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개혁 15

칼뱅, 교회건설의 첫 삽을 뜨다 (칼뱅과 제네바교회 이야기 3)

칼뱅, 교회건설의 첫 삽을 뜨다   임종구 목사의 칼뱅과 제네바교회 이야기 (3)​임종구 목사/ 푸른초장 교회 (2017.1.19)​​개혁자의 용기가 남아있는가​전 세계가 2017년을 종교개혁 500주년으로 삼고 기념하지만, 유독 스위스는 2019년을 종교개혁 500주년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자신들의 개혁의 출발점을 츠빙글리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독일의 종교개혁이 루터교회로 귀결되고, 스위스의 종교개혁이 개혁교회를 태동시켰다는 점에서는 일리 있는 주장이라 생각된다. 이것은 제네바 교회건설의 초기에도 베른식 종교가 제네바에 일방적으로 강요되었다는 점에서 흐름을 같이 한다.​당시 스위스에는 제네바, 쿠어, 코스탄츠, 바젤, 로잔, 시옹 등 6개의 주교구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베른은 로잔교구를 흡수하고 제네바..

왜 프로테스탄트를 받아들였나 (칼뱅과 제네바교회 이야기 2)

왜 프로테스탄트를 받아들였나 임종구 목사의 칼뱅과 제네바교회 이야기 (2) ​임종구 목사 / 푸른초장교회 (2017.1.12)​​1536년은 칼뱅과 제네바에 있어 매우 중요한 해이다. 먼저 칼뱅이 바젤에서 초판을 출판했고, 제네바는 복음을 따라 살기로 모든 시민이 결정한 해이기 때문이다. 제네바는 스위스 도시들 가운데서 가장 마지막으로 복음을 받아들인 도시 중 하나이다. 스위스에서는 취리히(1524)가 가장 먼저 복음을 받아들였고, 이어서 베른(1528) 바젤(1529) 뇌샤텔(1530) 제네바(1536)로 이어진다.​중세시대에 야만족을 대상으로 선교할 때 한 도시, 한 민족이 돌아오는 집단적 회심이 일어났다. 종교개혁시대의 회심 역시 개인적이라기보다는 여전히 집단적, 제도적 회심이었다. 이것이 제국에..

낭트 칙령 (7-6) (교회개혁사 마지막회)

제 7장. 프랑스에서의 개혁운동 7.6 낭트 칙령 이상규, 교회개혁사, 성광문화사, 1997 / 개혁주의 학술원 (2008.3.5)  왕이었던 샤를르 9세는 무능하여 그가 왕위에 있던 1574년까지 프랑스는 혼란한 때였다. 그는 1574년 24세의 나이로 간헐적인 발작증 등 정신 이상으로 사망하였다. 이제 왕위는 앙리 3세에게로 이양되었다. 그는 1574년부터 1589년까지 15년간 왕위에 있었으나 우둔하고 유흥과 쾌락을 즐기는 불량아였다. 그는 한 광신적 수도사에 의해 피살되므로써 발로이스왕가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제 왕위는 나바르의 앙리에게로 돌아갔다. 그는 케더린의 딸 마가렛의 남편으로서 위그노였다. 성 바돌로매의 날 대학살에서 살아남은 그는 이제 36세의 장년이었다. 그가 앙리 4세란 이름으로..

교회개혁의 선구자들 (7-1 프랑스에서의 개혁운동)

제 7장. 프랑스에서의 개혁운동 7.1 교회개혁의 선구자들 이상규, 교회개혁사, 성광문화사, 1997 / 개혁주의 학술원 (2008.2.21)  지금까지 독일, 스위스, 영국, 스코틀랜드 등지에서 일어난 교회 개혁운동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이제 우리의 관심을 프랑스로 옮겨 그곳에서의 교회 개혁운동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6세기 당시, 프랑스는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였다. 루이 11세(1461~1483), 루이 12세(1498~1515)를 거쳐 프란소와 1세(Francois, 1515~1547)에 이르러 프랑스는 절대 왕권을 확립하였고, 강력한 중앙집권 정부를 형성하였다. 특히 프란소와 1세는 이탈리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당시의 교황 레오 10세와 볼로냐조약(Concordat of Bologna..

루터의 개혁운동과 문서의 역할 (2-8)

제 2장. 루터와 독일에서의 개혁운동  8. 루터의 개혁운동과 문서의 역할  이상규, 교회개혁사, 성광문화사, 1997 / 개혁주의 학술원 (2007.3.28)  루터의 개혁운동에 관한 우리들의 긴 이야기를 마감하면서 인쇄매체가 개혁운동에 얼마나 큰 기여를 했던가를 정리해두고자 한다. 비록 루터는 그 시대를 이끌어간 사건들을 태동시킨 인물이지만 그 뒤를 이어 온 유럽을 격동시킨 힘들은 한 개인에 비할바 없는 강력한 것이었다. 그 중요한 매체가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뒷받침된 문서의 역할이었다. 이 문서들을 통해 가장 짧은 기간 내에 가장 심오한 정신적 혁명을 가져올 수 있었다. 일반 대중들에게 대규모적으로 사상이나 정신을 전달하는데 있어서 문서는 중대한 역할을 하였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때가 차매…"..

루터파의 성립과 발전 (2-7)

제 2장. 루터와 독일에서의 개혁운동  7. 루터파의 성립과 발전 이상규, 교회개혁사, 성광문화사, 1997 / 개혁주의 학술원 (2007.3.28)  독일에서 루터주의는 1526년 제 1차 슈파이에르 제국회의를 전후하여 예배의식을 발전시켜갔고, 교회조직을 갖추어가기 시작하였다. 루터는 전통적인 예식문(liturgy)을 이용하여 독일어 찬송가 가사를 지었으며 음악과 찬송, 가정생활과 교육을 강조하였다. 그는 성경이 명백하게 금지하지 않는 한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전해오던 관습은 반드시 부인할 필요가 없다고 보았다. 그는 행정당국자들에게 각자의 권한 안에서 예배와 교회의 조직과 운영을 규제하도록 격려하였다. 그리하여 독일 안에는 영방교회(領邦敎會, Landeskirchen)가 생기게 되었고 그 밖의 다른 ..

농민전쟁 이후의 발전 (2-5)

제 2장. 루터와 독일에서의 개혁운동  5. 농민전쟁 이후의 발전  이상규, 교회개혁사, 성광문화사, 1997 / 개혁주의 학술원 (2007.3.23)  이제 1526년 이후의 루터파의 발전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농민전쟁이 끝난 후 교회문제는 정치화되었고 제국회의에서 종교문제와 교회개혁의 문제는 새롭게 토의되기에 이르렀다. 이미 1521년 보름스 제국회의에서 루터를 정죄하는 칙령을 발표했으나 시행되지 못했고 1523년 뉘른베르크(Nürnberg)에서 다시 제국회의가 소집되었을 때도 보름스칙령의 수행 요구는 묵살되었다. 이때 교황과 황제가 보낸 대표들이 보름스칙령을 따라 루터의 개혁운동을 제제하려고 했으나 도리어 루터파에 대한 융화 정책을 결의하였다. 당시의 정치적 배경은 루터의 종교개혁을 유리하게 인..

루터의 파문과 바르트부르크성에서의 은거 (2-3)

제 2장. 루터와 독일에서의 개혁운동  3. 루터의 파문과 바르트부르크성에서의 은거   이상규, 교회개혁사, 성광문화사, 1997 / 개혁주의 학술원 (2007.2.28)  1521년 교황으로부터 파문을 받은 루터는 이제 황제의 심판석 앞에 서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당시의 국가 교회적 성격 때문이기도 하지만 복잡하게 얽혀 있던 정치적 이해관계는 루터문제와 깊이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루터를 보름스(Worms) 제국의회에 소환하기로 한 것이다. 교황은 루터를 처단하기 위해서는 황제와 독일 영주들의 도움이 필요하였으므로 각종의 정치적 책략과 술수를 동원하였고, 황제는 프랑스의 프란시스 1세와의 정치적 대립 때문에 루터를 미끼로 하여 교황 레오 10세를 자기편으로 끌어 들이려고 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정치적..

면죄부 논쟁 (2-2)

제 2장. 루터와 독일에서의 개혁운동  2. 면죄부 논쟁 이상규, 교회개혁사, 성광문화사, 1997 / 개혁주의 학술원 (2007.2.28)  1517월 10월 31일은 루터 개인에게는 물론이지만 서구 역사에서의 커다란 변혁의 시작이었다. 루터는 이 날 소위 ‘95개조’라고 불리는 면죄부 판매의 부당성을 비판하고 신학적 토론을 제안하는 문서를 그가 봉직하는 비텐베르크 대학 게시판에 부착한 것이다.   당시 교황 레오 10세(Leo.X)는 로마의 성 베드로성당 증축을 위해 전임 교황이었던 율리우스 2세(Julius II, 1503~1513)때 공포된 면죄부 판매령을 시행하여 1515년부터 면죄부를 판매하고 있었다. 사실 면죄부는 이때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면죄부의 역사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데 특히 ..

개혁자 마르틴 루터 (2-1)

제 2장. 루터와 독일에서의 개혁운동  1. 개혁자 마르틴 루터  이상규, 교회개혁사, 성광문화사, 1997 / 개혁주의 학술원 (2007.2.28)  비록 루터는 종교개혁이라는 거대한 세계사적 변혁을 의도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이 개혁운동은 1517년 루터의 ‘95개조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루터는 이때로부터 거의 30여 년 간 이 개혁운동의 주도적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교회개혁사에 관한 산책을 독일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1. 개혁자 마르틴 루터  마르틴 루터는 1483년 11월 10일 아이스레벤(Eisleben)이란 곳에서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 다음날, 곧 성 마르틴(St. Martin)일 피터교회(Peter's Church)에서 영세를 받게 되었으므로 그의..

교회개혁은 왜 일어났는가? (1-3-2)

제 1장 교회개혁이란 무엇인가?  3-2. 교회개혁은 왜 일어났는가? 이상규, 교회개혁사, 성광문화사, 1997 / 개혁주의 학술원 (2007.2.28)  국가주의(민족주의)의 대두와 교회체제의 붕괴  교회개혁의 역사적, 혹은 정치적 배경으로 국가주의 혹은 민족주의를 들 수 있다. 이미 14세기 무렵부터 민족국가 (nation state)들이 교황청과 제국 하에서 이룩된 서부 유럽의 통합을 위협하기 시작하였다. 중세는 하나의 국제적인 국가였다고 할 수 있다. 교회를 떠나서는 국가라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다. 교회가 하나의 국가로서의 기능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족주의의 대두는 중세의 보편적 교회중심체계에 균열을 가져왔다. 중세 말에 이르러 국가에 대한 근대적 개념이 점차로 발달하게 되자 영..

교회개혁은 왜 일어났는가? (1-3-1)

제 1장 교회개혁이란 무엇인가?  3-1. 교회개혁은 왜 일어났는가? 이상규, 교회개혁사, 성광문화사, 1997 / 개혁주의 학술원 (2007.2.28)  때가 찬 경륜   1400년대를 마감하고 1500년대가 시작되는 한 시대의 변혁기에 유럽에서는 실로 엄청난 정신적 변화가 조용한 혁명을 예비하고 있었다. 이 변화는 매우 복합적인 것이었다. 정치질서나 문화현상, 세계관뿐만 아니라 교회중심의 구조(ecclesiastical structure)는 새로운 개편을 요청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16세기에 접어들면서 로마 가톨릭교회와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던 중세문화가 붕괴되고 서구문명의 새로운 단계의 중요한 양상들이 그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16세기에는 이전 시대와는 선명하게 구별되는 세계관, 인생..

교회개혁의 의의 (1-2)

제 1장 교회개혁이란 무엇인가?  2. 교회개혁의 의의  이상규, 교회개혁사, 성광문화사, 1997 / 개혁주의 학술원 (2007.2.28)   그러면 교회개혁이란 무엇이며 그것이 보여준 의미는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교회개혁이란 원시 그리스도교 회복운동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다시 말하면 교회개혁이란 그리스도 교회의 본래적인 신앙과 생활에서 이탈한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의 형식화된 의식적 생활에서 떠나 이탈한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의 형식화된 의식적 생활에서 떠나 본래적 기독교 혹은 사도적 교회에로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난 성례적적인 제도(Sacramental system)와 공적(功績)사상 등 교회적 율법주의(Ecclesiastical legalism)와 비복음적인 전통에서 벗..

교회개혁의 이해 (1-1)

제 1장 교회개혁이란 무엇인가?  1. 교회개혁의 이해  이상규, 교회개혁사, 성광문화사, 1997 / 개혁주의 학술원 (2007.2.28)  -- 16세기 종교개혁의 역사를 간명하게 기술한 교회개혁사는 루터, 쯔빙글리, 칼빈, 존 낙스 등의 종교개혁자들의 교회개혁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앞으로 매주 단위로 책의 내용을 차례로 연재할 것이다. --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대학의 젊은 신학 교수였던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그곳의 대학교회의 문 앞에 95개항의 논제(Die 95 Thesen)를 내건 사건은 16세기 교회개혁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루터는 면죄부 판매 등 당시 교회가 가르치는 잘못된 주장들에 대해 학문적인 토론을 열 계획이었지 교회개..

중세 유럽, 종교개혁 전야에 살았던 유아 및 어린이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중세 유럽, 종교개혁 전야에 살았던 유아 및 어린이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강윤석 강도사 (생략) 어린이의 중요성, 어린이가 얼마나 고귀한 가치를 지닌 존재인지 하나님의 말씀을 준비하면서 느낀 점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중세 유럽은 로마 천주교회가 지배하던 시대였다. 모든 정치와 문화나 예술은 모두 로마 천주교회의 지배하에 있었고, 그 어떤 것도 천주교회의 영향 밖에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당시로서는 로마 천주교회의 지배를 거부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런 시대적인 상황은 당연히 로마 천주교회의 수장인 교황과 그 밑의 사제들의 권위를 매우 막강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철저한 계급 사회였던 중세 유럽에서 사제는 가장 최상의 계급이었다. 그 어떤 귀족도, 심지어는 일국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