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도가 강복선언 보다 더 올바름
Sola (2019.2.28)
축도 용어가 강복선언보다 더 정확하고 올바릅니다.
강복선언은 축도의 요소중 하나인 '기도'를 뺀 오히려 좀 더 부족한 용어로, 정통신학을 따르는 장로교에서는 축도라는 용어를 사용해왔고 사용하고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글을 참고하시고 축도와 관련한 것중 하나로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1645년) '설교 후 기도에 대하여'에서 축도의 사용 부분을 소개합니다.
<설교 후 기도에 대하여>
.....(생략) 목사는 엄숙한 축도로 회중을 해산할 것이다.
<주의 날을 거룩하게 하는데 데하여>
'모든 사람은 시간을 맞추어 공중 예배에 참석하여 온 회중이 시작할 때부터 출석하여 엄숙하게 마음을 다하여 예배의 모든 부분을 행해 나가고 축도를 마칠 때까지는 먼저 나가지 말아야 한다. '
<공적 감사일을 지키는 데 대하여>
'그리고 그 후에 긍휼에 맞는 다른 시편을 노래한 후 회중을 축도로 해산시켜서 저희로 먹고 쉴 편리한 시간을 갖게 할 것이다.'
과거 칼빈이 목회하던 제네바 교회의 예배순서에도 아론의 축복으로 축도를 하는 순서가 있는데 그것을 칼빈이 선언적 의미로만 한 것이 아닌 기도적 의미로 했음을 그의 주석에서 밝히 보여주기도 합니다. 이 논의와 관련해 한 목사님의 과거 글중 관련 부분을 발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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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유식 목사
축도에 대해서 있었던 많은 논의를 통해서 저또한 많은 유익을 얻었습니다. 이왕에 축도에대한 논의가 있었으니 축도에 대해서 조금 더 소개하고자 합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작성당시 축도에 관한 논쟁은 일반예배 후에 축도를 해야 하는지, 아니면 일반예배 후, 그리고 성찬예배 후에 해야하는지에 대한 문제였다고합니다.(이후 단락 끝까지 「웨스트민스터예배모범」, 토마스 래쉬만, 정장복 역)을 참조했습니다).
그러니까 축도의 의미에 대해서는 모두가 통일되는 견해를 가진 것으로 보입니다. 즉 축도는 목사가 하나님의 복을 선언하는 강복선언이라는 견해의 일치입니다. 그것을 예배모범을 작성하는 소위원회 위원이었던 헐(Herle)의 다음과 같은 말을 통해서 확인하게 됩니다. “강복은(정장복 교수님은 강복이라고 번역했는데 원래 영어표현이 어떤 표현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기도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대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기도가 아니라면 그것은 어떤 약속에 의하여 전달하는 것인데, 그것은 목회의 전달 행위일 수밖에 없다.” 또 이어서 책의 저자인 레쉬만은 설명하기를 아직 안수 받지 않은 목회 지망생들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라는 문구를 사용하는 것을 축도가 아닌 기도로 생각하였으므로 목사들처럼 손을 들지 않았다라는 설명을 덧붙입니다.
이상에서 볼 때 분명한 것은 축도는 예배 중에 행해지던 기도와 구별되고, 또 목사가 아닌 자들이 행하는 기도와 구별되는 목사의 특별한 강복선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축도는 강복선언이라는 의미에 대해서 한번 더 생각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축도는 강복선언이라고 할 때 축도에는 기도의 요소가 전혀 없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통장로교 안에서는 축도를 이해할 때 두가지 요소, 즉 기도의 요소와 강복선언의 요소를 동시에 이해했습니다.
J. A. 핫지는 「정치문답조례」에서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178문 축복기도는 누가 할 수 있느냐? 축복기도란 하나님의 의 백성에 대하여 예수의 이름으로 권세 있게 복을 비는 것이니, 목사가 할 것이요, 강도사나 장로 등 다른 직원은 하지 아니하는 것이 합당하다. 이 기도는 두 가지 뜻을 가지는데, 얼마는 기도하는 것과 얼마는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것이다”
박형룡 목사님도 「교의학 교회론」에서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습니다.
“7)축도 축복기도는 하나님의 백성에 대해서 삼위일체의 명의로 권세있게 복을 비는 것이니 장립된 목사가 할 수 있고, 장로나 강도사는 할 수 없다. 이 기도에 두 가지의 뜻이 있으니 (1)기도함이요 (2)옛날선지자가 말한 바와같이 하나님의 뜻을 광포함이다. 목사가 축복기도하는 것은 모든 교파의 관례요, 장로회 교회정치에도 그러하니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폐회기도는 하게 할 수 있으나 축보기도는 하게 할 수 없다(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 1장5조, 7장5조, 교회정치 12장 8조, 15장14,15조).
박윤선 목사님도 「헌법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습니다.
“11.축복기도, 혹은 축도(고후13:13) 축복기도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는 권위있는 기도인 두가지 요소를 포함한다. 이 두가지는 기도의 요소와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선포하는 것이다.“
이상의 해석들로 볼 때 축도를 기도가 아니고, 강복선언이라고 한 의도는 목사외의 다른 사람이 행할 수 있는 기도와 구별하기 위해서, 예배 중에 시행되는 다른 기도와 구별하기 위한 의도였기에,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은 축도를 거리낌없이 축복기도로도 번역한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축도를 강복선언으로 번역하던, 축복기도로 번역하던 전통적으로 이해되어온 두 요소즉, 기도와 강복선언의 요소를 잃지 않도록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므로 축도를 행하는 목사는 자신이 하나님에 의해서 부름받은 자라는 분명한 소명의식을 가지고 하나님께 간구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하여 선언하신 약속의 복을 명확하게 선언하는 마음으로 축도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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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라는 것은 예배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입니다. 초대교회 때도, 종교개혁 때도, 그 이후 모든 교회에서 지금까지 축도는 예배의 핵심요소로 인정되어 왔고 시행되었습니다.
이렇게 예배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서 여겨지고 시행되어 온 것은 축도가 성경이 증거하는 바요 또 그렇게 반드시 따라야할 하나님의 뜻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 예배모범을 작성할 때 “목사는 엄숙한 축도로 회중을 해산할 것”을 명백히 기록하였고,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이 신구약 성경을 밝히 해석한 책으로 믿고 따르겠다고 헌법에 명시한 우리나라의 장로교단들도 역시 웨스트민스터총회의 예배모범을 따라서 각 교단의 예배모범에 축도로 예배를 마칠 것을 명백히 기록하였습니다. 그리고 목사를 세울 때 목사로 하여금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에 대한 신종(信從)을 맹세하게 하고 교단의 신앙고백과 정치와 예배의 질서를 따라 목사의 직무로서 축도를 행하게 하였습니다.
이와같이 축도는 성경해석과 연관되어 있고, 초대교회 때부터 이어져온 전통과 연관되어 있고, 종교개혁과, 또 그 후손들인 우리들의 정체성과도 연관되어 있고, 목사로 세움 받을 때 행한 맹세와도 연관되어 있고, 거룩하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그 예배를 드리는 모든 성도들과 개 교회와 교단과도 연관되어 있고 무엇보다도 하나님과도 연관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축도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은 매우 중대한 일입니다.
성경적으로, 역사적으로, 공교회적으로 이해되어져왔던 축도의 기도의 부분을 부정하고 잘못된 것이라 언급하고 한 면만을 옳다라고 적시하고 주장하는 것은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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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xx 목사님 귀한 질문해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축도에 대해서 질문해주셨는데 이전의 글들을 통해서 충분히 설명이 되었었지만 다시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일을 신학적인 문제는 아니라고 판단하셨는데 이는 아주 중요한 신학적인 문제임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중략)
한결같이 ‘장로교 안에서 축도는 항상 기도와 선언의 요소가 있음을 받아들였다’는 것을 주장했다는 사실입니다. (중략) 본 글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일반적으로 축도에 사용되는 민수기 6:22-27 과 고린도후서 13:13절의 주석을 소개하고자합니다.
먼저 칼빈은 민수기 6장의 축도를 제2계명에서 다룹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이 정하신 법대로 행해지는 예배가 바른 예배이고, 그 예배를 구약 시대에 하나님이 정하신 제사장들이 주관하기 때문에 제사장에 대해서 2계명에서 다루면서 제사장의 의무로서 민수기 6장도 설명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칼빈이 축도에 대한 설명을 이해하고자할때는 제사장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임을 먼저 이해해야합니다. 즉 선지자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고 백성을 위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제사장에게 축도의 명령이 주어진 것임을 전제해야합니다.
칼빈은 이 축도가 일반 기도와는 분명히 다른 것을 언급합니다. 다음은 민수기 6장의 축도부분에 대한 칼빈의 주석입니다.
“축복하다는 단어는 종종 축복를 내려 주십사하고 기도한다는 의미로 사용되는데 이것은 모든 신앙인들의 의무이다. 그러나 (곧 이어서 알수있듯이) 이 의식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효과적인 증거였는데 그것은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직접 축복하라는 명령을 받았다는 이야기나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칼빈이 축도에 기도의 요소가 없다고는 말한 것은 아닙니다. 칼빈은 이어서 다음과 같이 더 설명합니다.
“... 그러나 여기서 주목을 요구하는 점은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로 축도를 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지 아리송한 귓소리로 기도를 올리라는 명령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즉 칼빈은 축도를 기도와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일반인들이 행하는 기도와는 다르지만 제사장이 하는 축도는 기도와 선언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매튜 헨리는 이렇게 주석하고있습니다.
“Ⅰ. 제사장들에게 해야 할 일이 많았지만 "여호와의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축복을 하는 엄숙한 일이 맡겨져 있다" (23절). 그것은 그들의 직분이었다(신 21:5). 이리하여 하나님은 제사장에게 영예를 주었다. ... 하나님은 제사장들을 그 백성들에게 말하는 하나님의 입의 대언자로 보시는 것이다. 제사장 자신은 복을 내릴 수 없지만, 그의 직무상 복을 중재할 수 있고, 복을 주라고 명하신 그분의 이름으로 복을 빌 수 있으며, 손을 들고 권위 있게 사람들에게 얼굴을 향하여 축복을 기원할 수 있다. ...
그것은 복음의 사역자들. 회중의 사역자들에게 한 모범이 된다. 이들은 자기들의 회중을 떠나 보낼 때 축복의 기도를 하게 된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하고 가르치고 명령하는 바로 그 입이 그들을 축복하는 그 입이다. 율법을 준행하는 자가 축복도 받을 것이다. 히브리 학자들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경고했다. 즉 "복을 주는 것은 제사장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께 달려 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 그러므로 이 가엾은 제사장의 축복 기도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라는 말을 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카일 델리취 주석에는 이렇게 기록되었습니다.
“이스라엘 회중의 영적 특성은 백성을 위하여 제사장들이 빌 복에서 그 절정에 달하였다. ...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그의 복을 베푸셨을 뿐 아니라 이 복을 빌 권을 제사장들의 손에 두신 사실로써 이스라엘 백성이 최초로 참 여호와의 회중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제사장들을 그의 은혜의 복들을 계속적으로 전달할 중재자로 택하시고 그들에게 백성을 위하여 복을 비는 일을 그들의 공식적인 직무의 일부로 위임하셨다. ... 하지만 이 축도는 단순히 한 경건한 기원으로만 남아있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서 받은 축도권을 가지고 백성들에게 선포해야했다.”
이상에서 보듯이 민수기 6장의 주석에서 기도의 요소와 선언의 요소가 함께 언급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후13:13절의 주석도 마찬가지입니다.
칼빈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기도로 이 서신을 끝맺고 있는데, 기도에는 우리의 구원 전부를 포함하는 세 부분으로 되어있다. 그는 그들을 위해서 먼저 그리스도의 은혜를, 둘째로 하나님의 사랑을, 셋째로 성령의 교제를 바라고 있다. ”
핸드릭슨 주석에는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이 구절은 이 편지를 끝맺는 포괄적인 축도이다. ... 사도가 그의 편지를 받는 모든 신앙인들을 위하여 비는 것은, 신.인 양성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그의 과분한 사랑과 그것으로 인해 오는 모든 은사이다. ... 기도의 대상이 되는 성자와 성부와 성령의 독특한 인격과 신성이 여기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이상의 주석들과 교의학, 헌법주석을 통해서 확인하게 되는 것은 축도로 사용되는 본문에는 기도의 요소와 선언의 요소가 동시에 있다 라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받는 모든 장로교회에서는 이러한 주석과 같이 축도에는 기도의 요소와 선언의 요소가 있음을 인정하며 축도를 행해왔습니다. (중략)
그래서 축도에 대해서 말할 때 “기도는 아니다 강복선언이다”라고 말해서는 안 되고, 기도와 강복선언의 요소를 동시에 인정해야한다는 것을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축도할 때 “... 찌어다” 나 “...하기를 축원하옵나이다” 로도 마무리 할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이부분은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중략)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는 것은 축도에 관한 논쟁은 절대적으로 신학적인 문제입니다. 그것은 이전 글들에서 밝혔듯이 성경해석과 연관된 문제이며, 종교개혁의 전통과 연관된 문제이며, 장로교회의 헌법과 헌법에서 규정하는 목사의 직무와 연관된 아주 중요한 문제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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