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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오늘 한 일로 인해서 죽게 될 것을 알고 있다. (제임스 거스리)

Sola. 2024. 7. 30. 06:00

 

제임스 거스리

 

양남식 목사 (RPCNA 교단) (2016.1.7)

 

 

사무엘 루터포드의 절친으로 유명한 제임스 거쓰리.

그가 1638년 실행된 국민 언약 (National Covenant)에 서약하면서 남긴 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내가 오늘 한 일로 인해서 죽게 될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보다 나은 이유로 죽음을 맞을 수는 없을 것이다.'

 

1661년 챨스 2세의 복귀 이후, 그는 가장 먼저 죽음을 맞이하는 언약도로 기억됩니다.

 

제임스 거스리 (James Guthr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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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거스리

 

joyful

 

 

권력의 힘이 남용되어 국민의 생존권까지 위협을 받게 되는 뼈아픈 시절에 덕망이 있는 지주의 가문이기는 하나 정치적인 이해득실에 충실했던 부모 밑에서 제임스 거쓰리(James Guthrie) 목사는 태어났다. 잉글란드와 스코틀란드의 왕권이 통합이 된 이후(1603) 국가와 교회를 손에 쥐고 세속권력을 마음껏 휘두르는 세력 앞에서 분연히 일어서 종교와 시민의 자유를 지키려고 몸부림친 스코틀란드의 언약도들의 첫 순교자이기도 한 제임스 거쓰리 목사는 부친의 감독제도의 가르침에 따라서 감독교회(성공회)의 신부가 되기를 원하였었다.

그래서 문법학교를 다니면서 고전어를 습득하였고 그후 성 앤드류 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그의 학문적인 자질은 곧 인정을 받게 되었으며 졸업 후에 본 대학의 철학교수로 봉직하게 되었다. 그가 성 앤드류 대학에서 공부하는 동안 그의 종교적인 확신이 감독제도에서 장로회정치로 바뀌게 되고 결국 장로교 목사가 된 것은 당시 그 대학에서 명성을 떨치면서 스코틀란드의 언약도들에게 큰 지주가 되어준 성자 사무엘 루터포드 목사의 가르침 때문이었다.

 

결국은 복음에 사로잡힌 목사가 되어 대학교수직을 청산하고 1638년에 Lauder 교구 장로교 목사가 된 것이다. 물론 그는1638년에 있었던 국가언약(The National Covenant)에 서명을 하였으며 그 이후 한번도 언약도 정신을 버린 적이 없는 언약도였다. 1649년에 스털링(Stirling)교구로 임지를 옮긴 후 1662년 순교를 당할 때까지 일생동안 복음사역자로서, 그리고 그리스도의 수장권을 수호하는 일을 위하여 몸부림친 하나님의 거룩한 사도였으며 경건한 목사였다.

 

찰스1세의 감독주의 제도 하에서 두 나라를 통합시키려는 종교정책 때문에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 삼고 바른 교회 형성을 위해서 몸부림치고 있던 스코틀란드가 혼란에 빠지게 되었을 때 언약도들의 등장은 교회와 국가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1646년에는 교회의 대표로 선출되어 찰스2세의 왕정 복구 이후 첫 순교자가 되기까지 거쓰리 목사는 스코틀란드의 장벽을 지키려고 사력을 다한 가장 충실한 파숫군이요, 밤낮으로 자기 백성들에게 그들의 죄악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들의 악한 행위들이 어떤 것들인지을 보여준 하나님의 충실한 일군이었다.

 

특히 그는 하나님의 전 경륜을 밝히 증거하면서 눈에 보이는 사람에게가 아니라 몸과 영혼까지도 멸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을 제일로 삼은 말씀 선포자였다. 그는 이스라엘의 죄악이 무엇인지, 야곱의 집의 타락이 어떠한 것인지를 예리하게 지적하고 시온의 영광을 회복하도록 촉구한 선지자였다.

그가 스털링에 왔을 때 그는 그 지역뿐 아니라 스코틀란드 전역에서 백성들의 영적상태를 염려하며 돌아보는 유일한 목자였고 하나님의 진리를 위하여 진두 지휘하는 교회의 커다란 일군이었다. 거쓰리목사는 모든 허물과 불결을 일삼고 참된 교회를 대적하는 자들에게 천적이나 다름 없었다.

 

찰스1세 왕의 처형 이후 민족정신의 발로에 더 힘입은 언약도들과 순수히 영적인 측면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더 충실해야한다는 의견이 나누어지게 되었을 때 거쓰리 목사는 왕정복구를 반대하는 항거자들(Protesters)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리고 온 힘을 다 기울여서 왕정복구를 지지하는 자들의 판단 잘못을 지적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더욱 충실한 언약도들이 되자고 촉구하였다.

 

그의 끈질긴 항거 때문에 1651년 2월 19일 찰스2세 앞에 소환되어 자신의 항거 이유를 소상히 밝혀야 했다. 비록 거쓰리 목사와 그의 동료들은 왕의 신하들이기는 하지만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일군으로써 진리를 선포하지 않을 수 없는 그들의 입장을 단호하게 밝혔다.

왕과 의회는 교회의 문제들을 정확히 판단할 수 있는 입장이 되지 못했고 더군다나 신학적인 요소들은 즉시 답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판단을 몇일 연기하고서 여러 방면으로 회유를 시도했으나 단호한 그들의 태도를 바꿀 수는 없었다. 결국 국가는 그들을 해직시키고 방면하였다. 그러나 거쓰리 목사는 왕의 결정에 순종하지 않고 자신의 입장을 고수하였다. 왕은 추밀원의 힘을 빌리어 다시 한번 항거자들을 추방시킬 계획을 세웠다. 왕을 지지하는 자들은 왕에게 복종하고 무기를 버리면 면책을 해주나 그렇지 않으면 큰 형벌을 가할 것이라고 회유하였다. 따라서 심한 고통과 형벌을 무서워한 일부 항거자들은 미들톤(Middleton)이라는 한 장군과 함께 언약도 정신을 버리고 돌아서기도 했다.

 

그러나 의회는 아직 남아있는 항거자들을 출교시키기로 결의하고 선고 판결문을 제임스 거쓰리 목사에게로 보냈다. 그러나 이 서신은 주일날 강단에 올라갈 순간에 전달되었는데 거쓰리 목사는 예배를 다 마칠 때까지 그 내용을 뜯어보지 않았다. 그에게 주어진 형량은 매우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이 당시에 거쓰리 목사는 여러 통의 편지를 써서 항거자들의 입장을 변명하고 당국이 자신들의 주장을 거절하지 말 것을 다시 호소하게 되었다. 그러나 1657년에 성 앤드류에서 모인 장로교 총회는 다른 동료 두 사람과 함께 거쓰리 목사를 면직시켰다. 이것은 지지자들의 사악함 때문이었다. 그들은 거쓰리 목사를 쫓아내고 스털링 교회에 다른 목사를 파송했으며 신실한 하나님의 일군들에게 돌을 던진 것이다.

 

한편 거쓰리 목사는 항거자들 편에서 지지자들의 오류와 악행을 신랄하게 반격했으나 동시에 그는 일부 분파주의자들에 대해서도 반격을 가했다. 왕정복구가 일어난 후(1661) 얼마 되지 않아서 거쓰리 목사와 그의 동료들은 에딘버러에 모여서 왕에게 보낼 탄원서를 작성하였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체포되었고 그 중 한 명만이 탈출하였으나 나머지는 모두 에딘버러 성에 갇혔다.

 

그리고 곧 거쓰리 목사는 자신의 교구인 스털링으로 옮겨가 판결이 선언될 때까지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리고 법정에 소환되기 전에 사전에 받은 죄목들에 대하여 답변을 준비하도록 강요되었다.

그 항목들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1) 웨스턴 레몬스트런스(Western Remonstrance - 서쪽 지역 주민들의 항의문)라고 불리우는 그의 탄원서를 해명할 것,

(2) '여호와의 진노의 원인들'이라고 불리우는 유인물의 출판 의도를 밝힐 것,

(3) 겸허한 탄원서로 이름하는 유인물을 고안하고 작성하여 베포하게 된 경위를 밝힐 것.

(4) 왕의 군신들을 소집하게 된 경위를 해명할 것,

(5) 왕에게 제출한 항고와 반항문서를 선포하게 된 경위를 밝힐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1650년과 51년에 발설한 반역적인 표현들을 해명할 것 등이었다.

 

 

http://blog.daum.net/parkland/15783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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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거스리

 

포도나무선교회 (2009.3.31)

 

 

권력의 힘이 남용되어 국민의 생존권까지 위협을 받게 되는 뼈아픈 시절에 덕망이 있는 지주의 가문이기는 하나 정치적인 이해득실에 충실했던 부모 밑에서 제임스 거쓰리(James Guthrie) 목사는 태어났다. 잉글란드와 스코틀란드의 왕권이 통합이 된 이후(1603) 국가와 교회를 손에 쥐고 세속권력을 마음껏 휘두르는 세력 앞에서 분연히 일어서 종교와 시민의 자유를 지키려고 몸부림친 스코틀란드의 언약도들의 첫 순교자이기도 한 제임스 거쓰리 목사는 부친의 감독제도의 가르침에 따라서 감독교회(성공회)의 신부가 되기를 원하였었다. 그래서 문법학교를 다니면서 고전어를 습득하였고 그후 성 앤드류 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그의 학문적인 자질은 곧 인정을 받게 되었으며 졸업 후에 본 대학의 철학교수로 봉직하게 되었다. 그가 성 앤드류 대학에서 공부하는 동안 그의 종교적인 확신이 감독제도에서 장로회정치로 바뀌게 되고 결국 장로교 목사가 된 것은 당시 그 대학에서 명성을 떨치면서 스코틀란드의 언약도들에게 큰 지주가 되어준 성자 사무엘 루터포드 목사의 가르침 때문이었다. 결국은 복음에 사로잡힌 목사가 되어 대학교수직을 청산하고 1638년에 Lauder 교구 장로교 목사가 된 것이다. 물론 그는1638년에 있었던 국가언약(The National Covenant)에 서명을 하였으며 그 이후 한번도 언약도 정신을 버린 적이 없는 언약도였다. 1649년에 스털링(Stirling)교구로 임지를 옮긴 후 1662년 순교를 당할 때까지 일생동안 복음사역자로서, 그리고 그리스도의 수장권을 수호하는 일을 위하여 몸부림친 하나님의 거룩한 사도였으며 경건한 목사였다.

 

 

 

찰스1세의 감독주의 제도 하에서 두 나라를 통합시키려는 종교정책 때문에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 삼고 바른 교회 형성을 위해서 몸부림치고 있던 스코틀란드가 혼란에 빠지게 되었을 때 언약도들의 등장은 교회와 국가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1646년에는 교회의 대표로 선출되어 찰스2세의 왕정 복구 이후 첫 순교자가 되기까지 거쓰리 목사는 스코틀란드의 장벽을 지키려고 사력을 다한 가장 충실한 파숫군이요, 밤낮으로 자기 백성들에게 그들의 죄악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들의 악한 행위들이 어떤 것들인지을 보여준 하나님의 충실한 일군이었다. 특히 그는 하나님의 전 경륜을 밝히 증거하면서 눈에 보이는 사람에게가 아니라 몸과 영혼까지도 멸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을 제일로 삼은 말씀 선포자였다. 그는 이스라엘의 죄악이 무엇인지, 야곱의 집의 타락이 어떠한 것인지를 예리하게 지적하고 시온의 영광을 회복하도록 촉구한 선지자였다. 그가 스털링에 왔을 때 그는 그 지역뿐 아니라 스코틀란드 전역에서 백성들의 영적상태를 염려하며 돌아보는 유일한 목자였고 하나님의 진리를 위하여 진두 지휘하는 교회의 커다란 일군이었다. 거쓰리목사는 모든 허물과 불결을 일삼고 참된 교회를 대적하는 자들에게 천적이나 다름 없었다. 찰스1세 왕의 처형 이후 민족정신의 발로에 더 힘입은 언약도들과 순수히 영적인 측면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더 충실해야한다는 의견이 나누어지게 되었을 때 거쓰리 목사는 왕정복구를 반대하는 항거자들(Protesters)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리고 온 힘을 다 기울여서 왕정복구를 지지하는 자들의 판단 잘못을 지적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더욱 충실한 언약도들이 되자고 촉구하였다.

 

 

 

그의 끈질긴 항거 때문에 1651년 2월 19일 찰스2세 앞에 소환되어 자신의 항거 이유를 소상히 밝혀야 했다. 비록 거쓰리 목사와 그의 동료들은 왕의 신하들이기는 하지만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일군으로써 진리를 선포하지 않을 수 없는 그들의 입장을 단호하게 밝혔다. 왕과 의회는 교회의 문제들을 정확히 판단할 수 있는 입장이 되지 못했고 더군다나 신학적인 요소들은 즉시 답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판단을 몇일 연기하고서 여러 방면으로 회유를 시도했으나 단호한 그들의 태도를 바꿀 수는 없었다. 결국 국가는 그들을 해직시키고 방면하였다. 그러나 거쓰리 목사는 왕의 결정에 순종하지 않고 자신의 입장을 고수하였다. 왕은 추밀원의 힘을 빌리어 다시 한번 항거자들을 추방시킬 계획을 세웠다. 왕을 지지하는 자들은 왕에게 복종하고 무기를 버리면 면책을 해주나 그렇지 않으면 큰 형벌을 가할 것이라고 회유하였다. 따라서 심한 고통과 형벌을 무서워한 일부 항거자들은 미들톤(Middleton)이라는 한 장군과 함께 언약도 정신을 버리고 돌아서기도 했다. 그러나 의회는 아직 남아있는 항거자들을 출교시키기로 결의하고 선고 판결문을 제임스 거쓰리 목사에게로 보냈다. 그러나 이 서신은 주일날 강단에 올라갈 순간에 전달되었는데 거쓰리 목사는 예배를 다 마칠 때까지 그 내용을 뜯어보지 않았다. 그에게 주어진 형량은 매우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이 당시에 거쓰리 목사는 여러 통의 편지를 써서 항거자들의 입장을 변명하고 당국이 자신들의 주장을 거절하지 말 것을 다시 호소하게 되었다. 그러나 1657년에 성 앤드류에서 모인 장로교 총회는 다른 동료 두 사람과 함께 거쓰리 목사를 면직시켰다. 이것은 지지자들의 사악함 때문이었다. 그들은 거쓰리 목사를 쫓아내고 스털링 교회에 다른 목사를 파송했으며 신실한 하나님의 일군들에게 돌을 던진 것이 다.

 

 

 

한편 거쓰리 목사는 항거자들 편에서 지지자들의 오류와 악행을 신랄하게 반격했으나 동시에 그는 일부 분파주의자들에 대해서도 반격을 가했다. 왕정복구가 일어난 후(1661) 얼마 되지 않아서 거쓰리 목사와 그의 동료들은 에딘버러에 모여서 왕에게 보낼 탄원서를 작성하였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체포되었고 그 중 한 명만이 탈출하였으나 나머지는 모두 에딘버러 성에 갇혔다. 그리고 곧 거쓰리 목사는 자신의 교구인 스털링으로 옮겨가 판결이 선언될 때까지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리고 법정에 소환되기 전에 사전에 받은 죄목들에 대하여 답변을 준비하도록 강요되었다. 그 항목들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1) 웨스턴 레몬스트런스(Western Remonstrance - 서쪽 지역 주민들의 항의문)라고 불리우는 그의 탄원서를 해명할 것, (2) '여호와의 진노의 원인들'이라고 불리우는 유인물의 출판 의도를 밝힐 것, (3) 겸허한 탄원서로 이름하는 유인물을 고안하고 작성하여 베포하게 된 경위를 밝힐 것. (4) 왕의 군신들을 소집하게 된 경위를 해명할 것, (5) 왕에게 제출한 항고와 반항문서를 선포하게 된 경위를 밝힐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1650년과 51년에 발설한 반역적인 표현들을 해명할 것 등이었다.

 

 

 

거쓰리 목사에 대한 판결문이 읽혀지자 거쓰리 목사는 의회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고 그가 왜 고난을 겪고 있는지에 대한 사유를 소상히 밝혔다. 이 연설은 아주 감동적이었다고 한다. 그 내용을 이곳에 실을 수 없음이 안타깝다. 그의 연설이 끝나자 곧 끌려 나갔고, 겸허히 변호사를 요청하여 의논할 수 있게 허락을 받았다. 그리하여 2월 29일까지 다시 변호하게 될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그를 변호하는 문서 작성은 몇 주간이 소비되었다. 그리하여 4월 11일에 가서야 다시 의회 앞에 출두하게 되었고 여기서도 다시 한번 자신의 입장을 강렬히 선포하였다 :

 

 

 

존경하는 의원 여러분, 먼저 번에도 제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부터 그토록 의미심장하고도 명백한 입장을 겸허히 밝히며 간청하였으나 오늘도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과 인간의 법률 조항에 따라 간청하는 바입니다. 제 자신을 변호함에 있어서 교회와 이 나라의 항상 실천해 온 관습을 따라서 청하나이다. 저는 이미 제 교구에서 추방되었고 내 거처할 곳과 재산마저도 빼앗겼으며, 따라서 저와 가족들이 이제는 다른 사람들의 구호에 의지하여 살게 되었고, 저는 벌써 8개월째 감옥생활을 하나이다. 이제 더 이상 제게 짐을 지워주지 마소서, 저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하며 제 변호를 마치고자 합니다 : "너희는 분명히 알라 너희가 나를 죽이면 정녕히 무죄한 피로 너희 몸과 이 성과 이 성 거민에게로 돌아가게 하리라. 이는 여호와께서 진실로 나를 보내사 이모든 말을 너희에게 이르게 하셨음이라"(렘26:15).

 

 

 

존경하는 여러분! 제 양심은 결코 굴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의 이 낡은 몸둥아리와 죽음을 면치 못할 이 육체는 당신들이바라는 대로 복종하게 될 것입니다.

 

 

제게 죽음을 언도하시든지, 추방시키든지, 감옥에 집어 넣든지,그 어떤 형량이 떨어지든지 결정대로 순복하게 될 것입니다. 오직 제가 간청하옵는 것은 내가 피흘림으로써 얻어질 유익이 무엇인지 심사숙고 하시는 것입니다. 지난 1638년 이래 교회 개혁의 작업과 언약의 불길은 제 목숨하나 없앤다고 해서 결코 사라지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제 피나, 속박, 또는 추방은 제가 살아남거나 자유를 누리며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언약정신, 개혁정신을 확산시키게 될 것입니다.

 

 

물론 거쓰리 목사의 이 증언은 수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 중 일부는 서로에게 이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지 말자고 말할 정도로 그의 말은 깊은 감동을 자아냈다. 트위데일(Tweedale)공작만 추방형을 주장하였고 나머지는 모두 사형선고에 손을 들었다. 그의 사형 집행일은 의회가 5월 28일에 선고하였고, 제임스 거쓰리 목사는 6월 1일 에딘버러 광장에서 교수형에 처해졌고, 그의 잘린 목은 네더 바우(Nether Bow)에 달렸으며, 그의 재산은 몰수되었고, 그의 팔 다리는 찢겨졌다. 그가 이처럼 비참하게 순교를 당한 것은 스코틀란드에 향한 하나님의 진노의 불길을 선포한 것이었고, 왕의 간계를 꽤뚫고 항거하며 진리를 위한 것때문이었다. 사실 그는 수년 동안 스코틀란드 교회와 국가가 붙들어 온 개혁의 원리와 실재인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되고 합당한 삶에 대하여 고귀하게 외친 자였다. 거쓰리 목사는 교수형 언도가 떨어지자 의회 앞에 다가가서 속삭이기를 '의원 여러분이여, 이 형량이 제 자신에게 미치는 것 그 이상으로 당신들에게는 결코 다가오지 않게 하십시요. 저의 피가 왕실 가족의 피를 요청하는 일이 되지 않게 하십시오'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거쓰리 목사는 세상을 떠났다. 그는 죽기 전에 그의 동료들과 친구들에게 여러 통의 편지를 남겼다. 그 내용들은 반역적이고 배교적인 그 시대를 향한 예언적인 소리들이었다. 그는 교수형장에서도약 한시간 가까이 설교를 하였는데 그 원고가 그의 아들에게 남겨져 오늘까지 전해지고 있다. 순교자의 반열에 들어선 거쓰리 목사는 '여기에 있는 여러분 모두에게 한 가지 경고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스코틀란드에게 매우 진노하시고 있으며, 따라서 이곳을 떠나 촛대를 옳기신다는 것입니다. 그의 진노를 불러일으킬 요소들은 아주 많습니다 - 예레미야36장을 생각하십시오. 그 결과는 떨림과 두려움입니다. 진노를 불러들이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첫째로 신성모독의 큰 물결이 스코틀란드 전역에 넘실대고 있고 그로 인하여 기독교의 올바른 활동을 상실케 된 것이며, 심지어 도덕성까지 잃게 된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언약과 뜻이 무엇인지 바르게 세울 수 없는 무서운 불신과 거짓맹세가 횡행한다는 것입니다. 세째로 가공할 말한 배은망덕의 죄 입니다 - 우리는 썩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의 형상으로 바꾸어 버리고 구원의 은총을 사람에게 기대케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또한 정욕적이고, 부패하며, 기회주의자들인 목사에게도 진노하십니다. 저는 스코틀란드 교회 안에 분명히 참된 신실한 목회자들이 있다고 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이들을 존중하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스코틀란드의 국가 언약을 증거하며 세 왕국에 맺어진 '거룩한 협약과 언약'에 충실할 것을 촉구합니다. 이 모든 것들은 어떤 인간이나, 정당, 또는 권세에 의하여 망각될 수 없는 것이며, 여전히 이 나라가 지켜야 할 것들입니다 - 저는 하나님께서 내 영혼에게 이 교수대를 왕궁이나 이 땅에 있는 그 어떠한 찬란한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것임을 기록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저같이 곤고한 자에게 긍휼을 베푸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제게 그의 아들을 계시해 주시고 영원한 복음의 사역자가 되게 하셨으며, 황송하게도 사단과 이 세상의 수많은 충돌이 일어나고 있는 가운데서 저의 사역을 하나님의 백성들의 심령에 인쳐주시고 특별히 스털링의 성도들과 노회 여러분들에게 심겨지게 한 것을 무한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나의 모든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제 영혼을 다하여 그 분을 천거합니다. 오 내 영혼아, 그를 찬양하라.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양하라."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시는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거쓰리 목사는 마지막으로 자기 얼굴에 씌여진 두건을 벗어 던지고 '언약들, 언약들이 여전히 스코틀란드의 부흥이 될 것이다'하고 외쳤다. 그는 국가 만능주의의 횡포에 맞서서 예수 그리스도의 만왕의 왕되심을 위하여 싸우다가 순교한 최초의 언약도였다. 그는 황량했던 그 시절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 자였으며 교회의 개혁을 이루어 가는 일에 있어서 신실한 그리고 열정적인 목사였다. 그는 스코틀란드에서 참된 왕이신 그리스도를 위해서 헌신한 사람이었다. 그가 목회했던 스털링 교회는 후에 그의 조카인 월리암 거쓰리 목사가 목회하였던 언약도의 증거가 물씬 풍기는 곳이며, 거쓰리 목사는 27년 동안 에딘버러 광장 어구에 달려있는 그의 잘린 목을 통해서 살아 있을 때 보다 휠씬 더 많은 사람들에게 죽어서도 그의 영원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증거하였다. 그는 종교와 시민의 자유를 위하여, 그리고 그리스도의 통치를 나타내기 위한 살아있는 진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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