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룡 3

박형룡 목사의 가정생활

박형룡 목사의 가정생활 “가정예배의 모범 보였다” 성실한 학자와 겸손한 선생의 삶 진력 노충헌 기자 / 기독신문 (2018.10.25) 박형룡 목사의 장남 박아론 목사는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간)에서 박형룡 목사의 인간적인 면모를 자세히 기술했다. 박형룡 목사는 무엇보다 성실한 학자였다. 6.25 전쟁으로 대구에 피난을 내려갔던 난세에 ‘피난총회신학교’가 운영됐다. 이때 교회 구내에 마련된 교수 사택 단칸방에서 박형룡 목사의 4가족이 생활했다. 박 목사는 빈 사과 상자를 책상 삼아 대개 밤 12시나 새벽 1시까지 강의를 준비하고 책을 읽었다. 강의 시간이 끝나면 교수 연구실에 가서 연구하다가 귀가하던 그였지만 집에 와서도 공부에 힘썼다. 박형룡 목사가 1971년 총신대학교에서 영구 은퇴한 후 서울 봉천동..

박형룡과 3·1 만세운동

박형룡과 3·1 만세운동 정성구 명예교수 2018 (전 총신대·대신대 총장) 한국칼빈주의 연구원 C-STORY 자료 기미년(1919) 3월 1일에 시작된 만세운동은 일본의 철권통치에 저항한 민족자존을 세계만방에 선포한 거사였다. 이는 그냥 삼일운동이 아니라 일제에 저항한 한민족의 독립운동이었다. 3월 1일부터 두 달간의 전국적인 만세운동 즉, 일제에 대한 항쟁은 무려 1500회에 이르렀고 참가인원은 200만명이나 되었다. 삼일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일본의 무자비한 총칼에 맞서다가 7500여명이 사망했고, 부상자도 16,000명, 체포된 사람도 46,000이었다고 한다. 이 사건은 아직도 한민족이 죽지 않고 살아 있음을 만천하에 공포한 것이 된다. 내년이면 3·1만세운동 100주년이 되고, 금년은 박형룡..

박형룡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박형룡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이상웅 교수 / 대신대학교 조직신학 (2010.4) 개혁신학회 학술대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재조명’ 1. 들어가는 말 1643년에 회집된 웨스트민스터회의에서 만들어진 는 1647년 2월 상원에서 통과되고 같은 해 8월 27일에 스코틀랜드 교회의 신앙고백서로 먼저 채택되었고, 1648년 6월 28일에 영국 하원에서도 통과되었다. 1) 왕정복고로 인하여 본 신앙고백이 영국교회의 신앙고백서로 채택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지만, 미국 장로교회에서 표준문서로 받아들여졌고, 1729년에 채택된 법안에 의해서 목회자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기본적이며 필수적인 신조 가운데 하나로서 건전한 말씀과 기독교적 교리의 체계의 좋은 형태로 인정한다.”라고 서명하게 하였다. 2) 우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