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수는 마력이 아니다
변종길 / 고려신학대학원 교수
요즈음 안수 문제로 논란이 심하다. 어떤 교회에서는 안찰 기도로 사람이 죽는 경우까지 발생했다고 한다. 그래서 안수, 안찰의 부작용이 부각되면서 몇 년 전 총회에서 허용된 안수를 다시 금지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문제에 대해 감정적으로 대응하기보다 성경적으로, 신학적으로 무엇이 옳은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성경에 나타난 안수
먼저 구약 성경에 보면 안수는 여러 경우에 사용되었다. 먼저 야곱이 자녀를 축복할 때 자녀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창 48:14). 그리고 제사장이 희생 제물을 바칠 때 짐승의 머리에 안수하였다(출 29:10, 레 1:4).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고 저주한 사람을 돌로 쳐서 죽일 때에는 먼저 그 말을 들은 자들이 그의 머리에 안수하였다(레 24:14). 그리고 레위인을 정결케 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게 할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레위인에게 안수하였다(민 8:10). 여호수아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울 때 모세가 그에게 안수하였다(민 27:18-23).
예수님은 병자를 고치실 때 안수를 많이 하셨다(마 8:15, 막 1:41, 8:23, 25, 눅 4:40 등). 그러나 손을 대시지 않고 그냥 말씀으로 고치실 때도 많았다(마 8:13, 9:6, 12:13, 15:28, 17:18 등). 그리고 어린아이들을 축복하실 때에 아이들을 안고 안수하시고 축복하셨다(마 19:13-15, 막 10:16). 하지만 사도들을 세우실 때 예수님이 안수하셨다는 기록을 우리는 발견할 수 없다. 단지 말씀으로 그들을 세우셨으며 아무런 의식이 없었다(마 10:1, 막 3:13-15, 눅 6:12,13). 초대 교회에서 맛디아와 바울과 바나바와 실라를 세울 때에도 안수했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일곱 사람을 세울 때에는 사도들이 기도하고 안수하였다(행 6:6). 그리고 사마리아의 사람들이 ‘성령’ 받을 때에 사도들이 기도하고 안수하였다(행 8:17). 에베소의 어떤 제자들도 바울이 안수할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였다(행 19:6). 디모데는 ‘장로의 회’에서 안수받았으며, 그 때 예언으로 말미암아 은사를 받았다(딤전 4:14; 딤후 1:6 참조). 그리고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라”고 당부했다(딤전 5:22). 이것을 보면 초대 교회에서 어떤 사람을 직분자로 세울 때 안수가 일반적 관행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안수 그 자체가 영적인 은사를 전달하는 것은 아니었다. 사도행전 6장 3절에 보면 초대 교회의 일곱 사람들은 안수받기 전에 이미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였다. 사도행전 13장 3절에 보면 이미 직분자로 봉사하고 있는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워서 금식 기도하고 안수하여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디모데전서 4장 14절에 의하면 예언과 안수는 은사의 ‘기원’이 아니라 ‘통로’였다. 즉, 안수 자체가 은사를 가져다주는 원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사를 주시는 하나의 수단, 통로가 되었다는 말이다.
교회사적으로 살펴본 안수
이러한 사도들의 안수 관례는 고대 교회에서 세례와 치유 시, 그리고 타락한 자와 이단들을 다시 받아들일 때, 결혼과 회개와 임직 시 등에 사용되었다. 임직의 경우에 안수 권리는 오직 감독만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안수는 항상 기도와 함께 사용되었으며, 오랫동안 직분 은사를 수여하는 상징적 표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서서히 ‘자동적으로’(ex opere operato) 역사하는 하나의 성례(聖禮)로 이해되어 갔다.
루터파 교회는 초기에 이러한 가톨릭의 견해를 배척하였으나 나중에 그것을 다시 받아들였으며, 심지어 그것에 커다란 가치를 부여하기도 했다. 이에 반해 개혁 교회는, 안수는 그리스도의 명령이 아니며 따라서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견해를 일치하게 가졌다. 그러나 칼빈과 같은 이는 안수에 대해 그것은 유익하며 본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 반면(「기독교 강요」IV,3,16; 또한 Aretius, Spanheim, Koelman 등), 어떤 사람들은 아무래도 좋은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미신적 사용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것의 사용을 억제하였다(엠던 총회, 도르트레흐트 총회, 미들버르흐 총회; Voetius, De Moor, M. Vitringa 등).
어쨌든 안수는 임직에 있어서 본질적인 요소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예수님 자신이나 사도들에 의해, 그리고 장로들에 의해 한 마디도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안수에 의해 특별한 직분의 영이 기계적으로 전달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안수는 필요한 은사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직분에 요구되는 은사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수는 어떤 직분으로 부름받은 자를 공개적으로 세우는 것이며, 그 직분을 시작하도록 엄숙하게 취임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부름받은 자가 적법한 절차를 따라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보냄 받았으며, 그리고 그 직분에 필요한 은사들을 소유하고 있으며, 따라서 교회가 그를 그렇게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존경해야 한다는 것을 하나님 앞과 교회 앞에 엄숙하게,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것이다(H. Bavinck, Gereformeerde Dogmatiek, IV, 제4판, pp.365-367 참조).
한국 교회와 안수
그런데 한국 교회에서는 안수에 대해 마력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목사나 장로 안수식 때 안수를 통해 무슨 영력을 받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은연중에 배어 있다. 마치 안수자들의 손을 통해 영력이 전달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성도들의 관심은 온통 안수식 자체에 몰려 있다. 이것은 우리의 언어생활에도 잘 나타나 있다.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 “언제 목사로 임직받았는가?”라고 묻지 아니하고 “언제 안수받았는가?”라고 묻는다.
이것은 장로 장립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 안수만 받으면 다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안수 자체가 아니라 그 사람이 목사나 장로로 세움받기에 합당한 자격을 갖추었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목사의 경우에, 그 사람이 합당한 신학 교육을 받았는지 여부와 충분한 신학 지식을 소유하고 있는지 여부, 그리고 목사로서 합당한 신앙과 인격을 소유하고 있는지 여부의 문제이다. 이런 것들은 대개 신학대학원 졸업 여부와 목사 고시 합격 여부, 교회의 청빙 여부로 판정된다. 그래서 이러한 과정을 다 통과했다면 그 사람은 목사로서의 자격을 갖춘 것이며, 이것이 본질적으로 중요하다.
안수는 이제 그 사람이 목사로서 자격이 있으며 교회에서 목사직 수행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천명하는 외적 의식이다. 따라서 그 이전의 신학 교육과 준비 과정은 생각하지 아니하고 오로지 안수에만 초점을 두는 것은 잘못된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참고로 화란개혁교회에서는 목사 안수식이란 게 따로 없다. 목사 임직식을 할 때 목사나 신학 교수 한 분이 초청받아 와서 설교를 한 다음 내려와서 혼자서 손을 얹고 간단히 기도함으로 끝난다. 거기에는 무슨 거창한 안수식도 없고 사진 찍는 일도 없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목사로서 직무를 수행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었으며, 합당한 신학 교육을 거쳐 최종적으로 목사고시에 합격했다는 사실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장로 임직식 때에는 아예 안수를 하지 않는다. 그저 주일 오전 예배나 오후 예배 시에 목사가 장로 임직을 위한 예식문을 읽고서 장로 후보자를 불러 세운 후 서약 문답을 하고 교회 앞에 장로 취임 사실을 선포함으로써 끝이 난다. 그 시간은 총 1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으며, 노회 임원들을 초청하는 일도 없고 타교회 교인들을 초청하는 일도 없다. 안수식 같은 것은 아예 없으며 사진 찍는 일도 없다.
그런데 한국 교회에서 문제가 많이 되는 것은 병 고침 곧 치유(治癒)와 관계된 안수 기도이다. 이런 것은 종교개혁 당시나 그 후의 서양 교회에서는 거의 없었던 일이다. 따라서 신학적으로 논의가 되지도 않았다. 이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 오순절 계통에서 문제가 되기 시작했으며 급기야 한국의 장로교회에게까지 들어오게 된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예수님은 병을 고치실 때에 안수하실 때도 있었고 하지 않으실 때도 있었다. 예수님의 병 고치시는 방법은 경우에 따라 다르며 다양했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병자에게 안수하신 것은 그 안수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전달되기 때문이 아니라, 연약한 인간에 대한 긍휼과 연민의 정을 표현하시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병자를 위한 기도에서 안수가 꼭 필요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또는 안수를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할 수도 없다. 안수는 경우에 따라 시행할 수도 있고 시행하지 않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안수에 마력적인 능력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점이다. 치유의 능력은 전능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지 안수에게서 오는 것은 아니다.
실제적인 지침
따라서 안수의 사용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목회자가 각각의 형편에서 지혜롭게 사용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실천적인 지혜가 필요하다. 한국 교회의 여러 상황을 고려할 때 목회자는 안수의 무분별한 사용을 자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러나 성령의 강력한 충동에 의해 안수가 꼭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경우에는 조심스럽게 안수해야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안수 자체가 아니라 기도이며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믿음이다.
아울러서 우리는 건덕상의 문제를 중요하게 고려해야 한다. 어린아이들의 경우에는 손을 잡고 기도하는 것은 자연스러우며 문제될 것이 없다. 그리고 남자 성도들의 경우에도 별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성의 경우에는 안수를 피하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특별히 젊은 여성의 경우에는 피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이것은 신학적인 문제라가보다 건덕상의 문제이며 실제적인 지침이다.
그리고 안찰(按擦)의 경우는 성경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없다.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실 때, 베드로의 장모의 손을 만지신 경우와(마 8:15) 소경들의 눈을 만지신 경우(마 20:34), 그리고 병자의 양쪽 귀에 손가락을 넣고 침을 뱉아서 병자의 혀에 손을 대신 경우(막 7:33) 등을 볼 수 있지만, 병자들 두드리거나 때렸다는 기록은 발견할 수 없다. 상한 갈대도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심지도 꺼지 아니하시는 예수님께서 왜 병들고 약한 환자를 두들기고 때려야 하는지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따라서 안찰은 어떠한 경우에라도 잘못된 것이며 비성경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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