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 2

워필드 박사의 투지

워필드 박사의 투지 김대운 목사 / 경성교회(수원) (2019.10.2)   1870년 11월 6일 프린스턴 신학교, 맥코쉬 교수의 오후 강의 중 우리의 유명한 B.B워필드 학생이 강의 내용을 노트하기 보다는 같은 반 친구인 제임스 스틴의 모습을 과도하게 희화한 그림(원문 그대로 번역하면, 과도하게 무례한 그림)을 그렸는데, 학생들이 그 그림을 돌려서 보게 됩니다. 결국 이 일로 두 청년은 프린스턴 신학교의 채플 앞에서 주먹 다짐을 하게 됩니다. 물론 크게 다치진 않았지만, 이 사건으로 워필드는 "The pugilist", 권투선수라는 별명을 얻게 됩니다. 3대 칼빈주의자 중의 하나로 꼽히는 워필드 박사의 별명이 권투선수였다니....너무 재미있네요. ​이 사건에서 보여준 워필드의 투지는 이후에도 나타납니..

종교개혁 시대의 하이델베르그와 현재 진리 파수의 충분한 환경

오늘을 사는 지혜 김인석 목사 / 칼빈장로교회 (2010.11.2)  16세기 중반 하이델베르그가 제네바와 함께 개혁의 중심도시가 되었던 배경에는 프레데릭 3세의 지배 하에서 가능하게 되었다. 하이델베르그 대학은 1386년에 설립되었으나 1559년 44세의 나이로 프레데릭 3세가 즉위한 후 루터주의와 칼빈주의 사이에 논쟁이 일어났는데 프레데릭 3세가 칼빈주의에 손을 들어주었다. 그 후로 하이델베르그 대학에는 인근의 개혁자들이 속속 몰려들기 시작했다. 1561년 자카리아스 우루시누스가 교수로 부임했고, 같은 해 카스퍼 올레비아누스도 부임했다. 이 두 사람에 의해서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이 작성되었다. 우루시누스의 경우는 비텐베르그에서 공부하였고 거기서 칼빈, 부쩌, 블링거, 그리고 피터 마터 베르미글리우스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