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 출처: https://open.kakao.com/o/g7UYmxQe
(오픈채팅: 기독교인들의 교제와 성경대화)
'선택과 유기의 말씀은 거룩함을 파괴한다'는 존 웨슬리에 대한 조지 휫필드의 반론
(2019.3쯤)
두 번째로, 자네는, “그것은 (선택과 영벌의 교리는) 하나님의 모든 규례의 목적인 거룩함을 직접적으로 파괴하는 경향이 있다”라고 말하고 있네. 왜냐하면 (판단을 잘못한 웨슬리 자네가) “너무나 빈번하게 성경에 제시되어 있듯이 거룩을 따르려고 했던 그 첫마음을 완전히 앗아가 버리기 때문이다. 미래의 보상에 대한 소망, 형벌에 대한 두려움, 천국의 소망, 그리고 지옥의 두려움 등”이라고 말했네.
사랑하는 웨슬리 자네만큼 완전함을 그토록 높은 경지까지 끌어올린 사람이라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거룩해지도록 거룩해지려고 힘쓰는 것이며, 천국의 보상이나 지옥의 두려움과 상관없이 사랑과 감사하는 마음에서 그리스도를 위해 일하게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네.
사랑하는 친구여, 스쿠갈(Scougal)이, “사랑은 사람을 움직이는 더 강력한 동기이다”라고 말한 것을 자네도 기억할테지. 그러나 이것은 넘어가서, 정직하게 보상과 형벌이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해 행동하도록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동기가 된다고 인정한다 하더라도 (틀림없이 그렇기에) 어떻게 선택 교리가 이러한 동기들을 파괴하는가?
선택받은 사람들은 그들이 선한 일을 많이 하면 할수록 그들의 보상이 더 크다는 사실을 모른단 말인가? 이것이 그들을 세우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일하는 데 인내하도록 만들기에 충분한 격려가 되지 않는가? 어떻게 선택 교리가 거룩함을 파괴하는가? 사도가, “성령의 성결케 하심을 통해 선택되었다”라고 말했을 때, 그가 설교한 것 말고 어느 누가 그 밖의 다른 선택을 설교했단 말인가? 그렇지 않네. 선택을 설교하는 모든 사람들에 의하면, 거룩은 우리가 선택되었다는 표증이 되지 않은가? 그렇다면 어떻게 선택의 교리가 거룩을 파괴할 수 있는가?
자네가 자네의 논증을 예증하기 위해 들고 있는 예는, 정말이지, 사랑하는 친구여, 완전히 이것과 관계가 없는 것이네. 자네는, “만약 어떤 아픈 사람이 어느 쪽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자신이 불가피하게 죽거나 아니면 불가피하게 회복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그가 치료를 받는 것은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다”라고 말하고 있네. 사랑하는 형제여, 이게 무슨 불합리한 논법이란 말인가?
(조지 휫필드 목사)
자네는 평생토록 아팠던 적이 없었는가? 아무리 자네가 틀림없이 살거나 죽는다는 사실이 고정 불변하게 정해져 있다는 것을 안다 할지라도, 자네가 회복될 수 있다고 하는 있는 그대로의 가망성, 혹은 그 가능성이 치료를 받도록 자네를 격려하지 않았었나?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바로 그 치료를 통해 자네를 회복하시기로 작정하셨을지를 자네가 어떻게 알겠는가? 선택의 교리가 바로 이와같네.
내가 반드시 저주를 받거나 아니면 반드시 구원을 얻는다는 사실이 고정 불변하게 정해져 있다는 것을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누군가 말할지도 모르겠네. 하지만 나는 어느 쪽인지를 확실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현재 내가 육에 속한 상태에 있다 할지라도, 이러한 애씀이 하나님께서 나를 은혜의 상태로 이끌어 가시기 위해 나에게 복을 주시려고 작정하신 도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면, 어찌하여 내가 애를 쓰지 않겠는가?
사랑하는 친구여, 이러한 것들을 생각해 보게. 치우치지 않는 적용을 해 보게. 그리고 나서, “따라서 이 교리는 일반적으로 거룩함의 바로 그 문을 직접 닫아 버려서 거룩하지 않은 사람이 거룩함에 접근하거나 혹은 거룩함에 들어가도록 애쓰는 것을 방해하는 경향이 있다”라고 12번째 페이지의 10번째 문단에서 결론 내리고 있는 것이 얼마나 미약한 이유에 근거하고 있는 것인지를 판단해 보게.
자네는, “직접적으로 이 교리는 온유함, 사랑 등과 같은 거룩의 여러 가지 특정 가지들을 파괴하는 경향이 있다”라고 말하고 있네. 사랑하는 친구여. 이 문단에 관해서는 조금만 답변하겠네. 사랑하는 웨슬리 자네가 아마도 선택을 붙잡고 있는 몇몇 미지근하고 좁은 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 논쟁을 하고는, 그들의 정신이 미지근하고 좁은 것이 그들의 원칙들 때문이라고 추론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네.
그러나 사랑하는 웨슬리, 자네는 예정론자이면서 온유하고 겸손하며, 긍휼히 여기고 정중하며, 부드러운 마음을 가졌고 친절하며, 포용적인 정신을 가지고 있고, 그리고 가장 간악하고 방탕한 사람이 회심하는 것을 보고 싶어 하는 하나님의 많은 사랑스러운 자녀들을 알지 못하는가? 그들이 왜 그런가?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선택적인 사랑의 행위로 그들 자신을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지금은 가장 버려진 것 같아 보이는 저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선택하지 않으셨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네.
그러나 사랑하는 친구여, 전적으로 이 교리들을 고수하고 있다고 고백하는 몇몇 사람들의 관행으로부터, 일반적으로는 원칙들의 진리 여부를, 특정적으로는 선택 교리의 진리 여부를 판단해서는 안되네. 그렇게 되면, 자네 자신의 교리에 대한 큰 반대가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네.
자네는 만인 구원론을 고수하고 있는 사람들과 연관된 편협한 정신과 얼마늬 혼적 분열을 자네 자신 안에서 느꼈거나 혹은 다른 사람들에게서 발견하지 못했는가? 나는 이 부분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 보라고 자네 마음에 호소하는 바이네. 만약 그랬다면, 자네 자신의 규칙에 따라 만인 구원론은 틀린 것이네. 왜냐하면 그 교리는 온유, 사랑 등과 같은 거룩함의 여러 가지들을 파괴하기 때문이라네.
그러나 이것을 주장하지 않더라도 사도가 펼치는 논증의 힘과 그가 골로새서 3장 12, 13절에서 의미심장하게 사용하고 있는 말들에 의해, 자네의 추론이 완전히 제쳐지고 있는 것을 보라고 당부하고 싶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여기에서 사도는 이것을 생각하고, 즉 그들이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이기 때문에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 등으로 옷 입으라고 그들을 권면하고 있는 것을 보네. 경험적으로 이 교리를 마음 속으로 느꼈던 모든 사람들은 이러한 은혜들이 그들이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이라는 사실의 순전한 결과임을 느끼고 있네.
그러나 아마도 사랑하는 웨슬리, 자네는 이 점에서 실수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하나님의 진리를 향한 열심만을 열정이라고 부르는지도 모르겠네. 사랑하는 친구여, 사도가,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 (유 1:3)고 우리를 권면하고 있다는 것을 자네도 알고 있을 터이니.
그러므로 선택 교리를 향해 열심있어 보이는 모든 사람들을 좁은 마음을 가졌다거나 핍박자라고 정죄해서는 안되네. 왜냐하면 그들은 자네를 반대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네.
내가 확신하는 바는,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자네를 사랑하며 자네를 위해서라면 내 목숨도 내놓을 준비가 되어 있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친구여, 비록 고의적으로는 아닐지라도 자네가 예수님 안에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분투적으로 반대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떄문에, 이 중요한 주제에 관한 자네의 잘못을 반대하는 데 내 뜻을 굽힐 수가 없네. 주님이여, 웨슬리의 마음의 눈으로부터 편견의 껍질을 벗겨 주시고, 참된 기독교 지식을 따라 그에게 열심을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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