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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학의 독특성과 한국장로교회의 정체성

Sola. 2024. 7. 27. 06:00

 

개혁신학의 독특성과 한국장로교회의 정체성

 

김영규 (안양대학교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겸임교수)

 

 

들어가는 말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적 정체성과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관계하는 총회가 1936년 6월 11일의 미국 정통 장로교회 총회이다. 그 총회는 공식적으로 ‘모든 현대주의’와 ‘불신앙의 다른 형태들’에 대한 반대하고 동시에 신학적으로 ‘신구약의 무오성과 신적 권위‘에 대한 ‘엄격한’ 선언과 함께 ‘인간에게 알려진 성경에 대한 가장 신실한 해석’으로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요리문답들을 채택함으로 ‘장로교 대 전통의 가장 순수한 직접적 선’에 있음을 확인하였다. 그 선언서에서 ‘기독교의 가장 순수한 형태’로 정의된 그 ‘개혁신앙’은 ‘기독교의 일반적 교리’(삼위일체, 창조, 그리스도의 신성,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십자가상에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 죽은 자로부터 부활, 하늘로 승천, 땅으로 영광스러운 재림) 외에 그 ‘지배적인 원리’와 ‘몇 가지 특징적인 교리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먼저 지배적인 원리로서 '하나님의 주권'은 로마서 11장 36절에 근거하여, “이 원리에 따라서 창조로부터 구원에 이르기까지 육체적 혹은 영적, 과거나 현재 및 미래, 땅의 것이나 하늘의 것이나 모든 영역들에서 하나님이 유일한 하나님이시다. 만물이 하나님 안에서 그 원천을 찾고 만물이 하나님에 의해서 작정되어 있으며 만물이 하나님 자신의 기뻐하심과 영광을 위해서 작정되어 있다”는 내용으로 표현되어 있다. 또한 개혁신앙의 특징적인 교리는 도르트회의 결정에 의해서 표현한 ‘칼빈의 5 대 교리요점들(인간의 전적부패, 무조건적 선택, 제한속죄, 유효적 은혜, 영원한 보증)’에서 ‘가장 신실히 일치한다(most sincerely agrees)’고 표현되어 있다. 이런 정통장로교회의 신학적 정체성이 한국교회의 보수적 장로교회의 정체성과 그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문제는 그런 정체성이 역사적으로 확립된 것이 미국 장로교회가 ‘점진적인 그러나 지속적인 몰락’의 길을 걷다가 몰락의 ‘절정’에 도달한 그 시점에서 생긴 것이라는 점이다. 즉 그런 미국정통장로교회의 정체성도 몰락할 수 있는 최소한 신학적 한계선을 의미할 뿐 지금 한국장로교회의 정체성에 대한 모범을 의미하지 않는다.

 

 

 

1. 저항의 개념으로서 오직성경과 해석원리

 

개혁주의는 항상 개혁하기 전에 이미 개혁된 신학이다. 종교개혁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교부들의 훌륭한 글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잘못 설명하거나 혹은 왜곡시켜 황금에서 쓰레기를 모으고 지혜와 판단력과 정신력을 총동원하여 교부들의 결함과 오류들만을 숭배하고 있다고 칼빈이 비판하였을 때, 그의 비판의 핵심은 그런 거룩한 교부들의 합의요 가장 오래된 관례인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하고 있다고 점에 있었다. 즉 사탄이 오랫동안 빈둥거리면서 깊은 휴식을 즐기고 있었다가 어느 정도 그의 흑암을 쫓아내었을 때 오랜 잠에서 깨어나 무기를 들기 시작한 것이 바로 동터오는 진리를 폭력으로 눌러 버리는 일만을 한 것이 아니라, 재세례파들과 괴상한 악한들을 통해서 불일치와 교리적 논쟁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진리를 희석시키고 마침내 말살하는 일을 행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런 사탄과 인간의 모든 훼방에도 성경 자체의 힘으로 그것을 보존한다는 것이 칼빈의 저항의 개념이었다. 따라서 참된 교회가 지상에 존재한다는 표지는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고 성례가 바르게 시행되는 것에 있었다.

 

칼빈은 오직 성경을 가지고 그 성경과 함께 오직 성경에 의해서 생각하고 말하는 자로서 홀로 서 있었다. 역사적으로 핍박받았던 장로교인들도 추밀고문관들이 자신들에게 혁명의 죄목을 씌울 때, 혁명에 반대하면서, 복음을 듣는 것이 혁명이라고 증언하면서 홀로 서 있었다. 물론 이런 저항정신은 루터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진리를 버리고 진리 때문에 친구들도 자신을 버리고 가족들도 자신을 버리며 가까운 신앙의 동지들도 자신을 버려 이제 진리 때문에 홀로 서 있고 하나님만이 그 증인으로 있다고 생각하면서 루터가 저항하고 있었을 때, 그는 종종 성경과 더불어 아직도 이성 혹은 양심으로 홀로 서 있었고 개혁신학자들과 다른 해석원리에 의해서 홀로 서 있었다. 루터주의와 개혁주의와의 그런 차이는 1529년 말부르그 대화에서 그들 사이의 구별된 독특성과 근본적 일치점들이 처음 드러나 정리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근본적 일치점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니케아 신조와 칼케톤 신조에 대한 공통된 고백, 죄 없이 성령의 역사에 의한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원죄와 전적타락,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속죄와 죄와 영원한 죽음으로부터 구속, 행위나 공로에 의하지 않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에 의한 우리의 구속, 하나님의 선물로서 구속적 믿음, 복음과 말씀의 선포 시 성령께서 주신 선물로서 믿음, 모든 행위와 공로 없이 믿음에 의한 하나님 앞에 의롭고 거룩히 여김을 받음, 같은 믿음에 의한 죄와 죽음, 지옥으로부터 도움, 우리가 믿는 그 성자로 인한 은혜와 축복 받음, 믿음에 의한 그 성자의 의와 생명과 모든 선한 것들에의 참여, 성례로서 세례와 성만찬, 믿음에 의한 성령의 역사로 인하 선행들, 모든 관원과 세속법, 법정과 규례들에 대한 순종, 유아세례의 시행1) 등이다. 이런 신학적 내용들은 루터주의를 포함한 신교의 양보할 수 없는 기본적 신앙고백의 내용들로서 공인된 것들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이 대화에서 루터주의와 구별된 개혁신학의 성경구절들에 대한 해석원리(locus ipse per se satis clarus esse + modus tractandi scripturas per locorum collationem)와 기독론(Quanvis totus Christus ubique sit, non tamen quod in eo est, ubique esse)이 있게 되었다. 즉 그 구별점에 있어서 칼빈은 쯔빙글리와 오클람파디우스 편에 참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개혁신학의 노선이 생기게 된 것이다.

 

 

 

2.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 뿐만 아니라 창조와 섭리, 구원의 모든 역사의 유일한 주체는 분리할 수 없이 유일한 하나님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서

 

크리소스토무스 이래2) 신구약의 실체의 통일성인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같은 저자의 통일성은 물론 하나님의 모든 교리의 통일성을 의미하였다. 이런 통일성이 종교개혁시대에 부쪄의 로마서 주석과 칼빈의 『기독교 강요』(1539년판 이래) 및 갈라디아서 주석과 예레미야 주석에서 확증되었다. 이미 1536년판 기독교 강요에서부터 창조를 포함한 모든 사역이 세 위격들의 공통된 사역이지만, 하나님 한 본질 안에 세 독특성들을 강조하였고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성자 안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역사하신다는 표현과 같이 각 위격들의 고유한 사역들에 좀 더 강조가 있었다. 그러나 그런 고유성도 위격의 질서 안에서(in personis odinem) 질서의 근거에 있어서(ratio ordinis) 그렇다는 것이고 각 위격들은 분리가 아닌 구별(distinctionem non divisionem)3)로만 이해할 것을 강조하였다. 후대 개혁신학자들에게 영향을 주는 이런 신구약의 통일성은 단순히 기독론적인 통일성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경륜적 통일성을 의미하되, 더 좋게 삼위일체 하나님이 매 경륜마다 분리될 수 없이 역사하신다는 의미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동시 통일적 경륜이라고 해석한다.

 

이런 칼빈주의 삼위일체의 전통이 가장 먼저 잘 반영된 고백서가 1562년 헝가리의 에어라우탈 신앙고백서 혹은 드브레카 교회고백(Confessio ecclesiae debreciensis, de praecipuis articulis et quaestinibus quibusdam necessariis ad consulendum turbatis conscientiis exhibita, ...... ut Debreczin 1562)이다.4) 오래 전 어거스틴에 의해서 완성된 그런 신구약 통일성에 따라 성경을 해석하지 못해서 생긴 논쟁의 좋은 예가 오순절에 관한 논쟁이다. 그 논쟁은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에서 증거된 대로 성령이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 하시더라는 말씀(요 7:39)을 전에는 오순절 성령 부어주심과 같이 그런 식으로(talis) 없었다는 해석으로 종결될 문제이었다. 그러나 더 심각한 것은 계몽주의 시대이래 성경비판의 역사를 통해서 마르시온 이단과 영지주의 이단들이 그 승리를 얻었다는 점이다. 그 승리의 신학이 현대신학의 객관성이 되어버린 상태이다. 신구약의 교리적 통일성에 대한 교리사적인 이해의 부족이 신학일반의 존립에 위협하고 있고 개혁교회뿐만 아니라 모든 교회의 파괴로 이어지게 하고 있다.

 

 

 

3. 교회의 통일성, 구원의 성취와 그 서정의 뿌리를 하나님에게만 알려진 영원한 예정론에 대해서

 

칼빈은 기독교 강요 초판(1536년)부터 ‘털끝만치라도 행위에 공로를 돌린다면, 그는 성경 전체를 왜곡시키고 변질시키는 것이요 공로라는 말을 사용하는 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모욕하는 자’5)라고 강하게 비판하였다. 그래서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 주님의 의라고 한 것은 그것에 의해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은혜로 이미 의롭다 하신 자기 백성을 연단하여 의에 이르게 하신다고 해석해야 할 것6)을 강조하였고,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갚으신다는 성경의 표현들이 있지만, 그 표현은 우리 행위가 그런 보상의 원인이 된다는 말이 아니(ne ....... opera a nostra huius retributionis causam esse)7)라고 하였다. 우리에게 지상에서나 내세에 있어서 상이 있다면 이미 받은 은사에 덤으로 준 앞선 은혜에 뒤따르는 은혜로서의 상에 불과하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칼빈에 의하면 구원의 가까운 원인과 먼 원인을 구분하여 영원한 예정과 죄의 원인은 그런 원인들의 최고의 그리고 가장 최상의 균형적 조화가 있다고 하였다. 즉 피조물들의 자유의지가 무시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목적과 방식에 다른 차원에서 역사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만 감추어진 먼 원인에 따라서 하나님의 부르심은 선택의 증거요 그 영광은 선택의 완성이며 칭의도 선택을 나타내는 한 표현에 불과하며 하나님의 계속되는 은혜가 있다면 그것은 선택의 열매이며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무슨 덕이든 선택의 결과라고 진술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긍휼에 종속적이고 그것 없이 이룰 수 없는 그리스도의 공로조차도 그 공로의 시초가 그에게 있지 않고 제일원인인 하나님의 결정으로 돌아가며 예정과 은혜의 가장 밝은 빛은 인간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시오 중보자8) 자신이 현저한 예정의 예라고 하였다. 칼빈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의 깊이는 여기에 있다. 그것을 넘어 성경 자체가 그런 개혁신학의 최대의 지지자이다.

 

1) 구원의 근원은 인간의 의지나 행보 이전에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의지에 최종 원인이 있다(롬 9:16). 2) 긍휼을 입은 자와 강팍케 되는 자는 하나님의 한 의지의 두 대상이다(롬 9:18). 3) 선택은 선악을 행하기 전에 이루어진다(타락전 선택설, 롬 9:11). 4) 사망과 생명(신 30:15, 19;롬 8:38), 환난과 곤고(롬 8:35), 악까지도(신 30:15; 사 45:7) 하나님의 역사의 수단들에 불과하다면,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인 택자는 그 수단들보다 앞선다(롬 8:31-39). 5) 만세전의 예정의 내용으로서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과 동일 형상들’은 구원의 서정이 그 내용이다(롬 8:29-30). 6) 만물의 역사의 원인은 하나님의 뜻의 의논인 반면, 택자의 예정은 만물을 그의 뜻의 의논에 따라 역사하시는 자의 작정에 따른 것이다(엡 1:11).

 

 

 

4. 하나님 자신을 지극히 높고 마지막 상급으로 믿는 은혜언약의 핵심사상과 구체적인 삶의 원리에 대해서

 

칼빈이 기독교 강요 1536년판에서 쯔빙글리의 최고선(summum bonum)의 개념처럼 오직 하나님 자신이 무한한 지혜와 의, 선과 긍휼, 진리와 생명이라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전 삶이 하나의 예배로서 하나님에 대해서 굶주리고 배고픈 자가 그로부터 은혜를 받아 그 받은 은혜를 다시 그 원천의 영광으로 돌려보낸다는 의미에서, 복된 삶의 궁극적 목적도 하나님을 아는데 두고 처음과 끝을 여호와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즐거워하는 원리는 개혁주의의 삶의 중요한 유산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는 그의 백성이 된다는 것이 아브라함과 맺으신 은혜언약의 내용이고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역사의 중심내용이라면, 그 핵심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 최고의 지혜와 선과 진리와 지극히 높은 상급이 된다(창 15:1)는 점에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성취되고 성령에 의해서 확증과 보증이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은혜언약의 그 핵심내용이 하나님의 나라의 현재와 미래의 중심기둥이 된 셈이다. 그렇다면 삶의 중심이나 요구도 우리가 받은 은사나 은혜에 있어서는 아니 되고, 하나님 자신이 최고의 선으로서, 그리고 역시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들과의 관계가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진정한 선물이시라는 사상에 두어야 한다. 이 세상에서는 곤비한 자들이요 가난한 자들이지만, 최고 상급으로서 하나님 자신의 긍휼에 피난처로 삼고 행보하는 일만큼 인류의 참된 행복으로 남아 있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맺는 말

 

우리가 상기의 개혁 교회상을 다시 강조할 때, 인간을 죽고 사라져도 진리만은 남도록 해야 한다. 마귀의 역사는 우리에게서 진리를 빼앗으면 되고 어떤 방법이든 상관하지 않는다. 빼았은 순간에 그의 일은 다 끝났다. 힘과 폭력이 그의 주된 무기가 아니라 가장과 망각과 무지가 그의 더 큰 무기이다. 그는 진리를 먼저 삶에서 빼앗아 가고 진리를 포기하도록 양심을 설득한다. 21세기를 위해서 교회가 새롭게 준비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발견될 수 있고 개혁신앙이 지금까지 싸워온 같은 가르침들에 더 확고히 서는 것이 그 준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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