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산책 (6)
초기 기독교 박해의 역사
닉네임: 나그네 / 칼빈장로교회 (2017.3.20)
1. 박해의 시대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는 처음 3세기 동안 유대인에게서 시작해서 이방인들의 박해로 이어졌다. 대박해 시대 속에 살았던 교부 터툴리안의 유명한 말이 전해진다. “그리스도인들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 이 한 마디가 긴 박해시대에 굴하지 않고 세워진 교회의 숭고함을 보여준다.
2. 유대인들의 박해
유대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스데반, 사도 야고보를 처형했다. 이들은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끝없는 적개심으로 불타올랐다. 그러나 그들의 증오의 칼끝은 오히려 자신들을 향하게 하였다. 유대인들은 트라얀과 하드리안의 치하에 혹독한 핍박을 받았고 한 때 반란 세력을 모아 저항하고자 했다. 이때 그들에게 동조하지 않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잔인하게 살해하기도 했다. 그러나 135년 하드리안에게 패배할 때 50만 명이 전사하고 수 만 명 노예로, 984개의 마을들을 포함하여 팔레스타인 전 지역과 예루살렘 마저 다시 철저히 파괴되었고 그 자리에 이교의 신상과 신전이 들어섰다. 이 치욕의 역사는 오늘날에도 예루살렘의 무너지지 않은 서쪽 벽-통곡의 벽-에서 매주 금요일 마다 모여 토라(모세오경)를 읽으며 애통의식을 거행하고 있다.
3. 로마의 박해
로마의 정복 정책은 제국에 위해를 끼치지 않는 한 정복민족의 종교에 대해서 관용적이었다. 이 때문에 정복 초기에 기독교를 유대교의 한 분파로 여겨져서 한 동안 여러 도시들로 퍼질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그러나 제국이 더 이상 관용을 베풀 수 없는 상태로 기독교의 영향력은 증대되었다.
기독교는 유대교 이상으로 헬라인과 로마인들을 개종시켰으며, 황제숭배를 거부했고, 국가적 우상숭배 의식에 불참했고 이런 이유들로 제국의 정치가들은 상당한 압박과 우려를 느꼈다. 더욱이 범신론적 세계 속에서 유일신론자들인 기독교인들에 대해 대중들의 질투와 의심이 더해졌다. 기독교인들의 애찬식이 근친상간과 식인을 자행한다는 소문이 떠돌기까지 했다. 또한 우상숭배와 관련해 업을 가진 자들에 의해서 공격을 당하기도 했다.
4. 박해 연대기
도미티안 황제(A.D.81-96)는 자칭 ‘주와 하나님’으로 불리우길 원했다. 그는 기독교를 국가전복 세력으로 규정하여 수 많은 기독교인을 처형했다. 고위직들은 재산을 몰수하고 추방했다. 심지어 다윗의 후손들을 색출하여 죽였고 예수의 친족들을 괴롭혔다.
트라얀 황제(A.D.98-117)는 최초로 기독교를 불법 종교로 선언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A.D.161-180)는 철학자였고 좋은 교육 아래에서 정의롭고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기독교인을 불합리한 광신도들로 취급하였다. 당시 제국에 화제, 강의 범람, 지진과 폭동이 수 차례 일었는데 정치가들의 선동과 대중들은 기독교인들을 재난의 원인으로 지목하고 핍박했다. 177년에 당국은 이교도 노예들을 붙잡아 그들의 기독교 주인들을 모함하는 자백을 강요했다. 그 자백을 근거로 모진 고문을 가했다. 아흔 살의 노 감독 조차 온갖 고문을 당한 후 지하감옥에서 이틀만에 옥사하였다. 어떤 이들은 맹수의 우리에 던져졌다.
이후에도 계속 여러 가지 이유로 박해는 지속되었다. 그러다가 가장 악명 높은 핍박자 중 한 명이었던 데키우스(A.D.249-260) 아래에서 전례가 없는 박해가 개시되었다. 어느 때보다 잔인했고 제국 전역에 동시에 자행된 최초의 박해였고 가장 많은 순교자들을 냈던 시기다. 특히 교회의 감독들과 직분자들에 대한 핍박이 혹독했다. 이 시기에 카르타고의 유명한 감독 키프리안이 있었다. 그는 박해기간에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피신함으로 후에 많은 비난을 받았다. 그럼에도 그는 “우리 주님은 박해 때 몸을 숙이고 피신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 순교자의 면류관은 하나님의 은혜로 오는 것이고, 작정된 시간이 되기 전에는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잠시 피신한 채 그리스도께 진실하게 남아 있는 사람은 신앙을 부정하는게 아니라 다만 때를 기다리는 것일 뿐입니다”라고 변론했으며 훗날 순교로써 자신의 신앙을 입증했다.
갈리에누스(A.D.260-268)의 즉위로 기독교는 잠시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 심지어 합법적 종교로 승인하였다. 이 평화는 40여년간 지속되었다.
마지막 박해자 디오클레티안(A.D.303-311)는 이전에 기독교인들에게 행해진 박해를 완전히 잊어버릴만큼 집중적으로 혹독하게 가했다. 그는 초기에 갈리에누스의 관용을 존중했다. 하지만 이내 최악의 칙령을 선포했다. 기독교회를 모두 철거하고, 성경 사본들을 완전히 불사르고, 기독교인들의 공직과 시민권을 박탈하며, 우상 신들에게 제사를 드리지 않는 자는 예외 없이 처형하도록 했다. 그러나 그의 권력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고 기독교에 대한 박해도 서서히 힘을 잃어갔다.
이 무렵 청년 콘스탄티누스는 306년에 이미 갈리아와 스페인, 브리타니아를 지배하는 황제가 되었다. 그는 제국의 황제로 등극하면서 밀라노 칙령(313년)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칙령은 몰수된 교회 재산을 국가 재정으로 돌려주도록 명했다. 모든 사람들은 양심과 신념에 따라 종교 선택의 자유를 허락받았다. 이제 교회는 경멸에서 존경으로 바뀌었다.
5. 순교 후기
순교 기간에는 거룩한 죽음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천국에 들어갈 공로를 쌓기 위해, 성인으로 존경받기 위해 자기 몸을 이교 관리들에게 내어주는 이들도 있었다. 무리들이 이교도 총독을 찾아가 순교를 구걸하다가 일부만 처형되고 나머지는 모욕적인 말로 쫓겨나갔다. “이 가련한 사람들아, 당신들이 정말로 죽고 싶다면 절벽과 밧줄이 즐비하지 않은가?” 하지만 대부분의 순교자들은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고 신앙의 정절을 지킨 자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 문학, 교회 조직과 권징과 교리의 발전, 공예배와 기도 등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다른 한 편 미신과 인간의 공로를 높이며, 성인과 성유물 숭배의 토대를 만드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심지어 순교자들의 수난이 그리스도의 수난처럼 속죄의 효력이 있다고 가르치기까지 했다.
* 다음 시간에는 교회 조직과 권징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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