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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의 예정론 핵심설교' 중 일부

Sola. 2024. 3. 27. 06:00

 

'칼빈의 예정론 핵심설교' 중 일부

 

존 칼빈 / 임원주 번역

 

 

p.28

야곱과 에서에 관한 첫 번째 설교

창세기 25장 12-22절

사라의 여종 애굽인 하갈이 아브라함에게 낳은 아들 이스마엘의 후예는 이러하고

이스마엘의 아들들의 이름은 그 이름과 그 세대대로 이와 같으니라 이스마엘의 장자는 느바욧이요 그 다음은 게달과 앗브엘과 밉삼과

미스마와 두마와 맛사와

하닷과 데마와 여둘과 나비스와 게드마니

이들은 이스마엘의 아들들이요 그 촌과 부락대로 된 이름이며 그 족속대로는 십 이 방백이었더라

이스마엘은 향년이 일백 삼십 칠세에 기운이 진하여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그 자손들은 하윌라에서부터 앗수르로 통하는 애굽 앞 술까지 이르러 그 모든 형제의 맞은편에 거하였더라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고

이삭은 사십세에 리브가를 취하여 아내를 삼았으니 리브가는 밧단 아람의 아람 족속 중 브두엘의 딸이요 아람 족속 중 라반의 누이였더라

이삭이 그 아내가 잉태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 아내 리브가가 잉태하였더니

아이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가로되 이같으면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p.30

 

그러나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모세가 이스마엘과 이삭을 비교한 것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스마엘을 보십시오 그는 의절 당하여 더 이상 하나님의 자녀로 간주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번성하여 대식구를 거느리고 있습니다. 열두 아들을 낳아 열두 민족을 이루었습니다. 이삭을 보면 어떻습니까? 이삭은 나이 사십에 결혼하였습니다. 그 후 그의 아내는 아이를 낳지 못하였습니다. 한 두 해가 아니라 이십 년 동안이나 자녀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선포하셨지만 이삭을 향한 특별한 은총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때까지 숫자는 늘렸을 수는 있었지만 그의 아내는 아이를 낳지 못하였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자신을 조롱하는 것 같고 자신이 바라고 있는 것은 전혀 무가치하다고 선언하시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따라서 그는 자기 형 이스마엘 즉 교회에는 아무런 뿌리가 없는 자, 구원의 모든 희망과는 전혀 상관없는 자의 자손이 번성하는 것을 보았을 때 하나님께서 모든 은총을 자신에게 쏟아 부으신 것 같지만 집구석에 혼자 남아 뒤를 이을 자가 하나도 없는 것을 보았을 때 틀림없이 크게 당황했을 것입니다. 마치 자기 형 이스마엘처럼 되었다면 더 좋았을 것처럼 말입니다.

 

 

p.33

 

그 다음에 오는 것 때문에 이스마엘 이란 인물에 주의를 잘 기울여야 합니다. 이스마엘은 당시에 유일한 교회였던 아브라함 집안 출신입니다. 마치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인 것처럼 할례도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장자였으며 동생을 조롱할 정도로 집안에서 권세(세력, 영향력, 권위)있었던 것을 우리는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이 시대의 교황주의자와 상당히 유사합니다. 그들은 교회에 낯설지 않지만 사생아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들은 또한 유구한 역사가 자신들을 옹호하고 우리보다 앞섰다고도 말할 것입니다. 자신들의 교회에는 항상 주교들과 수도원장들이 있었으며 (그들이 그렇게 말한다), 여기에 입각하여 교회라는 명칭은 자기들 것이라고 확실히 결론지을 수 있다고 말할 때 그들이 사도 계승권을 얼마나 신뢰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래도 그들은 이스마엘과 마찬가지로 단지 사생아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우리가 들은 복음에 의하여 즉 자유의 시앗에 의하여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더럽혔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어떻게 이스마엘 족속이라고 간주할 수 있는지를 보십시오 그들이 비록 위대한 민족들이고 우리는 가엾고 미숙한 열매로 남아 있을지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그 문제에 관해 이와 같은 사례를 주셨다는 것과 이 시대에 우리는 부끄러움을 당치 않을 것을 깨닫도록 합시다. 요컨대 바로 이들의 말을 여기에 적응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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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소수로 전락하고 무서운 황폐함 밖에는 아무 것도 안 남는 일이 한 번만 일어나지 않습니다. 바빌론 포로시대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사야가 그 사건에 관하여 언급합니다. (사 54:1-3). 잉태치 못하며 생산치 못한 너는 노래할찌어다. 구로치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찌어다. 홀로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네 장막터를 넓히며 네 처소의 휘장을 아끼지 말고 널리 펴되 너의 줄을 길게 하며 너의 말뚝을 견고히 할지어다. 이는 네가 좌우로 퍼지며 내 자손은 열방을 얻으며 황폐한 성읍들로 사람 살 곳이 되게 할 것임이니라. 그러므로 교회에 주시는 이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낮추시거나 우리 범죄를 처벌하시기 위하여 이때에 하나님을 부르는 자들의 수효를 줄이 실지라도 기죽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조금도 놀라지 않고 항상 우리의 소명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합시다.

 

나아가서 시편 113편 9절에서 주신 말씀 즉 하나님께서 전에는 아이를 낳지 못하던 자들의 집을 경건한 자녀들과 위대한 자손으로 채우실 것임을 (특히 교회라는 지위에서)명심합시다. 우리 주님께서 자신의 일을 하실 그 때까지 기다립시다. 그 때가 되면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기회가 생길 것이며 아브라함의 씨가 많아질 것이라고 하신 말씀이 헛되지 않으며 오히려 이 일은 우리가 납득하지 못할 일 다음에 올 것이며 이런 인내심을 가져야 할 때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역사 하실 것이 분명합니다. 그 결과는 우리가 생각하거나 바랄 수 있었던 것 이상으로 나타날 것이기 때문에 그것으로 말미암아 그의 약속 가운데 항상 견고하게 서 있어야 합니다. 더욱이 우리는 이것을 여기 이 자리에서 주목해야 합니다.

 

그러나 어려운 점이 또 하나 있습니다. 이스마엘이 매우 진보하여 놀랄 만큼 많은 자손을 두고(137년을 살면서 열두 아들을 두었다)이미 한 민족이 전해지는 것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한 동안은 매우 높여졌지만 이내 제거될 자였습니다. 실제로 모세는 그가 낳은 자녀들을 열거하셨습니다. 그러나 거룩한 역사 속에서 말할 때에는 삭제하고 축복 받은 아브라함의 참된 혈통과는 전혀 연결하지 않습니다. 유사한 권위를 갖는다는 것 사람들 사이에서 위대한 모습과 훌륭한 외모를 갖춘다는 것 좋은 평판을 받는다는 것 즉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경탄하는 그런 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에 주목합시다. 이 모든 것은 교회의 항구적인 지위를 비교하는 데에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습니다.

 

 

p.36

 

그러면 왜? 이삭의 아내가 60세가 될 때까지 아이를 낳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경이로운 사건입니다......이것은 생소하고 사람들이 도저히 생각지 못했을 방식으로 일어났습니다. 이 시대를 사는 우리도 우리 자신에게 적용하도록 합시다. 시편 37편 10절에서 언급한 것을 실천하도록 합시다. 만일 사악한 자들 하나님을 경멸하는 자들이 레바논의 백향목 처럼 장성해지는 것을 목격하게 될지라도 기다립시다.

 

우리의 눈을 돌리는 것 이외에는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오호라. 그들은 제거되고 잘릴 것입니다. 그들이 서 있던 장소조차 볼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하나님 안에 심겨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태복음 15장 13절에서 내 천부께서 심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p.38

 

그러므로 지금까지 다른 이것이 이 지위에 관해서 그리고 모세가 이스마엘의 혈통과 이삭의 혈통을 구별한 차이점에 관해서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시작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끝은 놀랍습니다. 이 세상 자녀들의 시작은 강력하고 고귀하며 모든 사람을 놀라게 할 만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무로 끝납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은 생명의 샘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끝까지 견딜 수 있는지를 보십시오 이 또한 우리를 세상보다 뛰어나게 만드는 수단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시는 것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부성적 선하심으로 만족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지금 눈앞에 있는 것에 급급한 바보가 되지 맙시다. 이런 현세적인 것들은 사라져 없어집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을 보도록 합시다. 그것이 믿음의 참된 본질입니다. 그렇게 사도가 말하고 모세가 덧붙이고 있습니다.

 

 

 

p.44

 

이삭이 자기 아내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 아내 리브가가 잉태하였더니......하나님께서는 20년이 찰 때까지 미루셨음에도 불구하고 이삭은 기도하기를 멈추지 않았으며 오히려 항상 계속하였습니다. 그의 기도는 그의 신앙을 확실하게 보증해 주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대들려고 하는 불신자들의 태도를 따라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당시는 아직 기록되지 않았지만)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제시한 규칙을 따랐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기도에 감사를 더하는 것이며 우리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탁하고 아직 보이지 않지만 그가 나타내시기를 잠잠히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삭은 둘러싸고 있는 모든 힘겨운 것들과 자신을 압박하고 있는 모든 근심과 모든 슬픔과 비통함과 고뇌를 하나님의 가슴에 버리기를 계속하였을 때 즉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가슴에 맡겼을 때 이것은 계속하였을 때 즉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가슴에 맡겼을 때 이것은 그의 믿음에 대한 확실한 연단이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삭의 모범을 통해서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매여 있어서 자신이 말씀하신 모든 것을 단숨에 해주셔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일단 말씀하신 뒤에 자신의 일을 성취하신다는 정표를 주시지 않으며 우리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모든 것을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말과 바람 이외엔 아무 도 아니었다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날마다 해마다 평생동안 (바울이 히브리서 10:37에서 이 점에 관해서 훈계하는 것처럼) 이와 같은 인내로 자신을 억제해야 합니다. 마치 아무 것도 없는 듯이 잠잠히 우리 자신을 억제하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평화를 유지하며 우리의 변덕스러운 욕망이 우리를 움직이고자 하는 대로 끝까지 다투지 아니하며 소동을 일으키지도 않고 반론을 제기하지도 않고 그에게 항복을 요구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실제로 사도가 하박국 선지자(2:3)로부터 주장하는 것을 바로 이 곳에 가져와야 합니다. 즉 그의 약속이 비록 더딜지라도 말하고 있습니다. 즉 그것은 확실하고 의심의 여지없이 실행 될 것이며 거기엔 때가 있지만 우리와 우리의 감각 혹은 느낌의 입장에서는 지체할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어떻게 연단 해 야 하는지 보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신실하신 분임을 보여 주시기를 바란다면 우리가 견고하며 변치 않고 남아 있기를 바란다면 종종 반복해서 기도와 탄원으로 연단 받는 것이 마땅합니다.

 

 

p.50

 

야곱과 에서에 관한 두 번째 설교

 

그의 아내 리브가가 잉태하였더니

 

창세기 25장 21-22절 (우리가 보는 성경에는 각각 22, 23절로 되어 있습니다)

 

21.아이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사우는 지라 그가 가로되 이 같으면 내가 어찌할꼬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22.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 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종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 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p.57

 

자연 법칙에 손 대시기까지 하면서 그를 밀어내고 그 형보다 못하게 만드신 뒤에 그를 높이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여기서 목격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든 영광을 가리시고 모든 높음을 내던지고 인간들을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만드시고자 한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이런 저런 선한 것을 성취하였다. 나는 나 자신의 부지런함으로 이루었다고 말씀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미 다룬 것 즉 교회에 속한 모든 자들은 자기 자신의 공로에 의하여 이곳에 도달한 것이 아님을 자신의 덕으로 이 은총을 획득하지도 못하였음을 다만 하나님께서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선택하셨음을 볼 수 있게 해주는 거울을 여기에서 발견합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가 붙잡아야 하는 것을 간략하게 살펴보십시오.

 

 

p.63

 

교회의 뿌리요 시작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p.71

 

그러나 하나님께 대드는 불한당과 망종들이 있습니다. 느슨하고 음란한 생활에 의하여 이 예정 교리를 뒤집는 못돼먹은 종자들이 있습니다. 이 교리에 적대적인 사람들은 두 종류입니다. 하나는 망종들이며 다른 하나는 못된 것들입니다. 전자는 어떤 자들입니까? 전자는 이빨을 드러내고 짖어대면서 자신들의 사악한 의문들로 하나님을 경멸하는 자들입니다. 조금의 가책도 느끼지 않고 성경을 온통 조각조각 찢어 모든 것을 타락시키고 왜곡시키고 거짓되게 만들고 불순하게 만드는 그런 불량스런 자들이 우리 시대에도 있습니다.

 

 

그런 자들은 하나님의 선택을 애매하게 보이도록 하고 모든 것을 전혀 하찮게 보도록 합니다. 이 교리를 밉살스럽게 보이도록 하기 위하여 이것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주의해 보십시오. 그들이 말하기를 이처럼 말하는 자들은 선과 악 사이에 전혀 차이를 두지 않으며 하나님이 이 둘 사이에 차이를 둔다면 이렇게 불의하게 될 것이며 사람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합니다. 이 교리에 반대하여 짖어대며 이를 갈아대는 개들을 보십시오 이 교리에 반대하여 이런 종류의 경멸은 하지 않지만 아주 좋다고 말하는 야비한 자들도 있습니다. 즉 나를 선택할지라도 내가 원하는 만큼 악을 행할 수 있다. 나를 지키는 방법을 하나님께서 잘 알고 계신다.

 

 

그래서 나는 결코 멸망할 수 없다. 반대로 나를 유기한다면 나를 결코 구원하지 못하는데 무엇 때문에 그렇게 잘 하려고 애써야 하는가? 이것들은 (이미 언급한 것처럼) 자신들의 반대를 뿜어내지 않고 하나님의 진리를 뒤집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기에서 몸부림치면서 난폭한 짐승처럼 자기 죄 가운데 머물러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두 가지 모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됩니다......실제로 이것들이 숨겨진 문자이며 누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지를 안다는 것은 이해하지 못할 비밀이라고 사도 바울이 말하면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찌어다라고 덧붙입니다. (딤후 2:19) 하나님은 우리의 공로를 고려하지 않고 우리를 선택하셨을 때 우리에게 악을 행할 기회를 주지 않으신다는 것에 주의합시다. 유일한 선하심으로 우리를 지탱하십니다.

 

 

이렇게 하는 목적은 우리로 그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우리로 훨씬 더 주의 깊게 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손댄 것 즉 우리가 그의 얼굴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것으로 되돌아갑시다. 우리가 이런 사람이 때문에 우리를 선택하시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이런 사람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쪽으로 전진해야 합니다. 이것을 우리가 사는 동안 모든 날 동안 목표해야 할 표적으로 삼아야 마땅합니다.

 

 

p.74

 

야곱과 에서에 관한 세 번째 설교

 

창세기 25장 21-22절

그의 아내 리브가가 잉태하였더니

 

21.아이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 지라. 그가 가로되 이 같으면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22.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 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p.78

 

이 시대의 허다한 개들이 이 예정교리에 반대하여 신성모독을 내뿜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들이 하나님께 묻지 않고 마치 적절하고 충분한 것처럼 자기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지껄여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p.87

 

믿음은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이 뿌리에서부터 나오는 것이라고 결론 내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신앙은 선택에서 나온다고 이미 언급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것처럼 적당한 때에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p.89

 

확실히 하나님의 이 예정에 관하여 배우는 것은 신실한 자들의 참된 즐거움입니다. 더욱이 사악한 자들이 하나님을 비방하고 모든 것을 왜곡하기 위하여 중상모략하며 이 교리를 미워할 때 이상스럽게 여기지 맙시다. 그것은 그들 자신을 유기 된 자라고 선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p.91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강한 자에 관하여 말하면서 하나님의 예정이 확고하며 의문의 여지가 없을 때 그의 성령이 우리를 붙들고 있을 때 우리는 더 이상 두려워 할 필요가 없음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이것은 유익하며 대단히 필수적인 핵심입니다. 우리의 조건은 무엇입니까? 우리를 쓰러뜨리기 위해서는 단 한 줄기의 바람도 필요 없습니다.

 

 

우리의 눈을 현란하게 만드는 데는 파리 한 마리면 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더 이상의 것이 필요 없을 만큼 대단히 많은 전쟁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무한정한 숫자의 원수들을 보십시오 저는 지금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자들에 관하여 말씀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원수들에 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공중은 악령들로 가득 차 있으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날아다닐 때를 제외하고는 우는 사자와 같습니다. 오호라! 우리가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자신의 손안에 두시고 지키실 것임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계속해서 그리고 끊임없이 비탄과 원통함 속에 있으며 철저하게 짓눌린 불쌍한 모습이 될 것이 틀림없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것을 희망 속에 잘 간직하고 있으며 믿음은 전대와 같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 보내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아버지로부터 자기에게 주신 모든 자는 멸망치 않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이것을 훨씬 더 분명하게 선포하셨습니다. 어째서? 너희를 나에게 주신 아버지는 모든 것보다 훨씬 강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끝까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실 것이며 그가 우리를 자신의 손으로 일으켜 세우고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것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예정이 없다면 불가능합니다. 성부께서 우리를 자기 아들의 돌보심에 맡기셨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았을 때 우리를 끝까지 지키실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의 약속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 약속에 의하여 자신을 우리에게 붙들어 매두고 우리를 보존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나아가서는 마지막 날까지 부활 때까지 그렇게 하십니다. 우리 구원의 처음과 끝이 그의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누구 안에서 즐거워 할 수 있는지 보십시오 우리의 약함과 깨어지기 쉽다는 것과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며 모든 것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나를 부르신 주님께서 자신의 일을 완성하실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 138편에서 그렇게 말합니다.(시 138:7).

 

주께서는 자기 손의 일을 중간에 포기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민족을 훨씬 더 강하게 할 것이라는 이 교리를 견고하게 붙들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온 세상을 이길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초를 하나님의 예정 위에 두고 그 위에 자리잡도록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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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98

 

야곱과 에서에 관한 네 번째 설교

 

24:그 해산 기한이 찬즉 태에 쌍둥이가 있었는데

25:먼저 나온 자는 붉고 전신이 갖옷 같아서 이름을 에서라 하였고

26: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육십세이었더라

27: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사냥꾼인고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종용한 사람인고로 장막에 거하니

28:이삭은 에서의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

 

 

p.107

 

야곱은 자기 어머니의 사랑을 받았고 에서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다.

 

 

이 문장은 이삭에게 당연히 있었어야 하는 완전함이 없었다는 사실을 아주 잘 보여 줍니다. 이삭은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는 말을 몰랐던 것은 아닙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의지가 그렇기 때문에 장자 에서가 명예로운 자리와 지위를 내놓아야 한다는 것을 아주 잘 알았습니다. 그래도 에서를 사랑했습니다. 이삭이 하나님의 지혜에 저항하고자 한다는 것이 여기에 나타납니다. 여기에서 그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이삭이 자신의 모든 사람을 에서에게 주고자 하지만 결국 하나님께서 다스리십니다.

 

하나님의 예정은 온 세상이 덤벼들어도 꿈쩍하지도 않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오! 이삭! 그는 대단히 어리석은 자입니다. 아니! 그 이상입니다. 그는 육욕적인 애정에 끌려 다닌 것 같습니다. 어째서 에서를 사랑했습니까?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가져다주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식성 때문에 에서를 사랑했습니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나이 때문에 정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어리석고 변하기 쉬운 애정에 이끌려서는 안되었습니다. 자신의 식성과 식욕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불변의 작정에 의하여 선포하신 것을 망각하였습니다. 그 변치 않는 작정이란 야곱이 다스리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삭은 이것을 염두에 두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목격하는 것은 유대인들은 그들 조상이 때때로 가졌던 위엄이 마치 사람들의 거룩함과 미덕들로부터 나온 것처럼 자기 조상들을 자랑하는 데에 너무 너무 눈이 멀었다는 사실입니다. 분명히 이삭은 자기에게 있는 것만큼 하나님의 선택을 뒤엎었습니다. 이삭에게 그렇게 하려는 의지가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물어보았더라면 어떨까? 당신은 하나님께 저항하시렵니까? 하나님께서 선언하신 것을 실행하지 않을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자신의 입으로 선언하신 것을 실행하지 않을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자신의 입으로 선언하신 것을 변경하렵니까?

 

 

그는 아니오! 즉 자신의 의도는 그게 아니라고 대답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그는 그런 쪽으로 끌려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삭은 하나님의 선택을 돕거나 밝히려고 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이삭은 하나님의 예정을 방해했습니다.

 

 

p.109

 

이삭은 교회에서 족장과도 같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이삭에게 언약을 맡기셨습니다. 그가 출납계원이 되어 그것을 (보이는 것처럼) 야곱의 예정에 대한 원수가 되었습니다.

 

 

p111

 

그러나 이삭은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길 것이라는 말씀을 항상 자기 눈앞에 두고 있어야 했으며 자신의 마음속에서 새겨 두었어야 합니다. 이 목소리를 자신의 귀로 들었어야 했습니다. 그는 끝없이 멈추지 않고 하나님께서 예정을 야곱에게 두실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동의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그의 음식이 그를 바꿉니다. 그를 정반대로 끌고 갑니다. 그러므로 우리편에서 분별력을 갖추고 (내가 이미 말한 것처럼)우리의 욕망들이 억누르도록 합시다.

 

 

어떤 지나침도 무절제도 없도록 하기 위하여 현명하게 억제하고 길들여서 우리를 다른 곳으로 끌고 가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하는 것을 방해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우리가 배워야 하는 것을 간략하게 주목합시다.

 

 

리브가가 남편보다도 애정을 훨씬 바르게 이끌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그녀는 야곱을 더욱 사랑하였습니다. 야곱이 아버지의 마음에 들지 못해서 아니고 이와 같은 사랑을 받지 못해서도 아닙니다. (이후에 살펴보겠지만)그녀는 하나님의 예정을 생각했으며 야곱을 더 사랑해야 한다는 말을 항상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p.119

 

29: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 돌아와서 심히 곤비하여

30: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곤비하니 그 붉은 것을 나로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31:야곱이 가로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날 내게 팔라.

32:에서가 가로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33.야곱이 가로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34: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서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김이었더라.

 

p.125

 

이제 야곱의 그에게 그 대가로 장자권을 달라고 합니다. 만일 그가 야심을 품고 요구하였고 그것이 자신에게 속하지 않았던 것이라면 그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거래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그러나 야곱이 요구한 것은 전혀 에서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먼저 자기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두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겨야 한다고 선언하셨다고 선고되었음을 야곱은 알고 있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이미 믿음을 통하여 장자권을 소유하셨습니다. 사실상 그것은 세상의 심판에서 그를 세워주는 데에는 아무 소용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께서 그를 장자로 정하셨고 장자권이 그에게 속하도록 선언하셨다는 것을 그가 알고 있었다는 올바른 자격에 관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에서의 것을 조금도 빼앗지 않았습니다. 본래 자기 것을 다시 요구하셨습니다. 그것은 마치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당신이 먼저 어머니의 태에서 나왔기 때문에 당신은 나와 당신 둘에 관해서 하나님께서 하신 선언을 경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것은 유효함에 틀림없고 철회할 수 없습니다. 나 자신에 관해서 말하자면 내게 약속된 것을 획득하기를 항상 소망하고 있습니다. 당신 편에서 말하자면 이것은 나는 나 자신의 생명보다 하나님 섬기기를 훨씬 더 중시한다는 것을 당신이 이해하도록 할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나에게 당신의 장자권을 파십시오라고 우리는 여기에서 야곱이 사기 혹은 양심에 의하여 다른 사람의 것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형에게 속한 축복을 스스로 망치도록 강요한 것도 아니라 야곱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것을 사람들 사이에서 인정받고 승인 받기를 요구하는 것임을 간략하게 살펴봅시다. 자! 이것은 여기에서 언급된 것의 개요입니다.

 

 

p.127

 

야곱은 다른 사람의 것을 착취하지 않았습니다. 야곱은 자기 것을 늘리고 형의 것을 줄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것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 장자권은 이미 그의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자연적인 질서를 따라서가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을 그렇게 기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아무도 속이지 않았으며 어느 누구에게도 잘못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의 것을 가져오는 데 어떤 가혹한 행위도 지나침도 없었기 때문에 야곱의 예에서 사람들 사이에서 흔히 횡행하는 도둑질과 압제를 후원하거나 본보기를 찾아서는 안됩니다.

 

 

야곱이 추구한 것이 부가 아니라 영적인 축복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그는 물건을 구하지도 않고 자기형보다 더 뛰어나게 해 줄 세속적인 영예도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버립니다. 이 모든 것이 그에게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것을 갖고자 합니다. 즉 그가 이 세상에서는 작지만 고초를 겪고 괴로움을 당하고 삼킴을 당하지만 사람들로 해침을 당하지만 그에게는 아무래도 좋았습니다. 이 헤아릴 수 없는 보물을 간직하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핏줄에서 세상의 구원이 나오고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교제를 나누는 그것입니다.

 

p.261

 

야곱과 에서에 관한 열 한 번째 설교

 

​창세기 27장 1-7절

 

 

 

p.271

 

그리고 자신의 말씀이 이렇게 효력이 잇도록 하셔서 말하자면 우리에게 천국 문을 열어주는 열쇠와 같도록 하십니다. 그것을 천국의 열쇠에 비유하셨습니다.

 

 

 

p.278

 

이삭의 믿음 속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거룩한 성령에 의하여 우리를 부분적으로 새롭게 하셨을지라도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은 우리 안에 불 완전성이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도록 합시다. 하나님께서 역사 하시어 우리 안에 있는 악이 우리 자신에 의해서 조차도 하나님의 사역을 성취하지 못하게 가로막지 못한다는 사실을 명심하도록 합시다.

 

예를 들어 죽을 운명을 가진 인간에게서 천사 같은 완전함을 발견할 때까지 추구하고자 한다면 그런 완전함을 소유한 자를 결코 찾지 못할 것이며 어떤 종류의 잘못으로 물들지 않은 사람을 결코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이며 예표인 제사장들은 비록 자신들이 사람들을 위하여 중재하고 중보자의 역할을 하고 자신들의 제사에 의하여 죄악을 씻어낸다 할지라도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들이 범죄에 대한 용서를 구하였습니다.

 

그들의 출발점은 바로 자신들이었습니다. 자! 그런데 만일 우리가 전혀 찾아내지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 틀림없이 가장 탁월한 그 사람들조차 인간의 허무함과 연약함에 대한 예가 되고 말것입니다. 이제 결론을 내리고자 한다면 그들에 의하여 나의 구원을 어떻게 발견할 것입니까? 내가 보기에 그들조차 불완전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를 이끌어 내는 자들 즉 그들이 비록 마땅히 되어야 하는 그런 존재는 아닐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세워서 지키도록 하고 맡기신 영적인 은사들을 우리에게 나누어 줄 때 그들 안에서 아직도 무지가 존재할지라도 하나님은 자신의 일을 성취하시기를 그만두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삭에게서 배우도록 합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로부터 우리의 이익을 얻기를 포기하지 말도록 합시다. 하나님은 은혜가 조금도 방해받지 않도록 하십니다. 그런 사람들 안에서도 보다 좋은 것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바로 이것이 우리가 여기에서 주목해야 하는 교훈입니다.

 

 

 

p.280

 

그러나 그 믿음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성령과 말씀에 의하여 우리를 조명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선하심과 은총으로부터 얻은 이해입니다. 믿음은 이 두 가지가 없으면 존재하지 못합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두신 순서대로 그 뒤에 성령의 은사가 없으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아침저녁으로 전해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 귀를 열어주시지 않으면 그리고 우리는 비참한 장님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빛을 비춰 주시지 않으면 거기에서 어떤 유익도 얻지 못합니다.

 

태양은 우리에게 한산 빛을 비춰줍니다. 그러나 눈먼 삶은 낮과 밤을 구별하지 못합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낮이나 밤이나 똑같습니다. 우리도 똑같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거룩한 말씀을 보내주시어 우리에게 바른 길을 알려 주실 때 하나님께서 안에서부터 우리에게 빛을 비춰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항상 불쌍한 미아 혹은 길 잃은 양으로 남아있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 그 자체에 빛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빛은 어둠에 둘러싸이고 뒤섞여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밀한 것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육신을 벗고 천국의 영광으로 변화되어 천사들과 교제를 나누게 될 때와는 달리 하나님의 비밀들을 부분적으로 말고 우리에게 완벽하게 계시될 것을 약간 맛보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이것이 우리가 이 신분에 관해서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믿음이 크고 훌륭할지라도 항상 약함과 불완전성과 무지가 뒤섞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 주십니다. 이것으로부터 우리가 믿음에 의하여 의롭게 되고 구원받는다고 성경이 선언할 때는 그것이 믿음의 공로에 의한 것이라는 의미가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

 

p.331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을 미워하도록 만들기 위하여 악한 생각을 품은 사람들이 열심히 퍼드린 중상모략과 신성모독에 대한 답변

 

로마서 9:20

이 사람아 네가 위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갈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사탄의 옹호자들이 하나님의 영원한 에정에 관한 기사를 그토록 공격하고 싸움을 건다고 할지라도 놀라서는 안됩니다. 예정은 우리 구원의 기초이며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하심을 더 깊이 찬양하도록 만듭니다. 반면에 에정에 반대하여 짖어대는 저 개들은 바람직하고 유리한 구실이 있다고 생각하고는 더욱 뻔뻔스러워집니다.

 

진실로 우리 구원의 근거를 하나님의 선하신 의지에 두는 것만큼 인간의 이해에 모순되는 것은 없습니다. 오직 우리를 선택하는 하나님께만 속한 것이며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를 선택하도록 만드는 그 어떤 것도 우리에게서는 찾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뒤에 우리를 의롭게 만들어 줄 믿음을 주신다고 말하는 것은 정말 인간의 이해에 거슬리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사람에게 매이지 않으시기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나머지들을 영원한 죽음 속에서 내버려두시는 자유를 자기에게 남겨두실 근거는 충분합니다.

 

 

p.335

 

만인구원설을 주장하는 목록이 너무 길기 때문에 우리형에 베자 선생이 그것에 관하여 작성한 소책자에 수록된 것들을 참조하십시오 그것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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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칼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