혜가 임하게 되는, 인치는 효과를 나타내는 은혜의 방도라는 것입니다. 다다음주에 이것에 대해서 자세하게 배우겠지만, 성례란 그리스도의 은혜를 표하고 인치는 것입니다. 표시도 하고, 상징도 합니다. 쯔빙글리의 말이 틀렸다는 것이 아닙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더해서 인을 치는 측면이 있는 것입니다. 그 의식을 통해서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마음에 인 쳐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성례를 가벼이 볼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무의식 가운데 쯔빙글리처럼 생각해서 “단순히 의식이다. 정신이 중요한 것이지, 그 의미가 중요한 것이지, 의식은 그렇게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사실 쯔빙글리처럼 생각할 때가 많지 않습니까? 세례식을 해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경향이 우리에게 많이 있어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누가 세례 받으면, 아 누가 이번 주에 세례 받는구나... 그냥 그것으로 끝인 것일 때가 많은 것이죠. 그러나 그냥 그렇게 넘어갈 일이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신자가 거쳐 가야 하는 단순한 의식이 아닙니다.

 

 

옛날 초대교회 신자들은 세례 받는 날을 가장 기쁘고 행복한 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날은 교회의 축제 날입니다. 우리는 성탄절을 교회의 축제날이라고 생각하는데, 초대교회는 성탄절이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축제는 세례 받는 날입니다. 우리가 성탄절날 기쁘고 들뜨고 흥분되고 기대하는 것처럼 그들은 세례식이 있는 날을 그렇게 지냈습니다. 어거스틴의 어미니인 모니카가 말하기를 자기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바로 어거스틴이 세례를 받는 날이라고 했습니다. 개혁파 교회는 전통적으로 누가 세례를 받는다고 하면, 그 전날에 전교인이 다 금식을 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세례식 후에는 그 세례교인을 각 가정이 초청해서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교인이 100명이면 그 사람은 100번 초청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율법이 되면 안 되겠습니다만, 그만큼 세례식을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성찬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아는 한 교수님은 강의 중에 다음 주에 성찬식이라면서 한 달 동안 이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여교수님이셨는데, 마치 기대에 들떠있는 어린아이처럼 그렇게 흥분된 표정으로 말씀하신 것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때 저는 그 모습이 사실 이해가 되지 않았고,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공부해보니깐, 교수님이 제대로 댄 반응을 보인 것이고, 제가 틀린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이렇게 중요하게 생각합니까? 사실 초대교회의 모습이나 개혁파 교회들의 모습이 우리에게는 좀 생소하게 느껴집니다. 그만큼 우리가 그냥 예수님 믿었으면 되었지, 세례는 단순한 의식에 불과하다는 쯔빙글리적인 생각이 알게 모르게 우리의 무의식 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성례를 생각하고 참여하게 된다면, 성례에 바르게 참여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성례를 통해서 받게 될 놀라운 은혜들을 누리지 못하고 사장시키는 영적 손실을 초래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을 행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고의적으로 불순종하는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례에는 상징하는 것뿐만 아니라 인치는 측면도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서, 정말 진지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쁘고 즐겁고 흥분되고 기대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성례에 참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 그리스도의 은혜가 말씀과 함께 우리 안에 풍성하게 내려질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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