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는 목사를 거느릴 수 없다
장대선 목사 (2020.5.15)
동서양을 막론하고 ‘종사제도’(Gefolgschaft)라는 개념은 인간적인 권세를 나타내 보이는 필수적인 개념일 것이다. 즉 종사는 자신의 주군에게 충성을 다하고, 주군은 자신이 거느린 종사에게 무기·식량 혹은 토지 따위를 주어 살아가도록 하는 주종관계가 분명한 봉건제도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뚜렷한 것이다. 일본의 봉건시대 무사이자 ‘로닌’(낭인)인 ‘사무라이’, 그리고 중세 유럽의 ‘기사’(knight)가 영주들을 대하는 모습 가운데서 그 면면을 여실히 살펴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종사제도의 개념을 종교 가운데서 가장 여실히 살펴볼 수 있는 곳이 바로 로마 가톨릭교회다. 즉 상하의 위계관계가 분명할 뿐 아니라, 무엇보다 종속관계가 분명한 로마 가톨릭교회의 사제(priest)제도야말로 종사제도에 가까운 철저한 상명하복의 구조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마치 중세 봉건사회에서 봉신인 기사나 로닌들에게 주군인 영주가 무기나 식량, 혹은 봉토를 제공하는 대신에 주군에 대한 충성과 복종을 요구했던 것과 동일하게, 고위성직자들은 하위성직자들에게 성직록(beneficium)을 수여하면서 또한 종교적 의무(officium)들을 요구-그러나 거의 강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사람을 거느려서 그 위세와 권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습성은,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인 것이라 하겠다.
사실 그 구조로만 보자면 예수께서도 얼핏 그의 제자들에게 주군으로 군림하셨던 것처럼 보일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마 8:8-9절에서 한 백부장이 주님에 대하여 이른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라고 하여, 그 시대뿐 아니라 그 시대의 예수께서도 당연히 주군으로 존재하시는 분이신 것을 인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니 말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모으신 제자들은 그가 거느린 자들이 아니라 택정된 일꾼들이었다. 더구나 예수께서는 주군으로서 제자들에게 제공할만한 실질적인 것이 없었으니, 심지어 그를 따르고자 하는 한 서기관에게 예수께서는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 8:20)고 하셨다. 그에게는 무기나 식량이나 봉토 따위를 하사하고 제자들을 거느릴만한 아무런 사회적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하지만 예수께서는 또한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라고 말하는 제자 중에 어떤 한 사람에게 이르시기를,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마 8:22)고 하시는 분이시기도 하다. 어지간한 주군도 요구하기 힘든 요구를 요구하시기도 하시는 분이 바로 예수이신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따른 자들과 예수님과의 관계는 어떠한 관계였을까? 종주권을 행사하지 않으면서도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는 그의 당당함은 무엇에 근거하는 것일까? 이에 관해서는 요 10:26절로 27절에서 이르신 주님의 말씀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즉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는 말씀 가운데서 알 수 있듯이, 예수께서는 주군이 아니라 ‘목자’(shepherd)로서 택하신 자들을 모으셨던 것이다. 더구나 이어지는 29절에서 예수께서는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라고 말씀하시어서, 그들의 인도함이 예수를 주군처럼 모시기로 한 제자들의 결심에 따른 주종관계로서가 아니라 성부 하나님의 택하심 가운데 있는 영원한 작정의 시행임을 분명히 밝히셨다. 그리고는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시어서, 그리스도와 제자들-나중에 사도가 되는 열두 제자들 외에도 제자로서 따르는 수많은 자들이 있었다-의 관계가 어떠한 것인지를 분명하게 직시하도록 한다. 그런즉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마 8:22절에서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은, 무기나 식량 혹은 봉토를 제공할 수 있는 주군의 권세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택하심 가운데서 요구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부패한 육신의 본성을 지닌 우리들이 살아가는 현실에서는 굳이 로마 가톨릭교회가 아니라도, 심지어 장로교회에서조차 얼마든지 사무라이와도 같은 봉신들을 거느린 주군인 목사들을 볼 수가 있다. 마치 다윗이 대상 11:17절에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누가 나로 마시게 할꼬”라고 말하자 “삼십 우두머리 중 세 사람”이 마치 주군의 의중을 파악한 듯이 위험을 무릅쓰고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돌파하여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길어왔던 것처럼, 자신의 의중을 따라서 움직이고 행하는 부목사나 제자들을 거느리고자 하는 목사와 교수들을 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대상 11:18절에서 다윗은 그처럼 용맹하게 자신의 갈망하는 바를 따라 적진을 돌파한 세 용사들이 떠온 우물물을 “마시기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드렸다고 했고, 또한 19절에서는 더욱 이르기를 “내 하나님이여 내가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생명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갔던 이 사람들의 피를 어찌 마시리이까 하고 그들이 자기 생명도 돌보지 아니하고 이것을 가져왔으므로 그것을 마시기를 원하지 아니하니라”고 말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 한마디로 사사로운 자신의 뜻과 안위를 위하여서까지 목숨을 바치려는 세 용사들의 용맹함과 충성과는 별도로, 그런 충성과 용맹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 쏟음이 마땅함을 고백한 것이다. 그런즉 동등한 사역자로서의 목사들로 어찌 부목사를 자신의 수하처럼 부림이 타당한 일이며, 마치 성직록을 베풀듯이 여러 실질적인 도움을 제공하고서 자신에게 종속하는 패거리를 거느림이 합당한 일이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목회현장에서는 대형교회의 부목사로 오래도록 섬기면서 담임목사에게 충성을 다하면 적어도 중형교회 정도의 목회지에 추천을 받거나 든든한 밑천을 제공받으며 개척이라도 할 수가 있는 것이 분명한 현실이니, 그러한 의도로 도움을 주고 또한 도움을 받는 종사제도적인 인식에 젖어있는 목회세계에 “네 손이 선을 베풀 힘이 있거든 마땅히 받을 자에게 베풀기를 아까지 말며 네게 있거든 이웃에게 이르기를 갔다가 다시 오라 내일 주겠노라 하지 말”라고 한 잠 3:27절로 28절의 말씀은 중요하면서도 시의적절한 지혜를 전수하고 있다. 목사에게 다른 목사들은 이웃보다 더욱 중한 동역자이자이며, 그런 동역자에게 제공하는 도움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직록과 같이 주종관계로 종속하게 하는 수단이 아니라 마땅히 베풀어야 할 선한 행실일 뿐임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온갖 정치적 역학관계와 이해관계 가운데서 도움과 후원을 팔고 사며, 선을 베풀 힘이 있으면 그것을 사용하여 자기 사람들을 거느리려고 하는 주군과 같은 자가 되려는 것은, 솔로몬의 지혜와 다윗의 순전한 고백들을 거스르는 죄악 된 욕구에 충실한 부패한 본성의 발로임에 분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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